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천인공노할 중대한 범죄.”
그는 화를 감추지 않았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지난 5월3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최근 드러난 핵발전소 납품 비리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동안 일어난 핵발전소에 얽힌 각종 비리 사건을 하나씩 뜯어보면, 최근 벌어진 사고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김동철 의원실(민주당)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최근 5년 동안 비리로 징계를 받은 한수원 직원은 50명에 달한다. 대부분 납품업체에서 금품을 받은 이유로 해임·정직 등 중징계를 받았다. 비리가 들통나 법정에 선 이들을 들여다보면 ‘천인공노함’이 더 와닿는다. 이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핵발전소 비리 관련 판결문 28건을 입수해 비리의 전말을 재구성해봤다. 부품 빼돌리기·업(Up) 견적서·투잡 뛰기 등 화려한 각종 수법을 동원한 불법행위가 난무했다. 말 그대로 ‘비리의 백화점’이었다.
‘동기 사랑’이 맺어준 비리의 끈
한수원과 납품업체 사이에 비리가 움트려면 만남은 필수다. 한국전력 직원 출신인 이아무개(66)씨는 그 연결 고리를 ‘한국전력 입사 동기’에서 찾았다. 한수원은 2001년 한전에서 분리해 나온 회사다.
한전을 그만둔 뒤 원자력컨설팅 업체 ㅇ사를 운영해온 이씨는 한전 입사 동기이자 한수원 처장으로 근무했던 친구를 통해 한수원 품질보증실의 입찰·구매 담당 차장인 김아무개(43)씨를 소개받았다. 김씨를 한수원 내부 인맥으로 만든 이 대표는 핵발전소에 납품하길 원하는 업체 대표들에게 “한수원 납품업체 등록 업무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납품업체 두 곳에서 등록 추진비로 3천만원씩 모두 6천만원을 내놓았다. 이 돈은 한수원 쪽 연결고리인 김씨에게 흘러들었다. 한수원 기술검사 담당 직원들에게 납품업체 두 곳의 입찰 서류를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는 1천만원을 받아 챙겼고, 예상대로 납품업체 등록도 이뤄졌다.
그러나 꼬리가 길었다. 지난해 4월 검찰의 핵발전소 납품 비리 사건 수사로 이 대표의 ‘비리 컨설팅’은 덜미를 잡혔다. 울산지법(재판장 김헌범)은 지난해 11월 김씨에게 징역 1년6개월에 벌금 2천만원, 이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월성 핵발전소 한수원 총무팀 차장이던 한 아무개(57)씨의 비리는 한 편의 ‘막장드라마’ 같다. 회계 담당이던 그는 한수원이 골재 채취용으로 소유한 땅을 사고 싶어하는 업체 ㅇ사 공동대표 박아무개(65)·전아무개(66)씨를 알게 됐다. 수의계약으로 땅을 쉽게 살 수 있도록 힘써달라는 이들의 청탁은 유흥주점에서 이뤄졌다. 한달 간격으로 박 대표와 전 대표가 그를 울산의 한 유흥주점으로 ‘모셨다’. 한씨는 이들의 돈으로 두 번에 걸쳐 성매매를 하고, 현금 1500만원까지 따로 챙겼다.
“경쟁이 치열할 것 같습니다. 경영지원처장한테도 낙찰가격이 8억원 이상 될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세요.” 한씨가 정보를 흘렸다. ㅇ사는 땅 경쟁입찰금으로 약 10억원을 써냈다. 낙찰은 받았지만 2순위 매수자는 3억원이나 낮은 액수를 써냈다. 입찰금을 바가지 쓴 ㅇ사 대표들은 손해 본 돈을 내놓으라며 한씨의 비리를 한수원에 제보했다. 한씨는 5천만원을 대출해 무마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울산지법(재판장 권순열)은 지난해 11월 한씨에게 징역 1년에 벌금 3500만원, 박씨·전씨에게는 각각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발전소 재고품이 새 제품으로비리를 위한 ‘아이디어’는 그칠 줄 모른다. 고리 핵발전소 납품 비리 사건을 보면 그렇다. 한수원 터빈과장이던 신아무개(47)씨는 발전소 유지·보수 업무를 하는 한전KPS 직원 이아무개(43)씨와 3년 가까이 터빈팀에서 함께 일한 사이다. 유지·보수 업무 담당자였던 신씨는 구매 업무도 함께 맡으면서 ‘납품 사기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터빈밸브작동기 납품계약을 맺은 ㅎ업체 대표와 짜고 발전소 안에 방치돼 있던 녹슨 터빈밸브작동기를 고쳐 새 제품처럼 만든 뒤 납품하기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작업은 평소 ㅎ업체와 가까웠던 이씨가 맡았다. 그는 트럭으로 터빈밸브작동기를 옮겨 수리를 맡은 ㅎ업체 직원에게 녹을 벗기도록 시키고, 어떤 부품이 망가졌는지도 세세히 알려줬다. 시너·기름으로 닦아낸 중고 터빈밸브작동기는 ㅎ업체가 갓 만든 새 제품으로 둔갑했다. 모두 3대의 터빈밸브작동기가 납품됐고 한수원은 납품대금으로 12억원을 냈다.
한수원·한전KPS·납품업체까지 뛰어든 ‘납품 사기’는 아무도 알아챌 수 없을 듯했다. 그러나 ㅎ업체 퇴직자의 제보로 비리가 드러났다.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최석문)는 지난해 4월 신씨에게 징역 3년, 이씨에게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투잡’ 뛰는 과장, 숟가락 얹는 과장한수원 취업규칙에는 “직원의 영리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고리 핵발전소 전기팀 과장 김아무개씨에게는 이 조항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부인 명의로 고리 핵발전소에 공사 인력을 연결해주는 업체 ㅈ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가 알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ㅈ사의 존재는 계측제어팀 과장 최아무개(42)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ㅈ사에 공사 일감을 물어다줬다. 계측장비 유지·보수 업무를 맡고 있던 최씨는 프로젝트 사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청업체로부터 뇌물을 받고 최씨가 회사에 제안해 이뤄진 사업이었다. 그러나 정비공사 인원이 부족해지자, 최씨는 ㅈ사에 인력공급 계약을 맺도록 했다. 그 대가로 최씨는 직접 현장관리 감독을 봐주면서 돈을 받기로 했다. 그의 계좌에 5차례에 걸쳐 980만원이 입금됐다. 지난해 7월 울산지방법원(재판장 김낙형)이 최씨에게 징역 1년에 벌금 1천만원을 선고했다.
‘업 견적서’의 비밀때때로 뇌물은 멀쩡한 계약서를 통해서도 오고 갔다. 영광 핵발전소의 한수원 계측제어팀장이던 정아무개(51)씨를 보면 그렇다. 그는 2011년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을 개발해 공급하는 업체 ㅇ사와 계약 업무를 진행했다. 발전소 주전산기의 서버를 교체하는 6억원 규모의 계약 2건이 이뤄졌다.
계약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ㅇ업체가 적정 가격보다 2억원을 부풀린 이른바 ‘업(Up) 견적서’가 들어 있었다. 1년 전, 정씨가 ㅇ사 대표와 이를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8천만원을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계약이 성사되자 그는 발전소 근처 식당에서 두 번에 걸쳐 약속한 돈을 받아 챙겼다. 부산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김형천)는 올해 1월 ㅇ사 말고도 여러 곳에서 돈을 챙긴 그에게 징역 7년에 벌금 2억3천만원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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