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최수병 한국전력공사 사장은 펜을 꺼내들었다. 2001년 4월2일 오전 11시,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 대강당에서는 ‘한전·발전회사·전력거래소 간 인수인계 및 협약 서명식’이 열리고 있었다. 40년 동안 독점회사로 남아 있던 한전이 발전회사 6곳과 한국전력거래소 등으로 흩어지는 이른바 ‘한전 민영화’의 첫 단추가 끼워진 순간이었다. 한전 화력본부는 여러 발전소가 묶여 한국동부발전·한국서부발전 등의 회사로 쪼개졌다. 원전·수력본부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새 간판을 내걸었다.
납품·검증·운영업체 인력이 뒤섞여
한수원은 그동안 한전에서 맡아온 원전·수력발전소 운영을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발전소 건설과 기술 개발, 방사성폐기물 관리도 한수원의 몫이었다. 1966년 한전 기술부 안의 원자력과로 출발한 한수원은 6100명이 근무하는 핵발전 산업만 전문적으로 하는 독점회사가 됐다.
이른바 ‘원전 마피아’라는 말도 이때쯤 등장했다. 1999년 10월12일 김병태 의원(국민회의)이 국회 산업자원위원회에 나온 최 사장에게 이렇게 호통을 쳤다. “아, 그러니까 한전 안에 원전 마피아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한전이 이끄는 각종 원자력 연구 예산과 원자력공학과 학연으로 얽힌 업계의 구도 탓에 전문가들이 사고를 은폐하기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일었다. 핵발전소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핵발전소 고장이 반복되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동안 핵발전소가 늘어날수록 핵산업계의 ‘이너서클’도 탄탄해졌을 테니 말이다. 최근 검찰 조사로 불거진 새한티이피의 제어케이블 시험보고서 위조 사건은 ‘원전 마피아’의 폐해를 그대로 보여줬다. 사실상 독점기업인 한수원의 폐쇄적인 문화를 뼈대로 짬짜미와 봐주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납품업체·검증업체·운영업체 사이에 인력이 뒤섞이면서 핵산업계 내부의 건강한 비판이 불가능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한겨레21>은 핵산업계의 인력 생태계를 추론해보기 위해, 한수원 창사 이후 1직급(처장)·2직급(부장) 등 간부 퇴직자 81명을 비롯해 2000년~현재까지 한수원·한국전력·한국전력기술·한국원자력문화재단 간부급 퇴직자 272명의 재취업 현황 자료를 입수해 분석했다. 이 자료는 지난 6월5∼7일 해당 기관이 김제남 의원실(진보정의당)에 제출한 명단이다.
전력업계 가운데 한수원 출신 간부의 재취업률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산업계의 특수성 덕이기도 하다. 특히 이명박 정부 때 한전컨소시엄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핵발전소 사업 수주로 퇴직자의 몸값은 더 치솟았다. 실제로 2008~2010년 한수원 직원들은 UAE 핵발전소 사업 물량을 확보하려는 삼성물산·두산중공업·현대건설 등 대형 건설사로 자리를 많이 옮겼다.
그만두자마자 핵발전소 건설사로
한수원 임원급 인사인 윤종근 전 경영관리본부장(전무)은 2008년 12월5일 회사를 그만둔 뒤, 곧바로 삼성물산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업계 관계자는 “건설·플랜트 회사에서 외부에서 온 고문은 사업 관련 조언이나 인적 네트워크 활용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앞서 서태수 전 건설부장(2직급)은 그해 3월 두산중공업 고문이 됐고, 김흥대 전 경영기획처장은 같은 해 9월 한수원을 떠나 현대건설 자문을 맡았다. 2010년 이후에는 전태주 전 고리원전본부장(현대산업개발 전무), 황상철 신월성원전 건설소장(대림산업 고문), 오상권 전 영광원전본부 부처장(두산중공업 기술자문)이 자리를 옮겼다. 이들이 몸담고 있는 대표적 핵발전소 건설업체인 현대건설·삼성물산·두산중공업 등의 대표들은 ‘한국원자력산업회의’라는 친목단체에서 김균섭 전 한수원 사장과 함께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원자력산업회의 회장은 조환익 한전 사장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한수원 관계자는 바로 전용갑 발전본부장 겸 부사장이다. 전 부사장은 최근 제어케이블 납품 비리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 김균섭 사장을 대신해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사장 직무대행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전 사장 직무대행은 한수원→두산중공업→한수원을 넘나든 이른바 ‘회전문’ 인사다. 재취업 현황 자료를 보면, 전씨는 2010년 9월30일 1(갑)직급인 발전처장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났다. 퇴직과 동시에 두산중공업 고문으로 취업했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한수원과 UAE 원전 공급 계약을 맺은 상태로, 이듬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국형 신형경수로’(APR1400)를 적용한 신고리 핵발전소 3·4호기용 주기기를 출하했다. 납품업체 고문이던 그는 지난해 한수원의 상임이사 사내·외 공모에서 사내 추천 방식으로 발전본부장으로 선발됐다. 당시 전 부사장과 함께 건설본부 상임이사로는 김동수 한국전력기술 원자로설계개발단 상무가 뽑혔고 안전기술본부장으로는 조병옥 한수원 중앙연구원장이 뽑혔다.
실제로 한수원 퇴직 간부 81명 가운데 70명은 퇴직한 날 바로 납품업체에 취직했다. 공백기가 없기 때문에 판검사가 직전 근무지 앞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는 것과 같은 ‘전관예우’ 효과를 누릴 수밖에 없다. 김균섭 전 사장은 취임 직후 이런 문제를 막고자 자체 규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임직원 윤리행동강령에 “임원과 1(갑·을)직급 직원은 퇴직일로부터 3년 동안 협력업체 취업을 제한한다”는 내용을 넣고, 퇴직자에게 서명을 받았다. 그러나 강제성은 없었다. 한수원 관계자는 “전 부사장이 퇴사할 당시에는 협력업체 취업 제한이 없었다”고 말했다.
차 떼고 포 뗀 ‘윤리행동강령’
지침을 시행한 뒤에도 김병섭 전 원자력발전기술원 수석연구원(1(갑)직급)이 지난 3월 세안기술 부사장으로 옮기는 등 직원 3명은 퇴직과 동시에 회사를 옮겼다. 이에 대해 한수원에서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14조(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등의 지정)에 따라 한전 기업집단에 속한 계열회사 및 출자회사는 (취업제한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설명했다. 납품업체 가운데에서도 한전·한국남동발전·한국중부발전·한국서부발전·한국남부발전·한국동서발전 등 발전 자회사와 한전기술·한전KPS·한전원자력연료·한전KDN 등은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한티이피의 제어케이블 시험보고서 위조 사건에서 보듯, 퇴직자 재취업이 늘어날수록 핵발전소 검증·정비 등을 맡고 있는 한전 자회사들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그만큼 줄어든다. 한수원 퇴직 간부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11명이 한전KPS와 한전KDN, 한전기술 등에 재취업을 했다. 현재 태성은 한전KPS 사장은 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장 출신이다.
핵발전소는 1기에 쓰는 150만 개가 넘는 부품 가운데 80%는 주문 제작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한수원 등록 납품업체만 1천 개가 넘는다. 핵발전소 운영은 한수원을 중심으로 설계 기술을 맡고 있는 한전 E&C, 핵연료봉을 공급하는 한전원자력연료, 그리고 발전소 정비를 맡고 있는 한전KPS 등이 하고 있다. 모두 한전 자회사이기 때문에 한전 출신 사장들이 재취업하는 곳이다. 한전의 재취업 자료를 보면, 2000년부터 현재까지 재취업한 한전 상임이사(사장·감사)급 퇴직자 19명 가운데 7명이 핵발전소 운영과 연관된 한전KPS, 한전KDN, 한국원자력연료 등의 사장과 핵발전소 건설에 참여하는 두산중공업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전기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재취업한 1직급(수석급)·2직급(주임급) 퇴직자 146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핵발전소와 관련한 납품업체로 옮겨갔다. 삼성물산·두산중공업 등 핵발전소 건설업체뿐만 아니라 한수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 경쟁이 제한된 상태에서 납품을 해야 하는 관련 업계의 특성상 전력업체 출신을 영입해야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보여준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도 한국전기협회, 한국원자력산업회의 등 핵 관련 업체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있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지난 6월7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현재 가동 중이거나 건설 중인 모든 핵발전소의 부품 시험성적서 12만5천 건을 전수조사하는 내용을 담은 ‘원전비리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이날 정 총리는 핵산업계에서 끊이지 않는 회전문 인사를 막는 대안도 내놓았다. 그동안 한수원 처장급(1직급)에만 적용하던 3년 동안 협력업체 재취업을 금지하도록 한 조항을 부장급(2직급)으로 확대하기로 했으며, 예외조항으로 남아 있던 한전기술·한국원자력연료 등 한전 자회사에도 ‘재취업 금지’를 적용하기로 했다. 재취업 금지 조항을 어긴 협력업체에는 계약·등록 취소 등의 불이익을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재취업 금지 조항 확대했지만
이번 기회에 한수원을 중심으로 한 핵산업 전반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제남 의원은 “기획재정부 출신 관료 중심의 모피아가 경제위기를 초래한 것처럼, 원전 마피아는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며 “원전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수원은 창사 100일째가 되던 2001년 7월13일 ‘국민이 신뢰하는 세계 최우수 전력회사 창조’라는 표어를 기업 이념으로 내걸었다. 깃발을 휘두르며 외쳤던 표어는 10년 만에 허망하게 빛이 바랬다. 신뢰를 잃은 한수원의 대수술은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모두를 위한 ‘핵패밀리’의 해체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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