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그들은 왜 이혼하지 않을까? “정말 잔인하군요.” “잔인이라고 했어? 진심을 짓밟는 네가 잔인한 거야. 절대 이혼 못해!” 잔인한 건 맞다. 드라마 에서 술잔이 날고 피가 흘러도, 심지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가둬도 여주인공이 현실을 깨닫는 속도는 잔인하리만치 천천히 흐른다. 아무리 자신의 발목을 잡는 가족이라도 절대 헤어지지 못하는 것은 현실일까, 드라마일까, 우리의 판타지일까.
TV 드라마가 그리는 가족은 현실을 열심히 들여다본 결과다. 시청자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기 가족 문제를 가늠하고 지향하는 가족 형태를 그려보기도 한다. 우리나라 가구 넷 중 하나는 1인 가구다. 게다가 50대 이상 황혼 이혼은 7년째 늘어나고 있다. 이제 가족은 평생 동반자가 아니라 구조조정 가능한 관계일지 모른다. 그러나 TV 드라마에선 여전히 대가족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며느리, 말도 안 되는 큰소리를 치는 시부모, 밖으로 도는 남편들이 대세다. 가족 관계가 막장으로 치달을수록 시청률은 수직 상승하는 가족 드라마에서 시청자는 무엇을 얻는 것일까. 이 설문조사 전문기업 두잇서베이와 함께 2012~2013년 인기 드라마에 등장한 가족을 두고 설문조사를 벌였다. 가족 유연화가 커질수록 지키고 싶은 가족의 모델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다.
설문 참여자 5192명 중 32.9%인 1707명은 가장 갖고 싶은 가족으로 ‘에 나온 성시원(정은지)의 울타리로서의 가족’을 꼽았다. 직장에서 특출날 것 없는 아버지, 딸의 일상을 공유하는 전업주부 어머니는 평범한 가족의 전형이다. 전통을 내세우거나 부유한 가족보다는 일상의 평범한 가족을 이상향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 응답자 중 26.4%(1371명)는 ‘ 한세경(문근영)의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족’을 선택했다. 이 1990년대의 평범한 서민 가정이었다면, 한세경의 가족은 2000년대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폭락, 일자리 구조 변화 등을 경험한 또 다른 형태의 서민 가정이다. 아버지는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밀려 오랫동안 해오던 동네 빵집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는 허랑방탕한 여자가 아니었다. 내 집 한 칸 마련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지막지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죄밖에 없다. 이제 자식들도 안다. 가족 드라마는 사회에 빚지고 있다. 빚이 쌓여 하우스푸어로 전락해 친구 집에 세들어 살면서도 가족들은 가족 경제 몰락의 책임을 서로 따지지 않았다.
드라마는 무능한 아버지로 인한 가족의 갈등과 분열을 자주 그리지만 현실에서 아버지의 경제력은 가족에게 심각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현실의 가족을 구조조정하겠다는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지만, 드라마를 두고는 은근히 말해볼 수 있다. 드라마에서 정리해고하고 싶은 가족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설문 참여자 중 28.2%(1445명)가 ‘의 ‘헬리콥터맘’ 민기 엄마(김나운)’를 꼽았다. ‘에서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영자(박원숙)’도 속히 구조조정해야 할 대상이다(26.9%, 1380명). 한편 설문참여자 중 17.6%(901명)가 ‘에서 무능했던 아버지 삼재(천호진)’를 지목했다. 절반 이상의 참여자가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보다는 자식의 일상을 간섭하거나 침범하는 어머니 혹은 시어머니의 존재를 더 견딜 수 없어 하는 셈이다.
가장 닮은 가족은현실에서도 그러한가. (씨네21북스)에 등장한 고민을 살피면 이렇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퇴근하자마자 핸드백을 현관에 내던지고 내 공부부터 챙기셨다. 엄마 말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도 내 진로며, 여행 계획, 심지어 남자친구 문제까지도 ‘지도’하려고 하신다.” “나를 통해 무언가를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내가 중학생이 된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엄마는 나와 함께 있으면 항상 무슨 일인가를 지적하시는데, 내용은 대충 내가 다 틀렸고 부족하고 뭘 모른다는 얘기다.” 저자 한기연 박사(임상심리학)는 자식을 놓지 못하는 부모,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의 관계를 해결하려면 ‘환상 속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환상 속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완벽하지 않은 가족 속의 나 자신이 어딘가 부족하고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가족 구성원 중 개선·정리하고 싶은 관계를 물은 질문에서도 23.4%(1197명)가 ‘부모와의 관계’를 선택했다. 최광현 트라우마가족치료연구소장은 (부키)에서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무의식중에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썼다.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어머니가 아이를 보며 무의식중에 자신의 지난날 상처를 돌아보고 매듭을 끊지 못하는데, 이 경우 나타나는 양상이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자신이 경험했듯 사랑을 주지 못하는 어머니가 되거나 반대로 상처를 보상받으려고 과도한 돌봄을 제공하는 경우다. 그러나 최 소장은 이런 부모를 괴물로 대하기보다는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고 부당한 가족 관계에서 피해를 입었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인정해야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부모·자식 간의 갈등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가족의 꼬인 매듭을 푸는 가장 첫 번째 실마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당신의 가족은 어떤 모양새인가. 자신의 가족과 닮은 가족 유형으로는 ‘ 세경의 가족’(36%, 1857명)을 가장 많이 꼽았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 따라 경제력을 잃은 아버지와 그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구성원들로 맺어진 가족은 다른 질문에서는 ‘이상적인 가족’이었고,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 가족’이란 뜻이다.
비현실적 29.2%, 공감 26.8%그런데 이들 평범한 가족이 들여다보는 TV 속 가족은 점점 더 기이해진다. 에서 서영(이보영)은 자신을 고아라고 속이고 결혼할 정도로 아버지와의 갈등이 깊다. 의 승조(박시후)는 아버지와 관계맺기에 실패한 아들이었다. 에서 영자는 며느리와의 갈등이 깊다 못해 무시·폭언·감금·폭행 등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고부 갈등을 심화한다. 설문 참여자의 29.2%는 ‘선과 악이 극단적으로 대결하는 비현실적 세계에 흥미를 느낀다’고 답했다. 26.8%는 ‘현실에 있는 가족 문제와 비슷해 공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우리들의 가족은 가끔은 초현실적 막장 드라마고 가끔은 현실적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