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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중요하다.
헌법재판소는 2008년 1월10일 ‘이명박 특검법’에 대해 일부 조항만을 제외하고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BBK 주가조작 연루 의혹 등에 대한 특별검사의 수사는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그대로 진행되게 됐다. 수사 결과는 ‘꼬리곰탕 특검’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싱겁게 끝났지만, 눈여겨볼 것은 당시 법무부와 대법원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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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특검법’으로 시작된 2008년
헌재는 위헌 여부 결정을 앞두고 법무부와 대법원에 ‘의견’을 구했다. 대법원은 ‘기존 관례’에 따라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다. 법률 판단 기관으로서 의견을 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법무부는 달랐다. 처음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며 특검 수사를 수용할 뜻을 밝혔던 법무부는, 정작 헌재의 의견 요청이 있자 “특검법이 위헌 소지가 있다”는 답변을 보냈다. 특검법의 주요 쟁점 4가지가 모두 위헌이라고 당당히 써내려간 것이다. ‘당선자 눈치보기’였다. 헌재가 곧바로 합헌을 선언하는 바람에 법률가로서 톡톡히 망신을 당했지만, 취임을 앞둔 대통령 당선자의 눈도장을 제대로 받은 법무검찰은 희희낙락했다. 대법원, 헌재, 검찰은 그렇게 이명박 정부 5년을 시작했다. 그 뒤 5년이 어땠는지는 새로 들어설 정권에서 개혁 대상 1순위 자리를 완전히 굳힌 검찰의 붕괴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럼 사법부는 괜찮은가. 2008년 9월26일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을 찾았다. ‘사법 60돌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참여정부에서 임명된 이용훈 대법원장이 임기 6년 중 절반을 채운 시점이었다. 이 대법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사법부가 저지른 그릇된 판결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2005년 9월 취임 당시의 사법부 과거사 청산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질서 수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그 결과 헌법의 기본적 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새 출발을 하려면 먼저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용기와 자기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의 축사가 이어졌다. 대법원장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인 고위 법관들은 그 자리에서 “사법의 포퓰리즘은 경계해야 한다”는 축사 같지 않은 축사를 들어야 했다. 이 대통령은 “국민의 신뢰는 인기와 여론이 아니라, 오직 정의와 양심의 소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도 했다. 참여정부에서 시작한 과거사 청산 작업을 겨냥한 말인지, 자신에게 두 차례나 사과문을 발표하게 만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관련한 말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촛불집회를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등을 동원한 서슬 퍼런 공안 정국으로 찍어 누른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사법 포퓰리즘’은 듣는 이를 당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촛불집회 관련 사건이 몰린 서울중앙지법의 신영철 원장이 판사들의 재판에 간섭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이듬해 이 대통령으로부터 대법관 임명장을 받아든다.
이명박 정부에서 퇴임한 어느 최고위 법관은 지난 5년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저쪽에서 깜짝 놀랄 결론도 많았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며 항의도 받았다”고 했다. 깜짝 놀라고 항의도 했다는 ‘저쪽’은 주로 청와대와 한나라당(새누리당)을, 때로는 국정원을, 때로는 검찰과 경찰을 의미한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 사법부로 몰렸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법부로서는 행정부와 입법부를 견제하는 나름의 역할은 했다는 자평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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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사회 변화시킨 의미 있는 판결을 찾으려 했는데
솔직해지자. ‘저쪽’이 아니라 국민이 죽어나는 판결이 더 많았다. 한국 사회는 지난 5년 동안 지나치게 소모됐다. 생산적인 곳에 쓰여야 할 에너지가 상식이 무너진 어이없는 일탈들을 바로잡는 데, 우리사회를 더는 후퇴시키지 않으려고 방어선을 치는 데 소비됐다. 사법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의 송소연 이사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형벌권이 과도하게 사용됐다. 나라나 공동체로 볼때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소모가 너무나 컸던 정부였다”고 했다. “좋은 판결이라고 사법부가 내놓은 것들도 돌이켜보면 대단한 판결이 아니라 상식을 상식으로 본 판결이었다.” 여성학자인 권김현영씨의 생각도 비슷하다. “지난 5년 동안 사법부가 다룬 시국사건이 너무나 많았다. 여성 문제든 소수자 문제든 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토론해야 할 사건은 많다. 논쟁적 사안에 대한 법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사법부가 거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훨씬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들이 황당한 시국사건에 진을 빼느라 옆으로 밀쳐졌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말 첫발을 뗀 ‘올해의 판결’은 애초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결정하는 판결’에 주목하고자 했다. 우리 삶과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판결들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 판결의 보폭만큼 앞으로 전진하려고 했다. 그해 ‘최고의 판결’은 ‘불법 파견도 2년 이상 근무 땐 직접고용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선정됐다. 의미 있는 사건과 판결을 곱씹으며 우리 사회는 그만큼 전진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촛불집회와 공안 정국이 쓸고 간 2008년의 ‘뒷설거지’가 2009년에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해 ‘최고의 판결’은 야간 옥외집회 참가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판결에 돌아갔다.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 무죄 선고, 미국산 쇠고기 검역 불합격 작업장 공개 판결이 ‘올해의 판결’에 선정됐다. 검경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 고인이 된 리영희 교수가 “파시즘 시대의 초기”라며 질타한 독선적 정권이 만들어낸 ‘쓰레기들’이었다. 2010년 역시 한발 전진보다는 진지를 파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중요한 한 해였다. <pd> 광우병 쇠고기 보도 무죄 선고가 ‘최고의 판결’로 뽑혔다. 검찰의 용산 참사 수사기록 비공개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 촛불집회 참여단체에 대한 보조금 지급 중단을 위법하다고 본 판결이 ‘올해의 판결’에 올랐다. 우리 사회의 상식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사건들이다. 심사위원들은 “진보의 해라기보다 상식의 해였다. 기존 법률 해석을 뛰어넘는 진일보한 판결보다는 법령과 제도를 선용한 상식적인 판결이 많았다”고 평했다. 형사사법이나 집회·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과 관련한 판결이 주로 후보에 올랐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민의 기본권은 언제나 위태로웠다.
대법원장의 “미국 사법부의 위기”… 남의 일일까
지난해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행사를 원천봉쇄한 경찰의 차벽은 위헌이라고 판단한 헌재의 결정, 4대강 사업에 맞선 팔당지역 유기농 농민들의 손을 들어준 법원 판결이 ‘올해의 판결’에 선정됐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구성이 바뀌며 사법부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도 심해졌다.
우리 사회는 지난 5년간 후퇴와 전진을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 5년 전 출발선에서 몇 발짝 물러난 지점 언저리에서 다음 5년을 고민하고 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한가람 변호사는 “사법부가 주어진 역할을 가장 잘했어야 할 지난 5년이었다”고 했다. 정치적 프로세스가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 정권의 일방적 독주를 막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 사법부와 헌재였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권법을 전공한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교수의 진단도 비슷하다. “지난 5년 동안 법치주의가 너무 훼손됐다. 인권 수준도 떨어졌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게 사법부의 역할이었다. 문제는 사법부가 의미 있는 판결을 내놓아도 행정부나 입법부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사법부의 문제인지, 아니면 한국 사법의 고유한 한계인지 고민할 때다.”
12월10일 대법원에서는 검사·변호사로 활동하다 법관을 지원한 이들의 임명식이 열렸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법관 임명식사를 통해 ‘재판 독립’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완전한 민주주의를 달성하였지만, 관용과 양보의 덕목이 엷어지고 다양한 가치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재판의 독립은 교묘한 양상으로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근거 없는 억측이나 사시적인 시각으로 재판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하고 여론을 오도하여 법원을 부당하게 공격하기도 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지지도가 최근 추락한 큰 이유가 재판의 결론이 순수한 법의 정신보다는 소속 법관 개인의 정치적·이념적 신조에 좌우되고 있다고 많은 국민이 의심하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사법부가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음을 우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얕은 정의감이나 설익은 신조를 양심과 혼동하다가는 오히려 재판의 독립이 저해될 뿐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대법관들이 미국 연방대법관들을 걱정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정치적 색깔로 사법부의 신뢰를 갉아먹는 데 큰 역할을 한 이가 아직도 대법관으로 있는”(김보라미 변호사) 현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러니 시민들이 체감하는 사법의 현실을 ‘현장’에서 직접 대면하는 이들은 양 대법원장이 느낀다는 ‘위기’의 진정성을 쉽게 믿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법부가 지난 5년 동안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 문제는 현장에서 해결해야지 사법부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양홍석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변호사) “올해의 판결에 오르지 못하는 수많은 현장의 사건들이 있다. 삶을 중시하는 법이어야지 공식에 끼워맞추는 판결은 필요 없다. 이명박 정부 5년뿐만 아니라 다음 5년도 별로 기대하지 않는 이유다. 법은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정의여야 한다.”(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법과 양심에 따르지 않은 판사 이름도 기억해야
5년이라는 긴 시간은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인권의 중요성, 그리고 사법정의를 일깨워준 역사의 교육 현장”(최재홍 녹색법률센터변호사)이었다. 말이 참 쓰다. 5년 전 우리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가 그렇다. 그럼에도 작은 판결이라도 용기 있게 내린 판사들, 어렵게 변론을 이어간 변호사, 권력에 맞선 시민들의 이름은 기억돼야 옳다. 정치가 사라진 곳에 시민의 상식을 길어올리는 금문자들이 그들의 손으로 쓰였다. 말인즉,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 판사들의 이름도 당연히 기억하자는 거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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