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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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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5년짜리 ‘표현의 자유 고엽제’

최고의 판결 - 헌법재판소의 인터넷실명제 재판관 전원 일치 위헌 결정…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에 놓이게 하고 수사 편의에 치우쳐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
등록 2012-12-21 21:58 수정 2020-05-03 04:27

5년 만에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을 말하는 게 아니다.
2007년 1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이 개정됐다. 인터넷에 글을 쓰려면 1년 365일 내내 자신의 신분을 까야 하는 ‘인터넷실명제’가 법 개정의 핵심이었다. 당시 법 개정 이유가 웃긴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이용률을 자랑하는, 그러니까 정보통신 강국이라는 게 이유였다. 잘 닦아놓은 통신망을 따라 인터넷 이용자가 늘어나 온라인 게시판이나 댓글을 통한 언어폭력과 명예훼손이 심해졌다고 했다. 정확한 통계를 통한 진단보다는 몇몇 상징적인 사건이 심판대에 올려졌다. 2005년 이른바 ‘개똥녀 사건’이 인터넷을 달궜다. 지하철에서 내리며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은 여성의 얼굴이 인터넷에 공개됐다. 외신들까지 ‘인터넷이 시험대에 올랐다’며 ‘개똥녀’(Dog Poop Girl)를 소개했다.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연예인 X파일’이 인터넷을 통해 퍼날라진 것도 이때였다.

인터넷에 글을 쓰려면 주민등록번호 등 자기 개인정보를 포털사에 넘겨야 했던 인터넷실명제가 5년 만에 폐지됐다. 권력이 그 좋은 걸 뺏겼으니 가만히 있을까. 무언가 또 다른 궁리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인터넷에 글을 쓰려면 주민등록번호 등 자기 개인정보를 포털사에 넘겨야 했던 인터넷실명제가 5년 만에 폐지됐다. 권력이 그 좋은 걸 뺏겼으니 가만히 있을까. 무언가 또 다른 궁리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효율성과 편의성은 중독성을 갖는다. 인터넷실명제 역시 ‘국가가 편하자는 것’ 말고는 딱히 큰 이유를 찾기 어렵다.
소매치기 막겠다고 보행자 실명제 실시?

행정 당국과 입법을 책임진 국회는 손쉽게도 인터넷 이용자들의 ‘익명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쓰는 글이 사람을 잡는다는 주장이었다. 이른바 ‘떳떳하면 왜 이름을 못 밝히냐’는 조전혁식 저급 논리가 작동한 것이다. (조전혁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10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 명단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법원은 ‘교사들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익명성과 떳떳함은 전혀 다른 범주의 얘기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는 “익명성은 사람이 인터넷을 만나서 얻게 된 ‘무기’가 아니라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개똥녀 사건이나 연예인 X파일 사건 등은 개똥녀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생각, 연예인이라는 직업군에 대한 호기심, 전파 속도가 빠른 인터넷 매체의 특성 등이 복잡하게 얽혀 나타난 현상이지 오로지 ‘익명성’ 하나만 때려잡으면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그런 식이라면 마찬가지로 익명의 공간인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어찌할 것이냐”고 묻는다. “소매치기가 가능한 것은 피해자가 소매치기의 신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길거리의 익명성을 소매치기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소매치기 막겠다고 보행자 실명제법을 만들어야 하나.”

게다가 이미 인터넷실명제는 시행되고 있었다. 2001년부터 인터넷실명제를 추진하던 정부는 ‘표현의 자유 제약’ ‘전자감시 수단화’ 논란을 이겨내고 2004년 3월 공직선거법에 ‘인터넷 선거게시판 실명제’를 도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뿐만 아니라 대형 포털 사이트 대부분은 이미 가입 단계부터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실명제 아래에서도 발생하는 사이버 폭력이 익명성의 탓으로 돌려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개인의 삶을 13자리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전일적으로 관리하는 대한민국 정부에 사람의 이름과 관리번호는 국가 운영의 핵심 자산이다. 효율성과 편의성은 중독성을 갖는다. 법에 의한 강제력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사적 영역까지 파고들어 기어코 익명성을 거세하고 말겠다는 국가의 의지가 창궐하는 이유다. 인터넷실명제 역시 ‘국가가 편하자는 것’ 말고는 딱히 큰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인터넷실명제 전면 도입이 논의되던 2006년 12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는 법안 심사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실명제는 정보통신 서비스 이용을 개시하는 순간에 자신의 실제 신원을 밝히고 이에 따라 정보통신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의미한다. 다만, 일단 실명으로 가입하고 있는 한 추후의 통신 활동 과정에서는 반드시 실명을 노출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고 어떠한 ID를 사용하는가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실명제는 ‘게시자신원의 추적 가능성’에 초점을 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경우 수사기관이 사람 잡기 편하자고 만든 것이 인터넷실명제라는 말이다.

“인터넷을 악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대다수 시민의 정당한의사표현을 제한하는 것으로 익명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다.”-2012년 8월23일 헌법재판소
촛불시위 이듬해, 기준이 10만 명 이하로
2009년 참여연대·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인터넷실명제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2009년 참여연대·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인터넷실명제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인터넷실명제는 이명박 정부 들어 말 그대로 사람 잡는 칼이 되었다. 실명제를 통해 포털사 등이 확보한 이용자들의 개인정보가 수사기관에 마구 넘어갔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로 홍역을 치렀다. 실명제 기준이 강화된 것은 당연했다. 이듬해 4월 하루 방문자 수 30만 명 이상이던 인터넷실명제 적용대상 사이트 기준이 10만 명으로 크게 낮춰졌다. 사실상 한국인이 드나드는 모든 사이트가 대상이 된 셈이다.

2012년 8월23일 헌법재판소는 인터넷실명제가 헌법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헌법재판관 8명 전원 일치(한 자리 공석)의 위헌 결정이었다. 헌재는 “인터넷 공간에서 이뤄지는 익명 표현은 인터넷이 가지는 정보 전달의 신속성 및 상호성과 결합해 현실 공간에서의 경제력이나 권력에 의한 위계 구조를 극복하여 계층·지위·나이·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국민 의사를 평등하게 반영하여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되게 한다.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 표현이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강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했다. 헌재는 실명제로 인한 자기검열, 즉 ‘위축 효과’를 우려했다. “본인확인제(인터넷실명제)는 이름·주민등록번호 등의 노출에 따른 처벌 등 불이익을 염려해 표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을 악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대다수 시민의 정당한 의사표현을 제한하는 것으로 익명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다.” 여기에 더해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도 중요하게 거론했다. “모든 게시판 이용자의 본인확인 정보를 수집, 장기간 보관함으로써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에 놓이게한다. 수사 편의 등에 치우쳐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와 같이 취급한다.”

위헌 결정에 참여했던 전직 헌법재판관은 당시 고민이 많았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인터넷실명제의 존치 여부를 두고 왔다갔다 했다.2010년 말 경쟁업체 빵집의 식빵에 쥐를 넣은 ‘쥐 식빵’ 자작극이 인터넷을 통해 퍼졌다.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봤다. 그런데 심리를 하면서 현실을 살펴보니 인터넷실명제를 통한 범죄 억제 효과가 사실상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07년 1월 법으로 만들어져 그해 7월27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인터넷실명제는 5년 만에 그 유통기한을 마치고 폐기 처분됐다.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며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던 인터넷실명제는, 불과 5년짜리 법이었지만 정보통신 강국이라던 한국의 인터넷환경을 초토화시켰다. 익명성을 뿌리부터 제거하려던 초강력 고엽제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탄생을 남의 나라 일로만 지켜보게 만들었다.

 

인구보다 많은 유출 주민번호 7500만 명

지난 5년 동안 포털사·통신사·게임업체 등이 수집했다가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는 산술적으로 7500만 명분에 이른다. 헌재의 결정은 뒤늦은 감이 있다. 그래도 환영한다. 잘 가시오 MB, 잘 가라 인터넷실명제.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심사위원 20자평▶
권김현영 악플은 실명제로 없앨 수 없다는 걸 국정원이 인증
김보라미 익명 표현의 자유 보장, 현대사회의 필수 기본권
송소연 달리는 인터넷, 발목 잡는 본인확인, 늦었지만 전원일치!
안은정 인터넷을 통제하겠다는 욕심은 이제 그만~
양홍석 거침없이 쓰고 말하고 싶다. 고맙다, 헌법재판소!
최재홍 누가 썼는지 궁금해? 궁금하면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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