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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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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드러난 정당의 생얼

각 정당의 본질 드러내는 비례대표 순번, 새누리당은 핵전문가, 민주당은 전태일 동생 1번 공천… 통합진보당은 여성농민, 진보신당은 비정규직 노동자 1번 내세운 반면 새누리당엔 ‘MB의 그림자’ 보여
등록 2012-03-28 16:03 수정 2020-05-03 04:26

이건 어쩌면 정당들의 ‘생얼’일지도 모른다. 4·11 총선을 맞아 여야 정당이 내놓은 비례대표 후보자들의 명단은 각 당이 지향하는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반론, 재벌 개혁 논란, 자본과 노동, 친원전과 탈원전 등 다양한 담론이 바로 그 명단의 행간에서 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각 정당이 내세우는 비례대표 1번 후보자들의 면면에서 두드러진다. 새누리당은 ‘과학기술 전문가’라는 명분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 민병주 연구위원에게 1번을 배정했다. 그는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대학에서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여성과학기술총연합회 이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운영위원,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정홍원 새누리당 공천위원장은 “여성 전문가가 전무했던 원자력 분야에 뛰어들어 역경을 극복하고 후배 여성 과학인들의 귀감이 된 점을 높이 샀다”며 “원자력의 이용과 위기관리를 연구해온 재난예방 전문가”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각국은 탈핵·탈원전 노선을 이미 천명했거나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새누리당은 원전에 대한 공식적인 당론이 없다. ‘원전 마피아’의 불패 신화를 이어가는 선택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민병주 후보는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의 조카로, 재벌가의 일원이기도 하다.

재벌가의 일원 vs 전태일의 동생

» ‘원자력 전문가’라는 새누리당 민병주 후보. 새누리당 제공

» ‘원자력 전문가’라는 새누리당 민병주 후보. 새누리당 제공

탈핵·탈원전을 가장 선명하게 주장하는 정당은 지난 3월4일 창당한 녹색당이다. 3월23일 현재 당원 수 7천 명을 돌파한 녹색당은 이번 총선에서 이유진 녹색연합 녹색에너지디자인팀장, 유영훈 팔당공동대책위 위원장, 장정화 서울시당 사무처장 등 모두 3명의 후보를 냈다. 이유진 후보는 “이번 총선에서 1명의 국회의원이라도 탄생하면 전 당원이 춤을 출 것”이라며 “‘풀뿌리’로 당원을 모으고 당원이 직접 뽑은 녹색당 비례대표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이는 3%(비례대표 1번 당선 기준 득표율) 득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국 정치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녹색당 등 야 3당은 3월9일 국회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탈핵 에너지 전환을 위한 공동 약속’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도 현 정부의 ‘원자력 르네상스’를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천명한 이명박 대통령은 후쿠시마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며 “세계에서 오직 한국 정부만이 핵발전 확대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고리 1호기, 월성 1호기의 즉각 폐쇄 및 강원도 삼척과 경북 영덕 등 신규 핵발전소 부지 선정 철회를 위해 공조를 계속하기로 했다. 19대 국회에서 탈핵·탈원전을 위한 에너지전환기본법 제정에도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 ‘전태일 열사의 누이’ 민주통합당 전순옥 후보. <한겨레21> 박승화

» ‘전태일 열사의 누이’ 민주통합당 전순옥 후보. <한겨레21> 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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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들은 노동자, 농민 출신 인사들을 일제히 비례대표 1번에 배정했다. 민주통합당 전순옥 후보가 대표적인 사례다.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인 전씨는 검정고시를 치른 뒤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노동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참여성복지터 대표와 사회적 기업 ‘참 신나는 옷’ 대표를 맡고 있다. 새누리당이 박근혜 비대위원장 ‘원톱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 의미심장한 선택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전평이다. 민주당이 선대위 구성 이후 첫 기자회견을 3월23일 서울 청계천에 위치한 전태일 다리에서 개최한 것도 이런 구도를 다분히 의식한 행보다. 이 자리에서 한명숙 대표는 “전태일 열사의 영혼이 스민 곳에서 99%의 서민이 같이 살자는 목소리가 살아나고 있다”며 “민주당은 끝까지 국민 편에 서겠다.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초 새누리당 내부에서 추진됐던 ‘박근혜 1번 추대론’이 현실화됐다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했을 것이다. 새누리당으로선 박근혜 위원장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상징’과 전순옥 후보의 오빠 전태일 열사라는 ‘상징’이 양당 비례대표 1번의 대결을 통해 충돌하는 사태는 피하려 했을 것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민주당에서 7번을 배정받은 배재정 해직기자도 박근혜 위원장의 ‘약한 고리’인 정수장학회 문제를 노린 포석이다.



이유진 녹색당 후보는 “이번 총선에서 1명의 국회의원이라도 탄생하면 전 당원이 춤을 출 것”이라며 “‘풀뿌리’로 당원을 모으고 당원이 직접 뽑은 녹색당 비례대표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이는 3%(비례대표 1번 당선 기준 득표율) 득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국 정치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농민 출신인 통합진보당 윤금순 후보.

» 농민 출신인 통합진보당 윤금순 후보.

흥행 실패로 후순위 밀린 청년 대표

통합진보당은 윤금순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진보신당은 청소노동자 출신인 김순자 민주노총 울산지역연대노조 부위원장을 각각 비례대표 1번에 내세웠다. 야당들의 경우 노동자·농민 출신의 약진은 ‘비례대표 1번’이라는 상징성을 넘어선다. 민주당의 비례대표 3번을 받은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1980년대 말 박노해·백태웅씨와 함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결성을 주도한 인물이다. 1992년 구속돼 6년을 복역하며 결핵을 얻어 장을 50cm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민주당은 한정애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11번), 김기준 전 금융노조위원장(12번) 등 한국노총 출신 인사들을 비례대표 당선권에 배치했다. 한국노총 금융노조 부위원장을 지낸 문명순씨도 23번에 이름을 올렸다.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의 약진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민주당에선 남윤인순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와 김기식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각각 9번과 14번을 받았고, 최민희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이 19번으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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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당 이유진 후보. 녹색당 제공

» 녹색당 이유진 후보. 녹색당 제공

새누리당은 이상일 전 논설위원(8번), 이만우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10번), 안종범 성균관대 교수(12번), 김현숙 숭실대 교수(13번) 등 친자본·친재벌적 인사들을 내세웠다. 특히 이상일 전 논설위원은 공천 직전까지 지면을 통해 ‘박비어천가’를 부르다 곧바로 영입돼 빈축을 사고 있다.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명단에선 ‘MB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여권 내에선 각종 의혹 속에서 또다시 낙마한 이봉화 전 보건복지가족부 차관과, MB노믹스의 설계자이기도 한 이만우 고려대 교수가 ‘청와대 몫’의 후보자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청와대는 당초 이봉화 전 차관 대신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씨의 비서실장인 강현희 청와대 2부속실장을 비례대표로 낙점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 실장은 2007년 대선 때부터 김윤옥씨를 보좌해왔고, 한식 세계화 등 각종 ‘여사님 사업’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대통령 부인의 비서를 여당의 비례대표에 포함시키자는 구상에 새누리당 쪽이 난색을 표해 ‘MB맨’인 이봉화 전 차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청년들의 국회 진출은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 20대인 이준석 비대위원을 영입하고 부산 사상구에서 문재인 후보의 대항마로 손수조 후보를 공천하는 등 청년 표심 잡기에 골몰하던 새누리당은 결국 단 1명의 20대 후보도 비례대표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30대 인물은 다문화·여성 몫이기도 한 이자스민(34·15번) 물방울나눔회 사무총장, 김상민(38·22번) 대학생자원봉사단 V원정대 대표 정도에 그친다. 애초 2030 청년 비례대표로 4명을 뽑겠다고 공언한 민주당에서는 김광진(30·10번) 순천YMCA 대표이사, 장하나(34·13번) 제주도당 대변인 등 2명만이 당선권에 올랐다. 청년 비례대표 선출 과정이 흥행에 실패하자 애초의 방침을 번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은혜(28)씨와 안상현(29)씨는 각각 27, 28번을 받아 후순위로 밀려났다.



청년들의 국회 진출은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 20대인 이준석 비대위원을 영입하고 부산 사상구에서 문재인 후보의 대항마로 손수조 후보를 공천하는 등 청년 표심 잡기에 골몰하던 새누리당은 결국 단 1명의 20대 후보도 비례대표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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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피해 안정권 선택한 박근혜·한명숙

각 정당 대표들의 순번도 논란을 부른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11번, 민주당 한명숙 대표는 15번이라는 ‘어정쩡한’ 번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선권을 20번대 초반까지로 상정한 새누리당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그 중간에 배치했다. 총선 이후 대선까지의 과정에서 국회의원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편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박 위원장과 참모들의 판단이 이번 비례대표 출마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박 위원장은 지난 연말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선언했고, 2월에는 대구 불출마를 선언한 바 있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은 셈이 됐다. 민주당 한명숙 대표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이번 비례대표 명단은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도저도 아닌 한 대표의 15번 배치를 두고는 당 안팎의 뒷말이 적지 않다. 안병욱 민주당 비례대표 공심위원장에 따르면, 한 대표는 애초에 11번을 받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 위원장이 먼저 11번을 발표하자 막판에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에선 유시민 대표가 12번이라는 배수의 진을 선택해 대조를 이뤘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비례대표의 역사
정당득표율 × 54 = 비례 의석


1963년 6대 국회에서 시작된 비례대표제는 사표를 방지하고, 각계 전문가나 유능한 직능 대표들을 정치권으로 수혈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표면적인 명분과 달리, 당시에는 5·16 쿠데타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위한 제도에 불과했다는 게 정설이다.
정당득표율에 따라 당선자의 수가 달라지는 비례대표 선출 방식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16대 국회까지 비례대표는 지역구 의석 비율에 따라 결정됐다. 하지만 2001년 헌법재판소는 “1인1투표 제도를 통한 비례대표 국회의원 의석 배분 방식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17대 국회부터 현재의 1인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돼 ‘전국구’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게 됐다. 19대 국회의 비례대표 의석은 전체 300석의 18%에 해당하는 54석이다. 각 당은 정당득표율에 54를 곱한 수로 비례대표 의석을 우선 나눠갖는다. 정당득표율이 10%라면 소수점을 제외한 5석을 먼저 배정받는다는 이야기다. 잔여 의석은 소수점 이하가 큰 정당 순으로 한 자리씩 차례로 돌아간다.
과거 비례대표 1번은 총재 등 각 당을 대표하는 정치 거물들의 몫이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당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전국구 1번을 받았다. 15대 총선에서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이회창 당시 선대위의장에게 1번을 배정했고, 그는 다음 총선에서도 1번을 받았다. 당 대표나 대선 후보 등 당의 간판선수가 비례대표 후순위를 받은 첫 사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회의 시절인 15대 총선에서 당선이 불투명한 14번을 자청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13번까지만 당선돼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비례대표 후보자는 각 정당의 공천심사위원회가 직접 선정하고 순위를 정해 발표하기 때문에 당의 정체성과 지향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당의 유력 인사나 특정 계파에 가까운 인물이 우선 배정된다거나, 충분한 검증이 되지 않은 후보자가 포함되는 등 부작용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새누리당에서 쌀 직불금 부정 수령, 땅투기 의혹 등으로 논란을 빚은 이봉화 전 차관이 또다시 낙마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선 창조한국당과 친박연대가 비례대표 공천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깜짝 발탁된 후보자들을 전시성 이벤트에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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