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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과 다른 2011년

김일성 사후 조문 파동과 김정일의 죽음까지 17년, 한국 사회는 무엇이 달라졌나… 10년 교류·협력의 성과로 설 땅 잃은 냉전 이데올로기
등록 2011-12-28 10:41 수정 2020-05-03 04:26
김일성 주석 사망 다음날인 1994년 7월9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시민들이 발길을 멈춘 채 소식이 담긴 <한겨레> 호외를 읽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기자

김일성 주석 사망 다음날인 1994년 7월9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시민들이 발길을 멈춘 채 소식이 담긴 <한겨레> 호외를 읽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기자

1994년 7월8일, 해방 이후 반세기 가까이 북한을 통치해오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한국 사회는 ‘조문 파동’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한국 사회를 광기에 휘말리게 하고 탈냉전의 세계사적 흐름에서 뒤처지게 한 이 광기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그로부터 17년 동안 한국 사회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김정일 사망 이후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게 만든 힘은 무엇인가?

31분 만에 방송 중단된 김일성 다큐

김일성 사망 발표 이틀 뒤인 1994년 7월11일 민주당의 이부영 의원은 이홍구 통일원 장관(부총리)에게 조심스럽게 “조문단을 파견할 용의가 없느냐”고 물었다. “우리 국민이 양해를 한다면”이란 문구를 비롯한 4개의 전제조건을 달고 조심스럽게 한 질문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남짓 앞두고 묘향산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지금 생각해본다면 이부영 의원의 질의는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을 고려할 때 조문외교 차원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보수 언론과 보수 인사들은 마녀사냥에 가까운 공세를 퍼부었다.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김재춘 전 안기부장, ‘반공검사’ 출신 오제도 변호사 등 학계·정계·언론계·문화계 인사 300여 명은 “애도·조문 사절 운운하는 것은 반민족적인 행위”라며, 조문 사절단 파견을 제의한 일부 야당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주장했다. 또 보수 세력은 김일성 사망 직후 한국방송이 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자, 김일성을 미화하는 부분이 있다며 항의해 결국 방송이 31분 만에 중단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방송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영덕 당시 국무총리는 “조전 발송과 조문단 파견 움직임은 무분별한 행동”이라는 정부 공식 방침을 발표해, 보수 세력들의 이념공세에 발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남북 정상회담 개최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자기모순이었다. 박정희 시대나 있을 법한 백치 같은 우둔함과 폭군 같은 야만이 판치는 시대였다. 북한도 “남조선(한국) 인민들이 (김 주석) 추모행사를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라며 논란에 불길을 지폈다.

그로부터 17년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을 접했다. 한국 사회는 17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북한 주민들을 위로하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전방 지역의 성탄 트리 점등을 유보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유족에 국한하긴 했지만, 방북 조문도 허용했다. 정부의 이런 조처는, 다소 어정쩡하기는 하지만 17년 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17년 전의 우둔하고 야만스런 모습이, 정말 다수 국민의 뜻이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사검색 데이터베이스인 ‘카인즈’(KINDS)에서 김일성 사망 직후 신문 기사를 검색해봤다.

“전국 차분… 사재기 조짐 없어/ 통일전망대에 실향민 등 인파 몰려.”(1994년 7월11일, 23면)

“북방 관련 중­저가 대형주 ‘사자’ 몰려”(1994년 7월13일 13면)

기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일성 사망 발표(1994년 7월9일) 하루 뒤에 맞이한 첫 휴일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60만 명이 몰리며, 그해 최대 피서 인파를 기록했다. 서울의 시내 극장가도 인파로 크게 붐볐다. 김일성 사망 발표 사흘째에는 주가가 큰 폭으로 뛰었다. 남북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예상한 투자자들이 이른바 ‘북방 관련주’를 대거 매입했기 때문이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color="#1153A4"><font size="3">1994년 한여름을 달군 광기는 분명 국민의 뜻이 반영된 것이 아니었다. 보수 인사들과 냉전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보수적인 학자들과 보수 언론의 합작품이었다. 거기에 김영삼 정부가 편승했던 것이다. 이것이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광기의 실체다.</font></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국민 65.4%가 김정일 조의 표명에 찬성

실제로 김일성 사망 발표 다음날 실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북한에 심각한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는 의견은 전체의 29.1%에 불과했다. 53.5%의 국민은 다소 혼란스럽거나 서서히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국민 여론과 반대로,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일성 사망 장소나 날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도 많았다. 결국 1994년 한여름을 달군 광기는 분명 국민의 뜻이 반영된 것이 아니었다. 보수 인사들과 냉전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보수적인 학자들과 보수 언론의 합작품이었다. 거기에 김영삼 정부가 편승했던 것이다. 이것이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광기의 실체다. 국민을 배제한 채 한국의 보수가 증폭시킨 일그러진 1994년의 기억에서 벗어나야만, 1994년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국민 대다수는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차분했고, 지금 김정일 사망 이후에도 그때처럼 차분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국민의 힘이 성장했다는 점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에 조의를 표명하는 것을 찬성하는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의 발언이 이를 증명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지금 국민의 의식이 김일성 사망 때보다 진보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의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12월19일 내놓은 설문 결과를 보면, 김정일 사망에 대해 정부가 공식 애도를 표명하는 것에 찬성하는 의견이 49.6%였다. 반대 의견은 31.4%에 그쳤다. 이튿날인 12월20일 나온 여론조사 결과에선, 국민 65.4%가 조의 표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4년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 분위기가 ‘조의 표명’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고, 또 국민이 적극적으로 조의 표명에 찬성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가 북한 국민을 위로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라도 조의 표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힘이다. 그렇다면 1994년과 다른 그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다수 국민은 김일성 사망에도 북한이 심각한 상황에 빠질 것으로 보지는 않았고,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유지했다. 김일성 사망 한 달 전인 1994년 6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론’이 대두됐을 때 있었던 사재기도 없었다. 차분함을 유지했던 그 국민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들이 목격한 북한은 김일성 사망 이후 대다수 전문가들이 예측했던, 곧 붕괴하는 북한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본 국민이 늘어날수록 야만의 정치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이 만들어낸 냉전 이데올로기는 설 땅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전>이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전한 12월19일 오전 서울역 대기실에서 시민들이 뉴스 속보를 시청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전>이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전한 12월19일 오전 서울역 대기실에서 시민들이 뉴스 속보를 시청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17만 북한 방문객들은 무엇을 보았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인 1997년까지 북한을 방문한 인원은 분단 이후 45년 동안 고작 2980명이었다. 그러나 1998년부터 2007년까지 북한을 방문한 인원은 금강산·개성·평양 관광객(174만5906명)을 빼고도, 이보다 140배 증가한 42만7506명이었다. 북한을 방문한 국민은 북한의 실상을 구석구석 보았다. 북한을 방문한 우리 국민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경험 때문에 매우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에게 북한은 말 그대로 ‘호기심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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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북한 사람들과 만나서 남북 교류협력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북한이 꺼리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기도 했다. 때로는 북한이 출입을 금지한 구역을 몰래 방문했다가 발각돼 소동을 일으키고, 남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넘어서 북한의 정치선전물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행위는 당연히 남북한 당국과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과정이 북한의 실상을 파악하는 학습의 기회였다. 반대로 북녘 동포들도 남한의 자유분방한 방문객 때문에 남한 사회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됐다.

한편 1997년 이후 10년 동안 경의선과 동해선 육로를 통해 145만 명의 인원과 22만 대의 차량이 남북을 왕래했다. 하루 평균 1700명, 차량 360대가 방북한 셈이다. 개성공단이 열리자, 개성 남쪽에 전진 배치된 북한의 병력이 후방으로 후퇴했다. 금강산관광은, 북한의 동해안 최전방 잠수함 기지였던 고성의 장전항을 민수용 항구로 개방시켰다. 교류·협력이 만들어낸 ‘군축’이었다.

해방 이전부터 김대중 정부 출범 때까지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것은 1985년 단 한 차례, 대상자도 157명뿐이었다. 하지만 1998년부터 2007년까지 2만 명의 이산가족이 반세기 흩어져 살아온 가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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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종교인의 북한 방문은 1998년 이후 크게 증가했다. 종교인 방북이 이뤄진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방북 성사 종교인은 연평균 단 1명이었으나, 1998년부터 2007년까지는 연평균 340명의 종교인이 방북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2011년 김정일 사망 사이에는 이렇게 북한을 방문한 한국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차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중대한 변화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교류는 완전히 차단됐지만, 북한을 방문했던 국민의 기억마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국민의 경험과 인식 변화가 김정일 사망 이후 한국 사회에서 1994년과 같은 광기가 재발하는 걸 억제한 것이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color="#1153A4"><font size="3">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교류는 완전히 차단됐지만, 북한을 방문했던 국민의 기억마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 같은 국민의 경험과 인식 변화가 김정일 사망 이후 한국 사회에서 1994년과 같은 광기가 재발하는 걸 억제한 것이다.</font></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광기의 재발 막은 주체는 국민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에는 대학교에 분향소를 설치한 학생들도 있었다. 보수 세력들은 이들에 대한 공세를 펼치며 자신들의 위세를 떨쳤다. 갈등의 주체는 이들이지 국민이 아니었다. 국민은 이 틈바구니 속에 끼어 있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진행된 남북 화해·협력 정책의 결과로, 이제 국민은 더 이상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김정일 사망 이후 보수의 위세를 누르고 한국 사회의 안정을 유지시킬 힘을 가진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그 힘이 한국방송이 특별기획 3부작 를 도중에 중단하지 않고 계속 방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김창수 사단법인 통일맞이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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