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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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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달인’의 42년 집권 비법과 몰락의 코드

‘혁명의 지도자’로 시작해 ‘혁명의 재물’이 된 리비아 최고지도자 카다피…

정치체제·부족·군사·석유·서방과의 관계 등 5가지 키워드로 분석한 독재의 역사
등록 2011-03-03 17:21 수정 2020-05-03 04:26

자그마치 42년, 오랜 세월이다.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69)는 이 오랜 기간 어떻게 독재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탁월한’ 능력이다.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도 장기 집권했다지만 30년 만에 쫓겨났다. 42년간 집권한 ‘독재의 달인’, 카다피의 ‘독재 비법’은 추악하다.

» 무아마르 카다피는 검은 선글라스 안에 무서운 폭정의 눈빛을 감춰왔다. REUTERS/ ZOHRA BENSEMARA

» 무아마르 카다피는 검은 선글라스 안에 무서운 폭정의 눈빛을 감춰왔다. REUTERS/ ZOHRA BENSEMARA

1. 포장하라, 거짓 민주주의!

속임수와 우롱은 독재 달인의 최대 비법이다. 그는 ‘카다피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독특한 이상적 정치·경제 체제를 제시했다. 1977년 발표한 이른바 자마히리야(Jamahiriya), 곧 대중 직접민주주의다. 대리인이나 중간자 없이 직접 국민권력의 실행이 가능한 ‘이슬람 바탕의 대중 직접민주주의’로 포장된 자마히리야의 핵심은 대중회의와 국민위원회다. 모든 국민이 일종의 확대된 반상회 또는 지방자치회와 같은 조직에 참가하고, 위원회가 그 결과를 카다피에게까지 전달해 시행한다. 이런 정치사상은 1976~78년 3권으로 펴낸 카다피의 정치사상서 에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국민권력을 강조하고 완전평등주의, 노동임금 폐지, 토지의 제한적 사적 소유 등 이상적 정치·경제 체제를 그리고 있다. 카다피는 현 세계의 모든 정치제도는 ‘서로 대립하는 통치기구 간 권력투쟁의 소산’으로 간주한다. 의회는 ‘국민에 대한 허구적 대표기구’, 정당은 ‘새로운 독재적 통치기구’, 정당정치는 ‘민주주의 탈을 쓴 사기적 광대극’ 등으로 치부했다. 국민투표제는 찬성이나 반대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가장 억압적이고 독재적인 제도’ ‘민주주의에 대한 사기’로 비난한다.

카다피는 ‘카다피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독특한 이상적 정치·경제 체제를 제시했다. 1977년 발표한 이른바 자마히리(Jamahiriya),곧 대중 직접민주주의다. 하지만 애초 의도가 어떠했든 현실적으로는 카다피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고, 독재를 펴는 데 최적의 제도였다.

하지만 자마히리야는 애초 의도가 어떠했든 현실적으로는 카다피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고, 독재를 펴는 데 최적의 제도였다.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민의가 수렴돼 상향식으로 전해지기보다 통치자인 카다피가 지시하면 대중은 승인하는 역할에 만족하는 하향식 제도로 전락했다”며 “대의민주주주의의 폐해를 보완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체주의로 만들어 압제자의 도구로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도 “정당도 없고 의회도 없는 카다피 1인 독재체제를 대중 직접민주주의로 합리화했다”며 “권력의 견제와 균형, 자유권 등 최소 민주주의를 실현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분배정의 등 최대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으로, 카다피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고 리비아는 권위주의적 경찰국가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은 한편으로 코미디적이다. 이런 구절도 있다. “여자는 여성이고 남자는 남성이다. 산부인과 의사에 따르면 여자는 매달 월경을 하는 반면 남자는 남성이기에 생리를 하지 안고 생리통도 없다.” 리비아인들은 이런 을 대학 졸업 때까지 달달 외운다고 한다.

» 리비아 반정부 시위 현황

» 리비아 반정부 시위 현황

2. 부족, 가르고 싸움 붙여라!

분리통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 식민통치 시절 써먹던 단골 수법이다. 그 못된 버릇을 카다피가 배웠다. 1951년 독립 이전에 리비아는 3개 지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리비아에서는 도시화되고 있는 지금도 부족에 대한 충성심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 강하다. 중앙정부가 부족의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한 곳이 많다”고 설명했다.

베두인 유목민의 후손인 카다피는 해외 방문 때 베두인 전통의 천막 설치를 고집한다. 카다피는 이런 강력한 부족주의를 활용해 14개 대부족, 전체 약 500개 부족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편가르기를 하면서 나라를 통치했다. 카다피는 지지 부족에는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대신 반대 부족은 철저히 탄압했다. 물론 요직은 자기 부족인 카다파 부족이 차지했다. 미국외교협회(CFR) 로버트 대닌 선임연구원은 “부족 간의 갈등 탓에 저항세력이 하나로 뭉쳐 카다피에 맞서기 어려운 여건”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군부가 무바라크 퇴진의 열쇠를 쥐었지만, 리비아에서는 주요 부족이 카다피를 지지하느냐 여부가 관건이다.

카다피는 국민의 반서방 감정을 한껏 활용하면서 서방과 ‘맞짱 뜨는’ 지도자로 자신을 포장했다.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그는 혁명을 수출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나라를 망친 지도자였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저항하는 부족은 혹독하게 보복당했다. 1993년 10월 리비아 최대 부족인 와르팔라 부족이 자신을 제거하려 기도하자, 카다피는 와르팔라 부족의 많은 지도자를 처형했다. 와르팔라 부족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권력에서 배제됐고, 이 부족의 땅에서 석유가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혜택은 돌려주지 않았다. 카다피는 리비아 2대 도시인 동부 벵가지를 근거지로 하는 와르팔라 부족과 주와야 부족의 충성을 끌어내는 한편 서부의 트리폴리를 새 수도로 정하고 동부를 홀대했다. 동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게 이상한 게 아니다. 벵가지는 이탈리아 식민지배 당시 오마르 알무크타르가 혁명을 지휘하다가 처형된 곳으로, 저항정신이 애초 높은 곳이다. 리비아 반정부 시위는 홀대받던 동쪽의 와르팔라·주와야 부족 중심의 반정부 시위에 맞서 리비아 서쪽에 기반한 카다파 부족과 마가리하 부족이 대결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이를 두고 아랍 위성방송 는 2월23일 “카다피가 뿌린 대로 거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3. 서방, 적이자 나의 친구로!

카다피는 서방이 키운 괴물이다. 1969년 9월1일, 카다피는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신병 치료차 터키 휴양지에 간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무혈혁명에 성공했다. 리비아는 1911~43년 이탈리아 식민지를 거쳐 1951년 독립국가로 출범한 탓에, 카다피가 서방의 지지를 받던 이드리스 국왕을 쫓아내고 이탈리아 전몰군인 유해 제거, 석유 국유화, 미국 및 영국군 기지 폐쇄 등에 나서자 리비아인들은 환호했다. 카다피는 석유 국유화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을 주택과 의료 등의 복지에 투입했다.

카다피는 국민의 반서방 감정을 한껏 활용하면서 서방과 ‘맞짱 뜨는’ 지도자로 자신을 포장했다. 카다피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아랍 민족주의자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영웅으로 떠받들며 민족주의적 아랍 통일운동을 주창했다. 이른바 ‘범아프리카주의’를 내세워,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리비아·이집트·시리아를 연방국으로 만들려는 시도도 했다. 박현도 책임연구원은 “이집트 나세르의 혁명을 보고 혁명을 꿈꿨던 카다피가 이집트에서 불어온 시민혁명으로 위기에 몰리다니 아이러니다”라며 “그는 혁명을 수출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나라를 망친 지도자였다”고 지적했다.

» 지난 2월24일 리비아 반정부 시위대 중 한 명이 동부 도시 샤하트에서 빼앗은 탱크 안에 들어가 “카다피 퇴진”을 외치고 있다. REUTERS/ GORAN TOMASEVIC

» 지난 2월24일 리비아 반정부 시위대 중 한 명이 동부 도시 샤하트에서 빼앗은 탱크 안에 들어가 “카다피 퇴진”을 외치고 있다. REUTERS/ GORAN TOMASEVIC

미국은 카다피가 자신을 서방에 저항하는 지도자로 포장할 구실을 제공했다. 1986년 미국은 당시 서독의 미군 장교클럽에서 일어난 폭발사건으로 미군이 숨지자 리비아를 배후로 지목한 뒤 폭격을 감행했고, 이때 카다피의 수양딸 등 민간인 200명이 숨졌다. 카다피는 그 보복으로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 여객기 폭파사건을 일으켜 미국인 189명 등 270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카다피는 때로 서방이 내민 손을 잡았다. 2002년 대테러 분야에서 미국과 공조하기 시작한 뒤, 2003년 대량살상무기 개발 포기를 선언했고, 2004년 9월 미국은 무역제재를 해제했다. 2004년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는 “리비아가 서방과 돈독한 파트너가 되면서 전세계가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영국은 리비아에서 영국산 미사일 및 방공시스템 판매, 석유 및 천연가스 탐사권 등을 확보했다. 2007년 12월에는 베두인 텐트가 파리에 설치됐다. 리비아에 원자로, 담수화 공장, 에어버스 여객기 21대 등을 판매하는 약 100억유로어치의 거래가 성사됐다. 2008년 카다피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다고 밝히고 로커비 사건 유가족 등에게 18억달러를 보상한 뒤,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카다피가 39년째 철권통치하던 리비아를 방문해 악수했다. 그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을 내세워 리비아에 25년간 50억달러를 투자키로 약속했다. 같은 해 카다피는 검은 선글라스와 특유의 의상을 입고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아프리카연합(AU) 의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2009년 9월에는 미국을 처음 방문해 유엔총회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을 기회를 얻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난 2월22일 쿠웨이트 의회 연설에서 “지난 수십 년간 영국 등은 (중동 지역의) 안정을 위해 통제력을 가진 정권이 필요하고 개혁·개방은 지역 안정을 위협에 빠뜨린다는 이유로 우리의 이익과 가치 사이에서 선택을 해왔다”며 “우리는 때때로 이런 계산을 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밝힌다”고 말했다. 미국 등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국익을 위해서는 독재자와 손잡아온 대가는 리비아인들이 치러왔다.

4. 군대는 필요 없다, 친위 근위대를 키워라

카다피는 대령이다. 리비아에는 소장도 대장도 없다.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뒤 자기보다 높은 모든 계급을 없애고 잠재적 쿠데타 세력을 제거했다. 엘리트 계층 반대세력의 성장도 싹을 잘랐다. 은 이 때문에 “이집트는 제한적인 저항조직, 언론 자유, 집회의 자유가 있어서 무바라크 축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리비아는 카다피가 절대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대항 조직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규군은 4만~7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카다피의 카다파 부족이 주요 자리를 차지한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는 “이집트와 달리 리비아는 군대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결속력과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리비아에서 일부 군인이 시위대에 동참했음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신 카다피는 친위 군사조직을 키웠다. 혁명위원회의 지시를 따르는 혁명수비대는 5천~1만 명 규모로 알려진 최정예 부대를 양성했다. 약 12만 명 규모로 알려진 보안군과 민병대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아들과 핵심 측근이 지휘한다. 일곱째 아들 카미스의 ‘카미스 여단’도 혁명수비대 소속으로, 시위대에 대한 무력 진압에 나섰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민병대가 정규군을 통제하고 카다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고 밝혔다. 용병들도 카다피를 떠받친다. 차드, 니제르 등 아프리카 출신 용병으로 구성된 ‘이슬람 범아프리카 여단’ 소속 2500명은 카다피 친위세력과 함께 반정부 세력에 맞섰다. 서정민 교수는 “리비아인들은 자기 부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데, 카다피가 외국 용병으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부족들이 그를 용서하기 힘든 상황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카다피가 물러난 뒤 대안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집트에서는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반정부 시위 초반 구심점이 되고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 등이 대안세력으로 거론된 것과 달리, 리비아에서는 별다른 대안세력이 언급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카다피 퇴진 뒤 권력 공백 및 대혼란이 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구심점이 될 야당 세력이 없어 종족과 군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 자유주의자 등의 갈등 과정에서 정치 안정에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5. 휘둘러라, 검은 금맥의 힘이여~

카다피는 석유 판매 수입을 독재의 돈줄로 활용했다. 리비아는 1961년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해, 현재 석유는 리비아 수출의 95%, 국가 수입의 75% 차지한다. 리비아는 세계 원유 공급량의 2%인 하루 169만 배럴(세계 17위)을 생산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 세계에서 12번 째로 큰 석유 수출국이다. 매장량은 443억 배럴(세계 9위)로 추정된다. 풍부한 석유 판매 대금에 기반한 카다피의 자본력은 반대세력을 매수하는 자금줄이었다. 카다피는 석유 수입으로 아프리카 등의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며 대외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석유 덕에 리비아는 튀니지나 이집트보다 잘살 수 있었고 독재에 대한 불만을 어느 정도 억누르게 됐다. 리비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4400달러다.
하지만 국민에게 돌아간 석유 판매의 혜택이 알량한 떡고물이라면, 카다피 일가에는 먹음직스런 떡이 돌아갔다. 리비아 전체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가 여전히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 대신 석유를 판매한 풍부한 자금은 권력을 지키는 용병을 부리는 데 사용했다.


“리비아인들은 자기 부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데, 카다피가 외국 용병으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부족들이 그를 용서하기 힘든 상황으로 만들었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


또 석유는 카다피가 유럽과 협상을 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매일 이탈리아는 37만6천 배럴, 프랑스는 20만5천 배럴, 독일은 14만4천 배럴을 수입하는 등 2010년 리비아가 생산한 석유의 85%를 유럽이 수입한다. 미국이 2004년 금수조처를 해제한 뒤 100개가 넘는 기업이 리비아 석유 개발에 뛰어들었다. 양적으로는 세계 원유 생산량의 2%밖에 안 되지만, 리비아산 석유는 고품질이어서 대체가 쉽지 않아 위력이 그만큼 컸다.
이제 카다피는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자, 석유를 서방을 위협하는 도구로 쓰고 있다. 그는 석유 생산시설 파괴 등을 위협하며 외국에 간섭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한편 동부 부족들은 석유 생산시설 등을 장악한 뒤 통제권을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 내전의 불씨가 될 전망이다. 미국 정보분석업체 ‘스트래트포’(STRATFOR)는 “카다피가 어떻게 되든 이번 사태가 사실상 동·서 2개의 정치조직, 석유 생산시설의 양분 등 오래된 충돌의 씨앗을 다시 뿌렸다”고 분석했다.

어쩌면 카다피 독재의 최대 비법은 전투기로 반정부 시위대를 폭격하는 광기와 폭정이다. 27살에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혁명의 지도자, 내가 혁명이다”라고 주장해왔다. 독재의 달인 카다피는 지금 혁명의 지도자가 아니라 그 재물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리비아 혼란 속 알카에다 득세 가능성?
유혈 진압이 오히려 극단주의 토양 키운다

리비아의 민주화 시위 와중에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주목받고 있다. 카다피는 2월24일 리비아 국영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전화 연설에서 “시위대가 알카에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반정부 시위의 배후로 알카에다를 지목하고, “(알카에다 지도자) 빈라덴에게 휘둘리지 말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무스타파 압델 잘릴 전 리비아 법무장관은 “모두 거짓말”이라며 “알카에다와 같은 어떤 테러조직도 반정부 시위대 안에 없다”고 반박했다.
알카에다가 반정부 시위를 조종한다는 주장은 위기를 모면하려는 카다피의 노림수지만, 리비아의 혼란이 알카에다 등 급진 테러조직이 파고드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존재한다. ‘혼란이 있는 곳에 극단주의 테러조직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제거된 뒤 혼란 속에서 급진 이슬람 테러조직이 세력을 확대했다. 이 때문에 이라크에서 1만 명이 알카에다의 자살폭탄 테러에 희생됐다고 이 2월25일 보도했다. 알제리에서도 1992년 쿠데타가 일어난 혼란을 틈타 이슬람 테러조직 ‘무장 이슬람그룹’(GIA)이 결성됐다. 가난한 리비아 동부 지역 출신들도 이라크 알카에다에 대거 흘러들었다. 리비아는 부족 간 갈등이 심하고 시민사회가 취약한데다 지방에서 연방정부의 장악력이 떨어져 테러조직이 잠입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하지만 리비아의 여건이 알카에다가 침투하기에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분석된다. 리비아 정부 전복을 목표로 했던 ‘리비아 이슬람 전투그룹’(LIFG)이 2009년 활동을 접고 알카에다와 고리를 끊으면서, 알카에다가 침투할 연계 조직이 리비아에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극단주의대응 싱크탱크인 퀼리엄재단 선임분석가 노먼 베노트먼은 “시위대 누구도 ‘이슬람 국가’ 건설을 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자극하는) 알카에다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며 “자유와 정치적 기회, 민주주의가 리비아에서 극단주의의 위협을 줄여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리비아 반정부 시위가 유혈 진압되면 오히려 불만이 커진 세력이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조직에 가담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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