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시간과 뭇사람들의 시간이 달리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임기가 정해진 대통령의 시간은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87년 헌법 개정으로 5년 단임제가 정착된 이후 역대 대통령은 어김없이 집권 4년차 증후군을 앓아왔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아프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생로병사와 같은 자연현상이다. 아무리 “일하는 사람에겐 레임덕이 없다”고 강변해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무리한 국정 운영, 여권 내부의 반란, 가족·측근 등이 연루된 비리, 선거 참패 등이 대표적 원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대통령에게는 4년차가 자신감이 충만한 시기다.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자만이 고개를 든다. 공동운명체인 참모와 집권여당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집권 초기부터 ‘나도 한때~’ 시리즈를 유행시키면서 세상 모든 일을 경험한 듯이 말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자신감 면에서 이전 대통령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차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면 이명박 정권의 미래가 보인다. 피해갈 수는 없지만, 미리 알고 관리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아들과 친척이 연루된 비리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차인 1991년 2월 한 언론의 특종보도로 수서택지 분양 특혜 비리의 일단이 드러났다. 정치권·경제계·관계 인사들이 유착한 대형 스캔들이었다. 서울시가 무주택 서민들에게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기로 한 서울 강남 수서택지개발지구 토지 3만5천여 평을 주택조합에 특별 공급한 사건이었다. 검찰 조사 결과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수서지구택지조합 임원과 짜고 조합이 국회에 택지 공급에 대한 청원을 내도록 한 뒤, 청와대·국회·정부 쪽 인사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장병조 청와대 비서관을 통해 서울시와 건설부 등 유관기관에 압력을 가해 택지를 공급한 사건이었다.
당시엔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4년 뒤 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를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청와대 안가에서 정태수 회장에게서 청탁과 함께 네 차례에 걸쳐 150억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이듬해 노 전 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의 심각한 권력투쟁으로 번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문제도 이 시기에 싹텄다. 이동통신 수요의 폭증으로 경쟁체제를 도입하면서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가 노 전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선경(현 SK)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차인 1996년엔 더 심각했다. 노태우 정부 때 수서 비리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한보건설과 당진제철소 등에 대한 정부 지원과 대출 청탁, 그리고 국정감사 무마 청탁 명목으로 정계·관계·재계 등에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 이른바 ‘한보 게이트’였다. 김영삼 정부 초반부터 각종 인사와 이권 개입으로 ‘소통령’으로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한보 특혜대출 사건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받았고 결국 이듬해인 1997년 5월 금품수수·세금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첫 문민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초반 하나회 척결,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구속 등으로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갔고 2006년 4월 15대 총선에서 과반수에 가까운 139석을 얻었으나, 그해 12월 사용자 쪽에 기운 노동법과 안기부의 수사권 부활이 핵심인 안기부법 개정안을 날치기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은 탈당한 노무현 전 대통령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차인 2001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0년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의 훈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 등 벤처기업의 성장을 둘러싼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인 ‘3대 게이트’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엔 삼남 홍걸씨와 차남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이권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4년차인 올해도 역대 대통령의 집권 4년차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직 경찰 수뇌부와 청와대 감찰팀장이 수사 대상에 오르고 정·관계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설현장 식당(이른바 함바집) 운영권 로비 의혹 사건에서는 게이트(권력형 비리)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민주당에서는 본격적인 차기 대선을 앞두고 위기감이 퍼지면서 정동영·천정배·신기남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정풍운동이 일었다. 그 여파로 11월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민주당은 집권당 프리미엄을 상실했지만, 동시에 대통령이 당을 좌지우지하는 통로였던 총재직을 폐지하고 상향식 공천인 국민경선제 도입 등으로 정당 민주화에서 일부 진전을 이룬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집권 4년차인 2006년은 가시밭길이었다. 2006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동산 광풍’이 불어닥쳤다. 서울 아파트값은 19.7%(국민은행 집계)나 급등했고 이른바 ‘버블세븐’ 지역 가운데는 50% 넘게 폭등한 곳도 있었다. 주택담보대출 제한과 주택 공급 확대를 뼈대로 한 ‘11·15 부동산 시장 안정화 대책’이 나온 뒤 부동산 시장은 겨우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민심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핵심 지지층 이탈의 원인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세계화 시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고, 진보 진영은 졸속 추진과 농민 등의 피해를 우려하며 거리시위로 맞섰다. 특히 스크린쿼터 축소와 쇠고기 수입 규제 완화 등 이른바 ‘4대 선결조건’ 의 양보가 미국과 협상 개시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또 다른 논란을 낳기도 했다.
정당 개혁을 표방하며 집권한 노 전 대통령은 바람직한 당청 관계를 모색하면서 과거와는 단절했으나 새 질서를 만들지는 못했다. 임기 내내 불편했던 여당(민주당 및 열린우리당)과의 관계는 집권 4년차에 극에 달했다.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추진 사태 이후 시민들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절반이 넘는 152석을 열린우리당에 몰아줬으나 구심이 없던 집권여당은 지리멸렬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여권 내부에서 2007년 대선을 겨냥한 차별화 움직임이 일자 공개적으로 여권의 정계개편 논의에 반대 뜻을 피력하면서 결별 수순에 들어간다. 이듬해 2월 ‘당적 정리’라는 표현을 쓰면서 탈당한다.
길고 고통스러운 한해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4년차인 올해도 역대 대통령의 집권 4년차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폭력사태 끝에 예산안과 민감한 쟁점 현안들을 날치기했다. 그동안 충실하게 거수기 노릇을 하던 한나라당이 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전직 경찰 수뇌부와 청와대 감찰팀장이 수사 대상에 오르고 정·관계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설현장 식당(이른바 함바집) 운영권 로비 의혹 사건에서는 게이트(권력형 비리)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이 대통령에게 올해는 뭇사람들에 비해 길고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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