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 삼성전자 ‘LCD사업부’ 기흥공장에서 일한 뒤 2005년 ‘소뇌부 뇌종양’ 판결을 받은 한혜경씨는 병든 몸으로 싸움을 시작했다(왼쪽)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노조가 없어 서러운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삼성전기 이은의 대리도 2005년 부서장의 성희롱 사실을 회사에 알렸다가 5년째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다. ‘무노조 삼성’에는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 없다. 삼성 노동자는 회사 쪽으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갈 곳이 없어 헤맨다. 작업 환경이 나빠 병에 걸린 것 같아도, 성희롱을 고발했다가 인사 보복을 당해도 회사 내부에서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홀로 투쟁한다. 그들의 슬픈 기록은 현재진행형이다.
뇌종양으로 1급 장애 얻은 한혜경씨지난 4월12일 삼성전자 LCD사업부 기흥공장 노동자였던 한혜경(32)씨가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질병 불승인을 취소해달라”며 심사청구를 냈다. 뇌종양을 앓는 한씨가 낸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요양급여 신청을 불승인한 데 대해 재심을 청구한 것이다.
한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5년 삼성전자 LCD사업부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홀로 자식을 키워온 가난한 어머니에게 월급을 가져다 줄 생각에 기쁘기만 했다.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일하며 주로 납 성분의 솔더크림과 이소프로필알코올, 아세톤 등 각종 유기용제를 취급했다. 어느 순간부터 월경이 멈췄다. 심한 여드름, 홍반 등 피부에도 이상이 생겼다. 무월경 증상의 여직원이 많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누구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된 한씨는 2001년 7월 퇴사했다.
퇴사 뒤 동네 마트에서 일했다. 이유 없는 감기 증상이 계속됐다. 갈수록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졌다. 2005년, 결국 쓰러졌다. 그제야 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받았다. 병명은 ‘소뇌부 뇌종양’이었다. 의사는 “뇌종양 깊이로 보아 7~8년 전에 발병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뇌종양 수술 이후 한씨는 보행장애 1급, 시력장애 1급, 언어장애 1급의 장애인이 됐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하늘만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2008년에야 하늘만 원망하고 있을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 언론 보도를 통해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씨와 한씨의 어머니는 그길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이란 단체를 찾았다. 비로소 한씨의 병이 ‘업무상 질병’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2009년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한씨의 어머니는 “혜경이는 내가 걱정할까봐 몸이 아픈 사실을 숨긴 착한 딸”이라며 “회사에도, 회사 동료에게도 뭐 하나 물어보지 못하고 홀로 병들어간 딸을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가 한씨에게 ‘업무상 질병 불승인’ 통보를 한 이유는 하나다. “한혜경씨의 발병 원인이 작업 환경과 관련성이 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근로자가 질병의 업무 기인성을 입증한 때에만 업무상 질병을 인정하고 있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은 노조도 없고 노동자도 회사 쪽의 눈치를 보며 증언을 꺼리는 분위기여서 산재 피해를 입은 근로자를 위해 모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며 “이 때문에 삼성 노동자들이 업무상 질병 인정을 받기 힘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조가 있는 경우는 다르다. 지난 2007년 10월,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작업중지권’을 발동했다. 20년 넘게 도장일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쓰러져 사망한 다음날 입사 1년밖에 되지 않은 직원이 현장에서 추락사한 까닭이다. 작업중지권은 산재 발생의 급박한 위험이 있거나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근로자가 즉시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권리다. 노사는 곧바로 재발방지안전대책회의를 열었고 전 생산·지원 현장작업자에 대한 특별안전교육과 안전점검을 실시했다. 두 노동자가 산재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노사가 협조하는 모습도 보였다.
‘평시’에도 다르다. 전남 여수의 삼남석유화학 공장은 매달 4일 노사 합동 안전점검을 한다. 아침에는 노사 대표가 함께 안전 홍보활동을 펼치고 오전에는 함께 현장 점검을 나간다. 보고서를 작성해 각 부서에 통보한다. 이 회사는 2000년부터 7년간 무재해를 기록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기념패를 받았다. 이후 현장에서 발목을 삐끗한 노동자가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10년 가까이 무재해를 기록하고 있다. 삼남석유화학 노조의 강달주 산업안전보건환경부장은 “노사가 함께 작업 환경의 안전점검을 위해 나서면 작은 곳까지 노동자의 입장에서 살필 수 있어 확실히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삼성의 경우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출신 노동자 9명이 백혈병 등 조혈계암에 걸려 숨졌고 14명이 투병 중에 있다. LCD사업부 출신으로는 한씨가 첫 산재 투쟁 사례다.
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외롭다. 한씨에겐 경제적 어려움까지 덮쳤다. 지난해 보험금을 탔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잃은 한씨는 재활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머니와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어렵고 외로운 싸움의 출발점에 선 한씨의 몸은 점점 더 말라가고 있다.
성희롱에 인사보복까지 당한 이은의씨“노조가 없어 서러운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삼성전기 이은의(36) 대리는 지난 5년간 홀로 싸워왔다. 2005년 6월 박아무개 부서장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사팀에 알릴 때만 해도 싸움이 이렇게 길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제기 뒤, 부서장은 자회사 임원으로 ‘영전’했고 이씨는 대기발령 상태로 7개월을 보냈다. 회사가 업무를 주지 않는 일이 반복되자 이씨는 깨달았다. “노조는커녕 여직원회조차 없는 회사에서 애초에 내 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부서장은 “잘 만지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함께 근무한 1년여 동안 그는 이씨의 옆을 지나가며 머리, 옆구리 등을 만지곤 했다. 매번 “이러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2005년 6월, 함께 간 동유럽 출장에서 부서장이 이씨의 엉덩이를 치며 성희롱을 했다. 이씨는 인사팀을 찾아갔다. 인사팀의 조사 결과는 “부서장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한다”였다. 대기발령 상태가 지속되자 이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2008년 인권위는 삼성전기 대표이사에게 성희롱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할 것을 권고했다. 회사는 인권위의 권고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씨도 부서장과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싸움이 커지자 “문제제기를 하면 도와주겠다”던 동료들도 증언을 기피했다. 회사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이씨를 보며 “선배를 응원하지만 선배처럼 살 수는 없다”고 말하는 후배도 있었다. 성희롱 문제제기를 끝으로 이씨의 승진도 멈췄다. 이씨는 8년째 대리다.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2007년 이후로 그는 늘 인사평가에서 ‘C-’를 받았다. 부서에서는 ‘왕따’다. 누구도 그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말하지 않는다. 동료들은 문자나 전자우편으로 “미안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날도 이씨는 홀로 점심을 먹는다.
노조를 만들어볼 생각도 해봤다. 입사 첫해인 1998년 당시 잠시 근무하던 삼성자동차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조 만드는 법을 문의하러 노동청에 갔다가 부모님 집에까지 임원이 찾아온 일이 생각났다. “나 하나 괴롭고 힘든 것은 괜찮은데 다른 동료들까지 힘들게 할까봐 무서워서” 포기했다. 대신 지난해 노사협의회에 근로자위원으로 입후보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안 회사는 후보 등록 기간 사흘간 이씨를 지방으로 출장 보냈다. 지난 3월에는 회사 쪽이 이씨가 근무 시간에 빵을 먹고 신문을 읽는 등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며 경위서를 써내라고 했다. 징계를 받으면 이씨는 2년간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에 입후보할 수 없게 된다. 이씨는 “현재의 노사협의회는 그저 인사팀의 하부조직 정도”라며 “삼성은 늘 노조 없이도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해준다고 하지만 내게 일어난 일을 보면 그 말이 얼마나 허상인지 알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4월15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민사1부(재판장 황현찬)는 “성희롱 가해자인 박아무개는 200만원, 삼성전기는 3천만원을 이은의씨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성희롱 사실과 대기발령 등의 인사 불이익이 인정된 결과다. 5년 만의 결실이지만 이씨는 항소해 더 싸워나갈 생각이다. 회사가 인사 보복으로 노동자를 어떻게 탄압했는지 더 상세히 입증할 계획이다. 이씨는 “한때 죽음도 생각할 만큼 힘들었지만 이제는 삼성 안의 불의와 맞서 싸우는 힘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를 홀로 내몬 삼성 덕분에 어느새 ‘투사’가 됐다고 했다.
“노사협의회? 다 윗선이 추천한다”2003년부터 민주노총 경기본부에서 노동자 상담 업무를 해온 이종란 노무사는 “노조가 없는 영세 사업장 노동자보다 대기업 삼성의 노동자가 더 많이 찾아왔다”며 “이는 무노조 삼성이 얼마나 노동자를 핍박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정리해고의 위기에 처한 노동자부터 노동착취에 시달린다는 에버랜드 무용수들까지 그에게 찾아와 상담을 했다. 그들은 모두 “도움받을 곳이 없다”고 했다.
지난 4월15일 삼성전자는 기흥공장 반도체 생산라인을 언론에 공개하는 ‘반도체 제조공정 설명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조수인 반도체사업부 메모리담당 사장은 “노조가 없다고 회사가 일방적으로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며 “회사 내부에 노사협의회가 구성돼 있어 불편한 일은 조언받고 개선하는 커뮤니케이션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 백혈병 사망 노동자의 부인이자 그 역시 11년간 기흥공장 노동자였던 정애정씨는 “노사협의회 위원은 다 윗선에서 추천할 뿐 현장 사람들이 추천한 적이 없다”며 “대부분 현장 경험이 5~7년 정도 되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원이 추천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있던 기흥공장 5라인에는 무월경자가 많았지만 누구도 노사협의회에 말할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삼성은 반도체 공장의 두 라인을 공개했다. 조혈계암에 걸린 노동자들이 일했던 곳은 대부분 노후한 1~3라인이지만 회사 쪽은 “해당 라인은 폐쇄됐다”며 5라인과 S라인으로 기자들을 안내했다. 1993년에 만들어진 5라인은 최근 기계 업그레이드를 통해 최신식 시설로 탈바꿈한 것으로 알려졌다. S라인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전자동 라인이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등은 “현장이 바뀐 모습을 알아차리려면 5라인에서 11년간 일해온 정애정씨가 참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삼성 쪽은 허락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견학을 하는 동안 삼성 홍보실 직원이 아닌 현장 노동자와는 한마디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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