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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자이저의 영리한 전략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이 꼬리 내린 사이 끈질긴 싸움 하고 있는 YTN 노조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등록 2008-10-02 11:59 수정 2020-05-03 04:25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전쟁에 이겨서 그 공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지난 9월12일 노종면 YTN 노조위원장은 구본홍 사장에게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를 들려주고 이 시를 사장실 앞에 붙였다. 고구려 영양왕 23년(612), 수나라 대군에 맞서 싸우던 을지문덕 장군이 적장인 우중문에게 보낸 시다. 을지문덕 장군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적을 깊숙이 유인하는 전략을 펴 결국 살수에서 수나라 군대를 몰살시켰다. 결국 YTN 노조는 1400여 년 전 을지문덕 장군이 우중문을 조롱한 방식을 빌려와 구본홍 사장에게 점잖게 사퇴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9월17일 한국방송 이병순 사장이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 소속 직원 47명을 포함한 97명에 대한 무더기 인사를 한밤중에 단행했다. 9월23일 이에 반발하는 의미로 한국방송 전체 PD 총회가 열렸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9월17일 한국방송 이병순 사장이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 소속 직원 47명을 포함한 97명에 대한 무더기 인사를 한밤중에 단행했다. 9월23일 이에 반발하는 의미로 한국방송 전체 PD 총회가 열렸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한국방송 ‘심야 보복 인사’ 피바람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로 이른바 ‘방송 4사’ 가운데 민영방송인 SBS를 빼고 한국방송, 문화방송, YTN 세 방송사가 시끌시끌하다. 방송사를 ‘접수’하려는 정권과 공영방송을 지키려는 방송인들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고봉순’(한국방송을 일컫는 누리꾼들의 별칭)과 ‘마봉춘’(문화방송 〃)보다 열다섯 살밖에 안 된 막내 ‘윤택남’(YTN 〃)의 투쟁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방송은 투쟁의 중심에 서야 할 노조가 일찌감치 ‘반정연주’를 기치로 정권 쪽에 줄 서면서 수세 국면을 맞고 있고, 문화방송도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이 〈PD수첩〉 사과방송을 기점으로 확실하게 꼬리를 내렸다. 반면에 YTN에서는 노조 조합원들이 구본홍 사장 출근저지 투쟁을 70일 넘게 이어가면서 ‘희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세 방송사 가운데 우선 한국방송 상황을 보면, 지난 8월 정연주 전 사장을 ‘제거’하고 이병순 사장 체제가 출범한 뒤 피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9월17일 밤 10시에 단행된 이른바 ‘심야 표적·보복 인사’를 통해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 소속 사원 47명이 무더기로 한직이나 지방으로 전보 조처됐다. 보복 인사에 이어 오는 10월15일로 예정된 프로그램 개편을 통해 ‘정연주 지우기’를 진행하고 있다. 은 폐지, 는 성격을 바꿔 평일 심야 시간으로 이동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부당 인사와 일방적인 프로그램 개편에 항의해 기자와 PD들이 팻말농성 등을 벌이고 있지만 노조가 팔짱만 낀 채 사실상 현 경영진 쪽에 선 상태여서 투쟁은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PD수첩〉 사태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문화방송도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노조는 사과방송이라는 ‘백기투항’을 주도한 김세영 부사장과 김종국 기획조정실장의 퇴진운동을 벌이고 〈PD수첩〉 제작진도 한 달 넘게 농성 중이지만, 엄기영 사장은 꿈쩍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시사교양국 PD들이 최근 프로그램에 대한 ‘시사’(프로그램을 보면서 최종 의견을 조율하는 것) 거부를 결의하는 등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사장은 70일 넘도록 회사 주변만 맴돌아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월29일 구본홍씨 사장 후보 선출로 촉발된 YTN 사태의 장기화는 처음엔 언론계 안팎에서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구본홍씨는 이명박 정부의 방송사 ‘낙하산 1호’다. 따라서 초기에 언론계에선 “YTN이 언론자유의 시험대”라며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노조에 견주면 수적으로 왜소하고 유별난 전통을 세운 것도 아닌 YTN 노조가 이처럼 놀랍도록 잘 버틸 것이라곤 예견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지난 7월14일 구본홍씨를 사장으로 선출하기 위한 주주총회를 저지할 때는 전체 노조 조합원 400명 중 200~300명이 참여했다. 당시 노조 관계자는 “지방의 지국 조합원과 본사의 방송 제작 필수 요원을 제외한 나머지 노조원들은 모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뒤 구본홍 사장은 70일이 넘도록 사장실에 들어가지 못한 채 회사 주변만 맴맴 돌고 있다.

YTN 노조는 특히 중간에 노조위원장이 두 번이나 교체되는 진통을 겪으면서도 투쟁의 동력을 잃지 않고 있다. 한 조합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과거 동아투위나 조선투위처럼 지사형 투사들이 아니다. 그랬다면 벌써 지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당당하게 일하기 위한 ‘일상 투쟁’을 지속할 뿐이다.”

9월24일 〈PD수첩〉 제작진이 김보슬, 이춘근 PD의 검찰 출석 요구에 맞서 한 달째 여의도 문화방송 로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9월24일 〈PD수첩〉 제작진이 김보슬, 이춘근 PD의 검찰 출석 요구에 맞서 한 달째 여의도 문화방송 로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YTN 노조의 투쟁 방식은 영리하다. 사장 출근저지 투쟁은 조합원들이 피로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를 편성해 번갈아 참여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보복 인사에 대해선 ‘불복종 투쟁’으로 맞섰다. 또 생방송 도중 뉴스룸 뒤에서 팻말시위를 벌여 그 내용이 전파를 타게 하는 ‘깜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감정을 절제하면서 비폭력 투쟁을 진행해 여간해선 공권력 투입의 빌미도 주지 않고 있다. 처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유쾌한 투쟁을 진행해나가는 YTN 노조의 이같은 행동 방식에 대해 어떤 이는 ‘21세기형 투쟁의 전형’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YTN에 대한 현 정부의 ‘집착’도 만만치 않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은 지난 8월29일 출입기자 정례간담회에서 YTN 공기업 주식 매각을 언급했다. 이 발언은 듣기에 따라서는 ‘구본홍 밀어주기’로 해석됐다. 신 차관은 “YTN의 공기업 주식이 58.9%인데, 과거 외환위기 사태로 YTN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을 때 공기업들이 구제해준 것”이라며 “이제 회사도 정상화됐고 주가도 괜찮아졌으니 공기업들은 적절한 시점에서 빠져나가는 게 맞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너희들이 누구 때문에 먹고살았는데 까부냐’는 투다. YTN 지분은 지난해 말 현재 한전KDN 21.43%, KT&G 19.95%, 한국마사회 9.52%, 우리은행 7.60% 등 공기업 성격의 4대 주주가 전체의 58.5%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 차관의 이런 발언은 민영화가 됐을 경우 가장 먼저 고용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기술직들을 되레 노조 중심으로 더욱 단결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냈다는 분석도 있다.

또 최근에는 박선규 청와대 언론2비서관이 “청와대는 구씨를 사퇴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했다는 우장균 YTN 청와대 출입기자의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신재민 차관의 ‘구본홍 밀어주기’

이제 YTN에서는 구본홍씨 퇴진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노조와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구씨 사이의 막바지 힘겨루기가 진행 중이다. 노조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희망도 싹트고 있다. 하지만 냉혹한 권력의 논리로 무장한 정권도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노조의 높은 투쟁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과연 이명박호 낙하산이 목적지에 착륙할 수 있을지, 아니면 YTN 바깥에 불시착할지 열다섯 살 YTN을 바라보는 국민의 관심이 뜨겁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여론미디어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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