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비료값 더 오르면 쇠스랑 들고 서울 갈 판”

등록 2008-08-01 00:00 수정 2020-05-03 04:25

1년 새 두 배 이상 뛴 사료값과 비료값, ‘악’ 소리가 난다… 속아왔던 농민들은 더 이상 정부를 믿지 못하네

▣ 부여=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 남형석 인턴기자 justicia82@paran.com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영상= 박수진 한겨레 취재영상팀 PD

희망이 사라진 들녘, 그곳에도 벼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밭에 줄지어 선 고추는 수줍은 듯 빨간 얼굴을 조금씩 드러내고 하얀 참깨꽃은 다가올 가을걷이의 풍요로움을 예고하는 듯 활짝 웃었다. 집집마다 심은 옥수수는 노란 수염의 끝이 거뭇거뭇해져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정부선 우째 농촌 얘기가 한마디도 없댜”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구교4리의 옛 이름은 황새울. 예부터 봄이면 황새들이 많이 찾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평화와 고고함을 상징하던 황새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는다. 2년 전 농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떠난 경기 평택 대추리의 너른 들도 같은 이름을 가졌더랬다. 황새 없는 황새울은 젊음과 번영을 상실한 우리네 농촌의 상징이 돼가는 것일까. 대신 이 마을을 찾아온 건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 ‘갈매기’였다.

‘웨∼엥.’ 지난 7월21일 오후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인근 논두렁에서 예초기가 매섭게 돌아가며 발목을 휘감는 풀들을 깎아냈다. “농약 치는데 뱀 나올까벼 풀 깎어유.” 햇볕에 잔뜩 그을린 얼굴의 김준성(55)씨가 예초기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잠시 멈추고 구름 사이로 옅은 햇살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김씨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곤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농촌 사람 이제 다 죽었슈. 이명박 대통령이 다 잡아먹으려고 하나벼. 우째 농촌 얘기가 한마디도 없댜.” 그는 불만이 많은 듯했다.

이 마을이 고향인 김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전북 군산으로 일을 찾아 나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사업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아는 사람 소개로 귀금속 세공 일을 배웠는데, 당시엔 순금으로 줄을 만드는 기계가 등장하기 전이라 벌이가 꽤 좋았다고 한다. 시골엔 남의 집 머슴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제일 힘 잘 쓰고 부지런한 머슴이 1년에 쌀 열 가마니를 새경으로 받던 때, 김씨는 한 달 월급으로만 쌀 세 가마니 값을 챙겼다. 김씨 아버지가 “우리 큰아들은 임천면 면장보다 돈 더 잘 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농사지으면 더 벌 것 같아서” 그때 번 돈을 모아 30년 전 구교4리로 돌아왔다. 처음엔 농사짓는 맛이 제법 쏠쏠했다. 논 10마지기(2천여 평·6600㎡)만 지어도 저축하고 살았다. 은행 예금 금리가 10∼20%를 오르내리던 때였다. “그전엔 농사지으면 돈이 괜찮았어유.” 김씨가 씁쓸한 웃음 속에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그러나 곡물값은 치솟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고 늘 뒤처졌다. 우루과이라운드니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니 해서 농촌에 대한 정부의 보조가 갈수록 줄어들더니 급기야 2005년엔 정부의 벼 수매 제도마저 폐지됐다. 쌀값은 시장 논리에 그대로 노출됐다.

지난해, 노가다까지 해서 순수익 3천만원

올해 들어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야말로 ‘악’ 소리가 난다. 농사의 필수품인 비료값이 1년 만에 100% 이상 뛰었다. 지난해 6월만 해도 9150원에 20kg짜리 한 포대를 살 수 있던 요소비료의 값은 지난해 12월 1만2400원으로 훌쩍 뛰더니 올해 6월19일엔 2만700원으로 폭발했다. 복합비료도 1년 동안 9350원짜리가 2만2천원으로 올랐다. 이 두 가지가 농민들이 가장 많이 쓰는 비료다.

기름값 폭등에 트랙터 빌려 쓰는 값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한 마지기 일하는 데 3만5천원이 들었는데, 올해는 4만원을 달라고 한다. 김씨가 경작하는 논만 50마지기(1만 평·3만3천㎡)이니, 전체 논에 한 번 쓰는 데만 25만원을 더 줘야 하는 셈이다. 모내기할 때 쓰는 이앙기도 지난해보다 한 마지기당 5천원씩 사용료를 더 내야 했다. 김씨는 “농약값도 20% 이상 올랐다”며 “얼마 전엔 싼 농약을 찾아 전북 부안까지 가 50만원어치를 샀다”고 했다. 여기에 경운기삯까지 더하면, 논 한 마지기에 1년 기계값으로만 10만5천원가량이 들어갔다. “예전엔 쌀 한 가마니 값이면 됐는데 지금은 안 돼유. 이런 식으로 가다간 시골이 얼마 못 갈 것 같어유.”

이 마을에서 가장 크게 논농사를 짓는다는 그의 말이다. “요즘 쌀 한 가마에 16만원 간다고 그래유. 여기서 (쌀값이) 조금만 더 내려가면 진짜 농사 못 지어유. 내년엔 비료값이 4만원꺼정 올라간다는디, 이대로 가면 정말 쇠스랑 들고 (서울로) 올라갈 수밖에 없슈. 우리 같은 사람은 (농사를 접고) 도시로 갈 수도 없잖아유. 천상 죽도록까지 (농사를)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디…. 차라리 논산이나 부여로 노가다 나가는 게 낫지유.”

실제로 그는 연중 가장 바쁜 농번기를 뺀 8달가량은 이틀에 한 번꼴로 공사장으로 막일을 하러 간다. 특별한 기술이 없으니 일당 7만원을 받는데, 소개비 7천원을 빼고 오가는 기름값까지 제외하고 나면 하루에 5만원가량이 남는다. 그렇게 돈을 벌어 1년 동안 농사일을 위해 필요한 비료값, 기름값, 농약값 등 1500만원에 이르는 운영비를 충당하고 나면, 벼를 팔아 나오는 3천만원가량을 순수익으로 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계산법이다. 물론 지금처럼 운영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전의 셈이다.

그래서 김씨는 다랑논을 비롯해 2천여 평의 논은 그냥 묵힌다. 기계를 투입하기가 힘들어 일꾼들 써봐야 본전 챙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 논엔 지금 어른 무릎 높이의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숙소인 육각정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 이곳 저곳에 폐가가 눈에 띄었다. 폐가는 피폐해지는 농촌의 상징이다. 이 마을에선 3년 전 각종 빚을 갚을 여력이 안되자 ㄱ씨와 ㅇ씨 일가족이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진 바 있다. 올 봄엔 부인이 집을 나간데다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친 60대 중반의 박아무개씨가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끔찍한 일도 겪었다.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려고 이전 비료값에서 오른 인상 차액 가운데 정부와 농협이 30%씩, 업체가 10% 등 모두 70%를 보조하겠다고 밝혔으나 말의 씨알이 먹히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의 이춘식(61) 이장은 “그걸 올해 말에 주겠다는 것인데, 확실하게 농민들 통장에 그 돈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씨의 논리는 이렇다. 정부가 몇 해 전 쌀값이 떨어지면 이를 보전해주겠다며 농민들에게 보험을 들라고 해 대부분 들었다고 한다. 김준성씨 같은 이는 20만원 넘는 돈을 예치했다. 그런데 그 뒤 막상 쌀값이 떨어지자 정부는 보험을 들었든 그렇지 않든 똑같이 보전을 해줬다는 것이다. 이씨는 “정부 말 잘 듣고 보험을 든 사람들만 결국 손해를 봤다”며 “정부가 자꾸 거짓말하면서 농민들 주머니 터는데 어떻게 믿겠냐”고 말했다.

기름값 폭등의 타격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다. 15년째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는 우갑제(57)씨를 만난 건 7월21일 오후 마을 정자나무가 멀리 바라다보이는 그의 집에서였다. 그는 600평(1980㎡)짜리 하우스 3동에서 연간 45t 정도의 방울토마토를 생산해낸다.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하우스 일을 하기 때문에 지금은 그에게 농한기다. 겨우내 하우스 내부 온도를 영상 11∼12℃로 유지하기 위해 3만ℓ가량의 경유를 쓰는데, 지난해에는 200ℓ짜리 한 드럼을 면세유로 공급받는 데 18만원이면 족했으나 최근엔 25만원까지 올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가장 벌이 좋다는 농가가 대기업 초임보다 못해

우씨는 이 마을에서 그나마 벌이가 가장 낫다고 손꼽히는 인물. 연간 소득을 물었다. “1년 매출이 9천만원가량 되는데, 일꾼 4명 품삯에 기름값 등 비용을 빼고 나면 3천만∼4천만원쯤 남어유. 그런데 대기업에 들어간 우리 아들 초임이 4천만원은 된대유.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출 단가는 비슷한데 원가는 자꾸 올라 이 농사도 한 2년만 더 하고선 그만둘래요.”

비료값·기름값과 함께 농민들의 허리를 짓누르는 게 바로 사료값이다. 가축을 많이 키우는 농가로서는 죽을 맛이다. 소 75마리를 키우고 있는 조아무개(59)씨는 “하루에 25kg짜리 사료를 22포대 정도 먹이는데, 지난해 초에는 12만∼13만원만 주면 사던 것을 지금은 20만원은 줘야 한다”며 “사료값이 지난해 초 대비 40%는 올랐다”고 했다. 실제 남부여농협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사료값은 지난해 3월15일 이후 네 차례나 올랐다. 한 포대에 6700원 하던 ‘큰소비육M’은 현재 1만400원을 줘야 살 수 있고, 7200원짜리 ‘큰소비육F’도 1만600원으로 뛰었다.

반면 소값은 2년 전과 비교하면 70%가 떨어졌다. 건강한 암송아지 한 마리 값이 350만원까지 나갔는데, 지금은 140만원밖에 쳐주지 않는다. 지난해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기 전까지만 해도 240만∼250만원 정도 하던 값이 체결 직후 급락하더니, 올해 들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이 타결된 뒤에는 이 꼴이 났다. 조씨는 “지난해 초엔 600kg짜리 암소값이 600만원 정도였는데, 오늘 날짜로 시장 가격을 보니 400만∼420만원밖에 안 하더라. 미국산 쇠고기가 시중에 풀리고 (한우는) 전망도 없고 하니까 그렇지 뭐”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씨도 지난 4월 과천정부청사와 서울 여의도에 가서 두 차례에 걸쳐 생전 처음 집회에 참여해봤다. “이게 씨가 먹혀야지….” 조씨가 말을 이었다. “마이동풍격으로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와야 FTA가 체결된다’ 이렇게 각인이 된 사람들한테는 아무 소용없단 말야.” 축사 쪽으로 가서 설명을 해달라는 요청했지만, 그는 끝내 보여주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조씨는 이미 새 축사 등을 짓느라 1억원가량의 빚을 안고 있다. 내년 추석 때까지는 시장에 내다팔 정도가 된 어른 소와 송아지를 모두 팔아 빚을 절반으로 줄일 계획이다. 그는 정부가 어려운 농촌 현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쓴소리를 했다.

[현장] 2008년 ‘한우농가’는 지금?

5~6명이 신용불량자, 두 가족은 야반도주

“부시가 (한국 상황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한다니까, 일국의 국무총리, 여당 정책위의장이라고 하는 분들이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서 ‘맛있다’고나 하고,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으로부터 세금 걷어 세비 받고 어느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인지 이해가 안 간단 말야. 이건 능력과 자질의 문제야. 아직도 민심을 다독일 생각은 못하고 있어. 뭔가 대책을 세우고 희망을 줘야지. 희망을 주지 못하는 건 정치가 아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집이라 하여 ‘꼭대기집’이라 불리는 조씨 집을 돌아 나오니 정자나무가 한눈에 보인다. 동네 육각정 아래 그늘에는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 대여섯 명이 모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휑한 마을길에는 개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길 옆 논에서는 최영구(76)씨가 비스듬히 자른 깔때기로 분말 비료를 뿌리고 있다. 최씨는 이틀 뒤 고추밭에서 만났을 때 “기계삯, 비료값은 올라가도 쌀값은 안 올랐다”며 “정부가 비싼 물가나 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3고’(비료·기름·사료값)에 동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나는 듯하다. 농민들도 잘 안다. 국제 곡물값과 석유값 등 원자재값이 오르기 때문에 가격 상승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다만, 정부가 이런 농촌의 어려운 현실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대책을 마련해주길 바랄 뿐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실제 가계 빚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더니 10가구 정도만 답을 했다. 10가구 평균은 5900여만원에 이르렀으나, 버섯농장과 소 사육을 위해 1억원 이상의 많은 빚을 진 3가구를 뺀 나머지 7가구의 평균 빚은 2371만원이었다. 마을의 한 주민은 “38가구 가운데 2가구를 빼고는 빚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이 마을 주민 가운데 대여섯명은 농사짓다 생긴 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 신세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촌이 이제 뭘 더 잃어야 ‘천형’과도 같은 이런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마을에는 괴소문까지 나돈다. “한국 촛불집회 등이 꼴보기 싫은 미국이 일부러 가격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야말로 근거 없는 소문이다. ‘사재기’도 등장했다. 한 주민은 비료값이 8500원대일 때 200포대를 미리 사놨다. 값을 올려 되팔 목적으로 산 게 아니기 때문에 결코 탓 할 일은 아니다. 치솟는 가격 상승에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일 뿐이다.

트랙터와 경운기 등을 사는 데 쓰려고 농사자금을 대출했다가 갚지 못하는 바람에 이자에 이자가 붙어 8천만원의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된 ㄱ씨. 그는 최근 10년 동안 배추 2만 포기를 심은 밭을 두 번이나 갈아엎었다. 가격 폭락 때문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농사지어서는 못 먹고 산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욕 과잉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잘 안다.

10년간 배추 2만 포기 갈아엎길 두 차례

지난 7월23일 오전 그는 논에 벼멸구 등을 막기 위해 농약을 쳤다. 농약 살 돈이 없어 아는 사람에게 6만원을 빌렸다. 그런데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갈매기’가 그만 비를 뿌리고 말았다. 농약이 희석되는 바람에 말짱 도루묵이 됐다. 그래도 비가 그친 뒤 다른 논에도 농약을 쳐야 했다. ㄱ씨 부부를 따라가 길이가 100m는 족히 넘을 농약 살포기 호스 잡는 일을 거들었다. 호스 자체 무게도 있지만 내부에 농약이 흐르다보니 생각보다 꽤 무겁다. ㄱ씨가 논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농약을 뿌리고 아주머니가 호스를 옮길 때마다 함께 끌었다. 금세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일을 마친 부부는 조금 전 농약을 뿌렸던 논으로 다시 향했다. 8년 전 중풍이 찾아와 왼쪽 몸이 성치 않은 ㄱ씨가 경운기 운전대를 잡았다. 이 논들은 물론 자기 게 아니다. 모두 빌린 것이다. 점심 때는 이미 지났다. 황새 없는 황새울 들녘에 경운기 소리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크게보기)



3박4일 야생 버라이어티

아, 게으름뱅이를 깨우는 저 참새들

농촌의 현실을 현장에서 직접 느껴보기 위해 기획된 이번 표지 이야기는 기자 개인들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물론 기자 각각의 생각과 보고 느낀 것이 다르기에, 그 추억도 약간씩 차이가 났다. 다만, 이번 취재를 거친 뒤론 예전처럼 한가한 시선으로 목가적인 농촌 풍경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는 점은 공통적이었다. 기자들 개개인이 털어놓는 키워드로 3박4일 농활을 겸한 취재의 추억을 더듬어봤다.
논밭엔 주름진 얼굴, 무표정한 눈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주민 10여 명에게 말을 걸었는데, 일흔 살 아래가 한 명도 없었다. “힘이 부쳐 논농사는 할 수 없고 고추와 깨 농사만 조금 짓는다”던 노인은 여든넷이라고 했다. 논에서 피를 뽑다가 허리를 잠깐 펴고 힐끗 뒤쪽을 쳐다보는 또 다른 노인의 모습에서는 화가 신학철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했다. 검게 그을린 주름진 얼굴과 무표정한 눈에 고스란히 담긴 고단한 삶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사진들을 찍었다. 박승화 기자
피(血)를 뽑히며 피(草)를 뽑다
고추밭은 더웠다. 아침에 비가 한바탕 쏟아부었는데도 햇볕은 뜨거웠다. 고추밭에는 모기도 많았다. 잡초를 뽑기 위해 고랑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팔·다리·어깨·등 할 것 없이 모기 주둥아리들이 사정없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오리걸음과 유격자세를 섞어놓은 듯한 포즈로 밭고랑을 지나자니, 평소 운동과 거리가 멀어서인지 온몸에 짜르르한 충격이 왔다. 그렇게 고추밭에서 일한 시간은 (고작!) 15분. 그런데 구교4리 주민들은 모두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한바탕 한 뒤 아침밥을 먹는다. 날도 뜨겁고 낯도 뜨거운, 그런 날들이었다. 구둘래 기자
저 참새를 다 구워먹어버릴까 보다
숙소였던 동네 육각정에서는 늦잠이 불가능했다. 아침마다 닭 울음 소리, 참새 소리, 바람 소리에 아침 6시 이전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참새 수백 마리가 육각정 처마 밑 틈을 오가며 울어대고 있었다. 이 참새들을 모두 잡아서 구워먹을 방법은 없을까? 맛있을 텐데…. 이장님이 방송까지 했건만 생각보다 일거리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좀 민망했다. 농번기로 택할 걸 그랬나 보다. 내 장인어른이 유지웅씨이고, 장모님이 최화월씨이다. 이번 취재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전종휘 기자

그 집 며느리 도망갈까 걱정이야
타이에서 왔다는 사와이씨의 집을 둘러본 순간 2년 전 찾은 중국의 한 농가가 생각났다. 너무 가난해 1960~70년대 한국 농촌 풍경을 떠올렸더랬는데, 한국에도 여전히 그런 곳이 있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 남편과 거동이 불편한 시부모를 모시고, 열마지기(2천 평) 남짓 짓는 벼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톱엔 새카맣게 때가 끼었고, 몸뻬에서는 번들번들 검은 윤이 났다. 더욱 마음이 아픈 건, 동네 사람들이 “그 집은 며느리 도망갈까 걱정일 거야. 누가 다 (그 식구들을) 먹여살리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순혁 기자

사진 한 장으로 맺은 결혼
언제나 그렇듯 취재는 느닷없이 아주 개인적인 사연들과 마주친다. 7월21일 밤에 만난 아름다운 그 사람은 필리핀에서 온 여성이었다. 그녀는 무뚝뚝한 한국인 남편과 사진 한 장 주고받고 부부라는 인연을 맺었단다. 이 부부에게 ‘사랑’이란 게 있을까? 그에게 한국행 비행기는 자신과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을까? 불편한 의문이 내내 마음과 어깨를 짓눌렀다. 박수진 취재영상팀 PD

“외롭지 않으세요”에 주저 없이 고개가 끄덕
“외롭지. 친구들은 다 죽거나 떠나고, 자식들도 바쁘니 못 내려오고, 외롭고 쓸쓸하지.” 배마레 마을 끝자락에서 홀로 사시는 신이례(77) 할머니의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오랜만에 찾아온 말상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으신 게 역력했기 때문이다. 비단 신이례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구교4리에 머문 3박4일 동안 가가호호 일일이 방문해 내가 마주했던 건 그들의 외로움이었다. 하나같이 속마음을 쉬 내비치지 않다가도 “외롭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주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 얘기를 꺼내면 변명하느라 바쁘고, 손자 얘기가 나오면 엉성한 이빨을 보이며 웃느라 바쁜 어르신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남형석 인턴기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