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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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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비즈니스는 찬밥덩어리

등록 2008-08-08 00:00 수정 2020-05-03 04:25

원자재 가격상승에도 대기업은 깜짝 실적, 납품업체는 납품가 인상 없어 매달 몇 억씩 적자

▣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라지만, ‘스몰 비즈니스’는 찬밥 신세다. 몇몇 중소기업인들에게 공항 귀빈실 이용 권한과 대통령과 직접 통화가 가능하다는 ‘MB폰’을 나눠줬을 뿐, 이명박 정부는 지난 반년 동안 중소기업들을 살리기 위한 큰 그림과 정책 로드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중소 제조업과 관련한 주요 경제지표들은 올 상반기에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이렇게 도와주면 신경 써주지 않을까”

자영업자들의 상황도 심각하다. 지난달 초 생뚱맞게 ‘촛불시위 탓에 자영업자가 죽는다’며 성명서를 발표한 소상공인 단체의 대표 중 한 명은 사석에서 “이렇게라도 도와주면 정부에서 우리한테 신경을 써주지 않겠냐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종사자 1인 이상 전 산업(2006년 기준)에서 사업체 수의 99.9%, 종사자 수의 87.5%를 차지하는 ‘스몰 비즈니스’ 영역, 그리고 여기에 삶의 뿌리를 둔 서민과 중산층들은 지금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고 경제를 살려내겠다’던 정부의 정책 아래서 오히려 신음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상반기 성적표는 대기업-중소기업 양극화의 심화 현상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먼저 중소 제조업의 생산증가율(전년 동월 대비)을 보면, 지난 1월 4.2%를 기록한 뒤 2월 0.3%, 3월 1.9%, 4월 3.8%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반면 올 2~4월 대기업 생산증가율은 꾸준히 15% 안팎을 기록했다. 또 올 들어 중소 제조업체들의 출하량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재고증가율은 1월 -0.8%, 2월 -1.3%, 3월 -2.3%, 4월 -5.3% 등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최윤규 조사통계팀장은 “내수 부진 등의 여파로 중소기업들이 생산을 늘리기보다는 그동안 누적된 재고를 방출하며 기본적인 시장 수요에만 대응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최근 발표된 주요 대기업들의 지난 2분기 실적을 보면 ‘사상 최대’라는 수식어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차는 분기 매출 9조1068억원를 기록해 9조원대를 처음 돌파했고, 영업이익도 662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4%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본사 기준으로 18조1400억원이라는 분기 매출 신기록을 올렸으며, LG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2조7351억원과 856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2.1%와 84.6% 증가해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라 이를 만했다. 대형 정유사 및 철강사들은 원유와 철강 등 원자재 값이 급등했음에도 콧노래를 불렀다. 포스코는 분기 매출 7조4580억원에 1조885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고, SK에너지의 분기 매출(12조1098억원)과 영업이익(5324억원)도 1분기보다 30% 안팎씩 늘어났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와 대기업의 새로운 사업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이 올 들어 가장 큰 애로 요인으로 꼽는 것은 원자재 가격 상승분만큼 납품단가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LG전자에 생활가전 관련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ㄱ사의 경우 올 들어 원자재로 쓰는 철판은 57%, 구리는 30%나 가격이 올랐지만, 상반기 중에 납품단가를 인상하지 못했다. 또 환율 하락에 대비해 지난해 환변동보험에 가입해뒀는데 오히려 환율이 치솟는 바람에 매달 7억원씩 손실을 보는 상황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2분기에 사상 최대 이익을 올린 LG전자가 외부의 시선이 부담됐는지, 3분기에는 가격을 10% 안팎 올려주겠다고 통보했다”면서 “그러나 이 정도 가격 인상으로는 당장 수지를 맞추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환율을 억지로 끌어올린 정부에서 중소기업들의 환변동보험 손실을 책임져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구 지역에서 플라스틱 업체를 운영하는 서아무개 사장은 “국제 유가가 내린다고 하지만, 우리가 원료를 받아쓰는 석유화학 업체는 당장 이달 초에 내야 할 폴리에틸렌 가격을 또다시 인상한다고 통보해왔다”고 하소연했다.

올 초 정부에 관급 공사용 납품 가격 인상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던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업체들은 오는 8월4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또다시 대규모 궐기대회를 연다. 이번엔 정부가 아니라 원료인 아스팔트를 공급하는 대형 정유사들에 가격 인상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서다. 한국아스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의 김덕현 전무는 “독점적인 지위를 갖는 4대 정유사가 최근 아스팔트 가격을 kg당 400원(4월 기준)에서 550원으로 37.5%나 올리겠다고 통보해왔다”며 “아스콘 업계는 올해 관급 계약에서 원자재 인상분을 모두 반영하지 못해 손해를 감수하는데도 정유사들은 이기적 행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올 들어 원자재값 급등에 따른 애로를 호소하는 중소기업들의 목소리가 쏟아지자 지난달 정부가 납품단가 조정협의의무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기업과 중소 납품업체 간에 최초 계약을 맺은 이후 원자재값이 변동할 경우 단가를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하도급 계약서에 명시하도록 하고, 중소기업들에 납품단가 조정협의 신청권을 보장하겠다는 계획이다. 조정협의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업계 대표 등으로 구성된 하도급분쟁조정위원회에서 최종 조정을 하도록 할 방침이다. 그러나 중소기업계의 반응은 차갑다. 중소기업중앙회 산하 납품단가현실화위원회의 서병문 위원장(주물조합 이사장)은 “협의 자체가 구속력이 없고, 최근 5년간 하도급 분쟁 조정을 신청한 업체들의 82%가 분쟁 조정 이후 대기업으로부터 거래 단절을 통보받은 점을 비춰보면 실효성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 7월 초부터 중소기업중앙회는 애초 요구해온 대로 원자재값 상승분을 그대로 반영하는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을 촉구하는 ‘100만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맞물려 대기업들이 과거 중소기업들의 영역인 내수시장에 새롭게 파고드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삼성물산을 비롯한 삼성 계열사들이 지분을 보유한 (주)아이마켓코리아가 ‘에스처’라는 브랜드로 사무용 가구 시장에 뛰어들었고, 한솔그룹의 한솔텔레콤은 최근 인쇄업체를 인수하며 ‘패키징’(종이 포장박스) 사업을 시작해 영세업체들의 반발을 산 바 있다. SK네트웍스 등은 경정비 분야의 사업확장 움직임을 보이면서 동네 카센터들의 모임인 한국자동차부분정비사업조정연합회와 충돌을 빚고 있다.

서비스업 93% “경기 악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소상공인·자영업자들도 뿌리째 흔들리는 형국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전국의 소상공인 102명을 대상으로 경기동향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를 보면, 83.4%가 ‘올 초보다 매출액이 감소했다’고 응답했다. 이들의 평균 매출 감소 규모는 30.7%였다. 올 초와 비교한 최근 경기 상황에 대해서도 ‘매우 악화됐다’는 응답이 57.8%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다소 악화’(35.3%), ‘비슷한 수준’(5.9%), ‘매우 호전’(1.0%) 등의 차례였다. 경기 악화의 원인(복수 응답)으로는 ‘매출 급감 등 내수 침체’(73.3%)와 ‘원재료비 인상 등 물가 불안’(61.4%)이 1순위로 꼽혔다. 또 최근 경영수지가 ‘적자’라는 응답 비율이 56.9%인 반면 ‘흑자’라는 비율은 7.8%에 그쳤다.

8월1일 새벽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만난 도매상인들의 목소리에도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평화시장 3층에서 딸의 이름을 딴 ‘은아패션’을 운영하는 홍금례(51)씨는 지난 4~5월 잠시 반짝 호황이 있었지만,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죽자 손님들도 뚝 끊겼다고 설명했다. 낮에는 남편과 함께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가게를 본다는 그는 “여기 2장에 5천원이라고 적힌 세일 품목만 몇 장 팔릴 뿐”이라며 “물모시 두 마당을 들여야 옷 한 필을 만드는데 당장 8월부터는 원단 값도 오른다고 해 걱정”이라고 말했다. ‘물모시’는 모시 느낌이 나는 합성섬유를 가리키는 말이며, ‘마당’은 성인의 한쪽 팔 길이쯤에 해당한다. 신평화시장에서 신사복 바지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정아무개(46)씨는 “지난해 가게일을 보기 시작했는데, 하루 500벌 팔리던 게 올해엔 250벌 정도만 나간다”면서 “값싼 중국산 물건은 그나마 낫지만 한 벌에 최하 1만원 이상 원가가 들어가는 국산은 팔아도 남는 게 없다”고 털어놓았다.

동네 골목시장들이나 슈퍼마켓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대표적인 성공 재래시장으로 정부의 포상을 받은 바 있는 한 수도권 지역 전통시장 상인회장은 “조류인플루엔자, 쇠고기 파동 등이 닥치면서 식료품 위주인 골목시장들은 직격탄을 맞았다”면서 “특히 우리 시장에 있는 닭집 세 곳은 가게 세를 내지 못할 만큼 힘들어해 시장 상인들끼리 사먹어주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정수윤(43)씨는 “뉴스에서 보면 정부 당국자들이 자꾸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는 말을 하는데, 동네 상인들까지 구조조정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아 불쾌하고 불안하다”면서 “종합부동산세를 깎는 등 가진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데만 힘을 쏟지 말고, 자영업자들이 살아날 수 있게끔 경기를 살리든지 제대로 된 구제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민들은 장보기가 무섭다

장바구니를 든 서민들의 손아귀에도 힘이 풀린다. 지난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은 5.9%로 외환위기 이후 9년8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 생활을 위해 꼭 가격을 잡겠다고 공언한 휘발유, 라면, 밀가루 등 이른바 ‘MB 물가지수’ 관리대상 품목 52개의 가격 상승률은 같은 기간 7.8%나 됐다. 더구나 하반기 전기를 비롯한 공공요금들이 잇따라 인상되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대에 진입할 가능성도 높다. 김경배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은 “슈퍼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최근 물가 상승은 20~30% 이상 돼야 한다”면서 “서민들은 장보기가 무섭고, 서민층의 일부인 자영업자들은 소득 감소에 시달리는 악순환의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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