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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릴수록 강해지는 ‘올드 보이’들

등록 2007-05-18 00:00 수정 2020-05-03 04:24

태권도의 위기 초래한 김운용 전 위원, 측근들은 아직도 국기원을 흔들어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1972년 11월30일은 우리나라 태권도 역사의 새 장을 여는 날이었다.” 국기원이 1997년 펴낸 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그 말에 토를 다는 태권도인은 없다. 초창기 일본 가라테의 영향 아래서 성장해온 태권도는 국기원과 함께한 지난 35년 동안 세계 6천만 명이 수련하는 국제적인 스포츠로 성장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다.

비약적 성장, 그리고 썩은 물

영광의 이면에는 치욕이 있다고 했던가. 태권도의 영광은 오로지 태권도의 것이 되지 못했다. ‘태권도 황제’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때문이다. 태권도 영광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고, 지금 얘기되는 태권도 위기의 배경에도 그가 있다. 김씨는 30여 년 동안 세계 태권도를 좌지우지하는 3대 단체인 국기원·세계태권도연맹(이하 세계연맹)·대한태권도협회(이하 대태협)의 수장 자리를 움켜쥐고 태권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일인치하에서 고속 성장을 해온 태권도계에는 썩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태권도의 위기가 표면화된 것은 지난 2001년부터다. 시작은 인사 문제였다. 2001년 2월 김씨는 대태협 전무와 부회장에 임윤택 전 서울시태권도협회(이하 서태협) 전무와 송봉섭 전 서태협 회장을 각각 임명했다. 임 전무는 ‘특정 학교 출신을 편애한다’는 악명 탓에, 송 회장은 ‘업무상 공금횡령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던 전과 때문에 부적격 인사라는 뒷말이 많았다. 이 두 사람은 김운용의 수족으로 수십 년 동안 태권도계에 군림해온 엄운규 현 국기원장의 핵심 측근이었다. 소동은 잦아들지 않았다. 두 달 뒤에 치러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용인대와 경희대를 차별하는 편파 판정이 난무했고, 이는 용인대 학생 250여 명이 국기원을 점거하는 농성(태권도계에서는 이를 ‘4·16 사태’라고 부른다)으로 이어진다. 태권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범태권도 바로 세우기 운동연합’(이하 운동연합)은 “태권도를 망친 김운용, 엄운규, 임윤택, 송봉섭을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김운용씨는 2001년 11월20일 국기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태권도계에서는 박정희 서거나 이승만 하야에 맞먹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태권도계는 잠시 평화를 되찾는 듯했지만,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올드 보이’들의 귀환이다. 사임한 김운용 전 회장은 공금횡령과 배임수죄 등의 혐의로 2004년 구속됐지만, 엄운규 국기원 부원장은 그해 3월 새 국기원장으로 복귀했다. 비리 추문으로 벌금형을 받은 송봉섭씨는 국기원 부원장으로, 2003년 국기원 총무부장으로 일할 때 비리 혐의로 면직됐던 오성훈씨는 국기원 연수원부장으로 돌아왔다. 이를 보다 못한 오용전 전 국기원 기술심의위원회 부의장은 2005년 검찰에 △부정 승단 의혹 △해외 심사 추천비 할인 의혹 등 태권도계의 8가지 비리 의혹을 담은 진정서를 제출했다.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에 배당돼 수사 중이다. 이 가운데 단증 부정 발급과 부정 승단 논란은 당사자의 양심 고백과 국기원의 자체 조사로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태권도의 발전 방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비리 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귀환

2006년 국정감사에서 국기원의 사유화 문제를 지적했던 박찬숙 한나라당 의원실 관계자는 “국기원 등 태권도 단체들이 마치 사조직처럼 운영되면서 승부 조작, 단증 부정 발급, 공금횡령 등 각종 비리가 난마처럼 엮여 있다”며 “이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운용의 ‘올드 보이’들은 생살을 깎아내는 개혁을 할 수 있을까. 태권도의 미래가 암담해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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