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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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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기업’ 홍콩은 분노한다

등록 2003-07-24 00:00 수정 2020-05-03 04:23

‘국가안전조례’에 반대해 터져나온 대규모 시위 이면엔 ‘경제 사망’에 대한 분노가

중국이 다시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라는 수렁에서 막 헤어나오자마자 이번에는 홍콩에서 터져나온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1일, 중국 회귀(回歸) 6주년을 맞은 홍콩에서 약 50만명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나와 축제 대신 시위를 벌였다. 1989년 베이징에서 톈안먼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약 100만명의 홍콩인들이 지지 시위를 벌인 이후, 홍콩에서 두 번째로 발생한 대규모 정치적 시위였다. 중국 내에서도 톈안먼 사건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대규모 민주화 시위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홍콩의 중국 회귀 6돌이 되는 날이자, 중국공산당 창당 82돌이었다. 6월29일 국무총리가 된 뒤 처음으로 홍콩 땅을 밟은 원자바오는 홍콩 경제의 부흥 방안 가운데 하나로 무관세 및 서비스 장벽의 철폐를 통해 홍콩 기업을 대륙기업과 동일하게 대우하는 조처를 내리고, 중국 광둥성과 홍콩간 경제 단일화를 실현할 홍콩-중국간 ‘긴밀한 경제무역 협력방안’(CEPA)의 체결이라는 희소식을 갖고 방문했으나 대규모 시위로 체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입법 책임자 사임시키며 긴급 진화

중국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한 이번 홍콩 시위 사태는 ‘국가안전조례’(기본법 23조)의 제정을 둘러싸고 홍콩 당국과 시민들간에 빚어진 마찰이 주요 동기였다. ‘국가안전조례’는 97년 7월1일 홍콩이 중국으로 회귀한 이후 발효된 특별행정구 ‘기본법’ 23조에 근거해 홍콩 당국이 반드시 입법화하도록 의무화한 규정이다. 기본법 23조는 국가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전복이나 분열행위, 국가기밀 절취, 정치성을 띤 외국조직의 홍콩 내 활동 금지 및 홍콩 내 정치조직이나 단체의 외국 정치조직과의 연락망 구축 금지 등의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법안이 포괄하고 있는 각종 국가안전법 위반 관련 내용이 모호하고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커, 자칫 인권 및 언론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법안의 제정을 반대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항의시위에 당황한 홍콩 당국은 사태 확대를 막기 위해 급기야 지난 7월9일 입법안 심사를 연기한다고 밝혔다. 이어 18일에는 법안의 실질적 입법책임자였던 보안과 재정 담당 국장이 함께 사임함으로써 긴급 여론진화에 나섰다. 이에 반해 중국 중앙정부는 대륙 내 언론을 철저히 ‘봉쇄’한 가운데 침묵에 가까운 언행을 보이며 이번 사태가 몰고 올 각종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자칫 섣부른 간섭이나 말을 했다간 오히려 홍콩인들의 반발심리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하지만 일부 관측통들은 보안과 재정국장의 사임으로 드러난 홍콩 당국의 ‘책임문책’에 대해 7월9일 약 5만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재현된 대규모 항의시위에서 “정권을 민중에게 돌려달라”라든지, 2007~2008년 사이에 홍콩 행정수반 및 입법회 의원에 대한 직선제 도입 등 요구사항들이 점점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이자 중앙정부가 서둘러 직접 ‘손’을 썼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홍콩 행정장관인 둥젠화를 낙마시키기에는 사안의 성격이 너무 민감한데다, 만일 그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경우 벌써부터 ‘일국양제의 실패’라고 공개적 선전을 펴고 있는 대만 정부를 부추기고, 중앙정부 스스로도 지난 6년간의 일국양제 실험의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어서 두명의 핵심 장관들만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90년대 이후 국제금융도시 위상 흔들려

사건발생 뒤 줄곧 ‘모르쇠’로 일관하던 중국 언론은 7월14일에야 처음으로 관영매체인 평론을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표출해 눈길을 끌었다. 이 매체는 홍콩 시위 사태에 대해 “최근 홍콩에서 발생한 일련의 시위들은 (일부 세력들이) 현행 정치체제를 전복해 홍콩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홍콩인들을 이용하고 있다. 때문에 홍콩인들은 이들의 음모를 꿰뚫어서 그들의 졸병이 되는 걸 거부해야 한다”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이런 신랄한 논평은 사태를 바라보는 중국 정부의 뒤틀린 심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위 사태를 제2의 ‘톈안먼 사태’로 몰아 중국 내륙까지 민주화 운동의 확산을 기대하고 있는 홍콩 내 민주화 추진 세력들과 외신들의 보도 논조에 대한 일종의 ‘경고’ 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둥젠화 행정장관 역시 이러한 중앙정부의 암묵적 지원사격에 힘입어 지난 18일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홍콩이 어려운 시기에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일정한 타협은 할 수 있으나 절대로 권좌를 내주지 않을 것임을 내비쳤다.

둥 장관의 사임 여부와 관계없이 현재 홍콩의 ‘어려운 시기’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스라는 전염병은 극복할 수 있었지만 현재 홍콩이 직면한 총체적 어려움은 본질적으로 쉽게 극복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홍콩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기본법 23조를 빌미로 한 민주화 요구지만 그 본질은 오랫동안 홍콩인들 마음속에 내재해 있던 각종 불만 정서들이 폭발한 것이다. 특히 지난 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쉽게 회복되지 않는 홍콩의 불경기와 10% 수준에 이르는 고실업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사스 파동으로 경제가 탈진상태에 이르러 홍콩과 홍콩인들은 현재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기본법 23조는 홍콩인들의 이런 불만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베이징의 한 정치학자의 분석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홍콩 경제의 장기적 사망’에 있다.

‘홍콩 경제 사망설’은 일국양제의 실험대상인 홍콩이 과도기적인 회귀 적응 과정에서 사회주의 중앙정부와 자본주의 경제체제 사이에서 적응능력을 상실하고 ‘사망’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홍콩 경제의 적응능력 상실은 중앙정부의 ‘간섭’보다는 내부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한 탓이 크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본격화된 90년대 이후 홍콩은 중국 정부의 외자도입 및 수출입 창구로서의 구실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하이·선전 등 중국 화남과 화동지역이 급격히 성장하고 이들 지역에 새로운 무역항이 들어서자 외국기업들이 원가절감을 위해 대거 대륙과 직거래를 하면서 예전에 누리던 국제 중개무역항으로서 독보적 지위도 상실했다. 또 아시아 제일의 금융센터를 꿈꾸며 홍콩의 국제금융도시 지위 탈환을 노리는 싱가포르의 맹추격과 상하이의 강력한 도전 등은 홍콩의 국제금융중심 지위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홍콩은 ‘민주의 기적’ 쟁취할까

회귀 이후 지난 6년간 지속된 불황으로 개인 파산자와 실업률이 급격하게 증가했고 부동산 가격도 하락했다. 이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 살인적인 고물가 등은 홍콩 사람들을 광저우나 선전으로 ‘북상 이민’하도록 만들고 있다. 현재 홍콩은 마치 부도 직전의 부실기업과 같은 상태다. 여기에 둥젠화 정부의 친중국적 정책과 과반수가 친중국 인사로 채워져 있는 입법회의 비민주적 기능은 홍콩 내 많은 지식인들에게서 일국양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일국일체제 행정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따라서 이번 홍콩 시위의 ‘주력군’이 대부분 중산층과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홍콩 당국뿐 아니라 중국 중앙정부에도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산층과 지식인들의 절대적 지지가 없는 홍콩의 일국양제 실험은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유는 있으되 민주는 없었다.” 중국 대륙인들이 영국 식민지 시절의 홍콩을 빗댄 표현이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시절을 청산하고 중국으로 회귀한 지 6년이 지난 현재에도 홍콩인들은 여전히 ‘민주를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70∼8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동방의 명주’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홍콩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던 홍콩이 이번에는 ‘민주의 기적’을 쟁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베이징= 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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