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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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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벌레다

등록 2007-10-26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용후생으로 가난을 물리치려 했던 박제가의 꿈

▣ 이덕일 역사평론가

박제가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글씨 쓰기를 좋아해서 항상 입에 붓을 물고 있었다. 화장실에서는 모래에 글씨를 썼고, 앉기만 하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어린 때의 를 읽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일곱 살 무렵인 영조 32년(1756) 청교동(을지로5가)으로 이사 갔는데 흰 벽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글씨 쓰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때문인지 어린 박제가는 나이보다 어려운 책들을 읽어 수재로 소문났다. 부친인 박평(朴坪)은 승정원 우부승지였는데, 박제가는 “선군(先君·돌아가신 부친)께서는 매달 종이를 내려주셨고 나는 날마다 종이를 잘라 책을 만들었다”라고 회상했다. 부친은 이 영특한 아이가 서자라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얼 출신 수재의 슬픔

그나마 부친이 살아 있을 때는 호시절이었다. 박제가가 열한 살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난이 밀려왔다. 어머니 전주 이씨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삯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묵동과 필동의 셋집을 전전해야 했다. 주위 사람들이 박제가의 가난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머니가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데는 자신 때문에 뜻을 펼칠 수 없는 영특한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박제가는 곧 세상이 자신 같은 서류들에게 문을 닫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박제가는 “어려서는 문장을 배웠고, 커서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학문(經濟之術)을 좋아했으나 수개월을 귀가하지도 않고 공부해도 지금 사람은 알아주지 않는다”((小傳))라고 말했던 것처럼 폐쇄의 나라 조선에서 그의 학문은 세상을 위해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 않았고, 세상에 아첨하지도 않았다. “뜻이 높고 고독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번화(繁華)한 사람과는 스스로 멀리하니 뜻에 맞는 이가 없이 늘 가난하게 산다”()라고 스스로를 평가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런 박제가와 뜻이 같았던 선배·친구들이 바로 백탑파(白塔派)였다. 현재 서울 탑골공원 자리의 백탑(원각사지십층석탑) 부근에 사는 지식인 그룹이 그들인데, 영조 43년(1767)에 서얼 지식인 이덕무(李德懋)가 백탑 근처로 이주하고, 이듬해에 양반 출신 박지원(朴趾源)이 뒤따라 이주하면서 백탑파라는 하나의 유파가 형성되었다. 백탑파는 조선의 주류 양반들과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달랐다. 박제가는 영조 44년(1768) 18·19살 무렵 서른 셋의 장년의 박지원을 찾아갔다.

“내 나이 18·19세 때에 미중(美仲·박지원) 선생이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명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 북쪽에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선생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옷도 채 입지 못한 채 나와 맞으며 옛 친구처럼 손을 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더니 읽어보라고 하시고, 직접 쌀을 씻어 다관(茶罐)에 넣고 밥을 하셨다. 흰 주발에 가득 담아 옥소반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백탑청연집’(白塔淸綠集序) 서문)

박지원의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경기감사·병조참판·돈녕부지사를 역임한 노론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박지원이 어린 서자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사 버선발로 맞이하고 직접 밥까지 해 대접했던 것이다.

이들의 남다른 처신은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은 정신세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의 일반적 지식인들은 그때까지도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숭명(崇明) 사대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매년 청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를 보내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사대하는 이중 처신이었다. 그러나 백탑파는 달랐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한 현실을 인정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정조의 서얼 우대로 관직에 올라

박제가가 자신의 이런 생각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 때는 정조 2년(1778)이었다. 사신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것이다. 백탑파인 이덕무도 함께 갔는데, 이 여행에서 박제가는 평소 자신들의 생각이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 뒤 박제가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랑캐’(胡)라는 한 글자로 천하의 모든 것을 말살하고 있지만, 나만은 ‘중국의 풍속은 이래서 좋다’고 말한다”((漫筆))라고 써서 중국의 풍속 중에 배울 것이 많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청나라의 장점을 흡수해 국부 증진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는 (北學議)를 저술했다. ‘북학의 서문’에서 박제가가 “무릇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은 하나라도 닦지 않으면 위의 정덕(正德)을 해치게 된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용후생으로 국부를 증진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청나라와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주장하는 세력을 북학파라고 지칭하게 된 것은 때문이었다. 원래 ‘북학’이란 (孟子)에 남쪽 지식인 진량(陳良)이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는 뜻에서 나온 용어다. 박제가가 를 쓸 때만 해도 일개 재야 학자의 주장에 불과했으나 정조가 즉위 뒤 서얼 우대정책을 쓰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조는 즉위 원년(1777) 1월 “조정의 진신(縉紳)들이 반드시 모두 어진 것은 아니고, 초야의 인물들이 반드시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라며 서얼들도 벼슬길에 등용할 수 있는 법제를 만들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그해 3월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이 제정되어 서류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나아가 정조는 재위 3년(1779)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4명의 서얼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전격 임명해 고식에 젖은 조선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란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사상계를 주도했던 것이다.

서얼 출신이었던 이들은 기존의 가치관에 경도되지 않았다. 박제가는 기존 사고틀을 깨야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조가 재위 10년(1786) 신하들에게 국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히라고 명하자 6품 전설서(典設署) 별제(別提)로 있던 박제가는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한마디로 가난입니다”(‘전설서 별제 박제가 소회(所懷)’)라고 진단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가난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중국과의 국제 무역이 백성들의 가난을 물리치고 국부를 증진시키는 첩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사족들에게 장사를 시킬 것도 주장했다.

“무릇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로 증가하는 것은 사족(士族)이 날로 번성하는 데 있습니다. …신은 수륙(水陸)을 교통하며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에 사족의 입적을 허락할 것을 주청합니다.”(‘전설서 별제 박제가 소회’)

전통적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개념에 젖어 상업을 천시하는 사대부들을 상업에 종사시키자는 주장이었으니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박제가의 주장은 채택될 수 없었다. 대신 정조는 박제가에게 다시 청나라 여행 경험을 주었다. 재위 14년(1790)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보냈고, 다시 원자(순조)의 탄생을 건륭제가 축하한 데 대한 답례사의 일원으로 또 보냈던 것이다. 이때 정조는 박제가를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승진시켜 별자(別咨)를 가지고 가게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문관의 길 막히자 무과에 급제

박제가는 이런 경험들을 조선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려고 밤낮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눈병이 도져 정조 16년(1792) 검서관직을 사직해야 했다. 박제가는 서유구(徐有榘)에게 쓴 편지에서 “5년 전부터 계속 밤을 새웠더니 불행히도 왼쪽 눈이 어두워져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안경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금 검서관의 용도는 눈에 있는데 눈이 어두우면 물러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내한(內翰) 서유구에게 주다’)라고 눈병 때문에 검서관에서 물러나는 소회를 말했다.

정조는 그를 부여 현감에 임명했다. 직접 백성들을 다스려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호서 암행어사가 박제가에게 불리한 보고를 해서 파직됐다. 이때 정조가 “다른 관료는 너그럽게 처리하고 세력 없는 서류에게만 가혹하게 법을 적용할 수 없다”( 정조 16년 7월6일)라고 박제가를 옹호한 데서 알 수 있듯 어사의 보고는 서얼 출신 지방관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없지 않았다.

문관의 길이 막히자 박제가는 무과로 방향을 전환해 정조 18년(1794) 무과별시에 응시해 급제한다. 그는 4년 전인 정조 14년(1790) 이덕무·백동수 등과 함께 (武藝圖譜通志)를 간행했는데, 그의 무과 급제는 그가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 무예에도 능했음을 말해준다. 이때 그는 정3품 오위장에 임명됐다가 정조 19년(1795) 경기도 영평(永平) 현령으로 나간다. 지방관으로 백성들과 부대끼던 중 정조가 재위 22년(1798) 농서(農書)를 널리 구한다는 윤음을 반포하자 ‘북학의를 올리는 응지상소’를 올려 20년 전 에서 주장했던 내용을 다시 피력했다. 이 글에서 박제가는 자신이 지방관으로 직접 목도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 정경을 생생히 적은 뒤 “이제 농업을 일으키시려면 반드시 먼저 농업에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한 후에 다른 말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라면서, 첫 번째로 “유생을 도태시켜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일하지 않는 유생들을 도태시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 박제가는 ‘수레 유통’을 주장했다. “무릇 농사는 비유하자면 물과 곡식이요, 수레는 비유하자면 혈맥”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둔전(屯田) 시행을 주장했다. 둔전이란 일종의 병농일치제인데 박제가가 주장하는 둔전은 서울 근처에 일정한 땅을 마련해 농업 전문가를 두고 농사꾼 수십 명을 뽑아 농사 지휘를 받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농사꾼들이 최고의 농업 전문가가 되면 다시 전국에 파견해 한 사람 당 열 명씩 농업 지도를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 농사꾼이 전문가가 되어 농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리라는 것이었다. 정조가 수원 화성에 대유둔이라는 둔전을 만들어 큰 효과를 본 것은 박제가의 이 건의를 실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 사후 유배 당해

정조 21년(1797) 종3품 오위장을 맡고 있던 박제가는 노론 정권의 실세였던 동지경연사 심환지(沈煥之)와 부딪쳤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박제가가 호상(胡床·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심환지가 수하를 시켜 나무라자 발끈한 것이다. 심환지가 박제가의 파직을 요청하자 정조가 “뭐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라고 옹호해 무사히 넘어갔으나 정조가 재위 24년(1800) 6월 갑자기 승하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듬해 박제가는 사돈인 윤가기(尹可基)가 시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흉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아무런 물증도 없이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함경도 종성에 유배된다. 박제가는 유배지에서 장남에게 “삼사(三司)의 논란함이 준엄하니 너희들은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또 기미를 보아 은밀하게 공격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니 진실로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편지했을 정도로 삼사로부터 계속 사형을 주장받아 목숨이 풍전등화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이 편지에서 “천지에는 오히려 공론(公論)이라는 것이 있으니 나의 억울함은 위관(委官·조사관) 이하가 모두 잘 알 것이다”라고 자신의 결백함을 거듭 주장했다. 박제가는 3년 뒤인 순조 4년(1804) 방축향리(放逐鄕里)의 명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3월 사면됐으나 한 달 뒤인 1805년 4월 56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서얼로 태어나 이용후생으로 국부 증진을 꿈꿨던 경세가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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