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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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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해경은 왜 못 구했나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 짚은 해경이 승객을 구하지 못한 이유… 세월호와 교신 정보 공유되지 않았고, 지휘자는 현장에 가지 않았으며, 청와대는 방해만 했다
등록 2016-03-22 08:17 수정 2020-05-02 19:28
이 입수한 기록을 바탕으로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2015년 5월 세월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세월호 기록팀을 구성했습니다. 진실의 힘 조용환, 송소연, 강용주 이사와 이사랑 간사가 기획·진행을 맡았고, 박다영씨, 박수빈 변호사, 박현진씨가 자료 분석과 집필을 맡았습니다. 정은주 기자는 과 진실의 힘을 오가며 이 작업에 집중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기자상과 민주언론상을 받았습니다. 15만 장 가까운 기록과 3테라바이트(TB)가 넘는 자료를 추적·분석한 결실을 이제 세상에 공개합니다. 700쪽에 이르는 책 (진실의 힘 펴냄)입니다.
은 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는 한편, 책에 모두 담지 못한 이야기를 더해 4주에 걸쳐 집중보도합니다. 2015년 4월부터 진행한 세월호 탐사보도의 마지막 매듭입니다.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인근에서 세월호가 침몰할 때 해경 123정은 멀리 떨어져 “철수해, 철수해”라고 소리쳤지만 전남201호 고무보트 등은 가까이 다가가 마지막까지 구조 활동을 펼쳤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인근에서 세월호가 침몰할 때 해경 123정은 멀리 떨어져 “철수해, 철수해”라고 소리쳤지만 전남201호 고무보트 등은 가까이 다가가 마지막까지 구조 활동을 펼쳤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선장이 끝까지 남아 28명 모든 선원을 다 구조를 했습니다.”

해양경찰청장 김석균은 2015년 12월15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조위)가 시행한 제1차 청문회에서 일본 아리아케호 사고의 사례를 들어 구조에 실패한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에 2009년 아리아케호라는 카페리호 사고가 있었다. 세월호가 만들어진 조선소에서 똑같이 만들어진 배였는데, 그때 그 배가 운항을 하다가 풍랑에 의해 화물이 휩쓸리는 바람에 세월호같이 사고가 났다. 5시간 만에 그 배가 전복됐다. 그런데 선장이 끝까지 남아 28명 모든 선원을 다 구조했다.”

선장 이준석을 비롯한 세월호 선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해상 사고 때 선장과 선원들에게 일차적 구조 책임이 있는 건 맞다. 아리아케호에서 선장이 끝까지 배에 남아 승객 7명과 선원 21명 전원을 구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처럼 “무능한 선장”이 수백 명을 내버리고 탈출하는 상황에서 구조 당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해경이 그랬듯이 승객과 배를 버린 선장과 선원들을 제일 먼저 데리고 나오고 나중에 그들을 비난만 하면 되는가.

은 101분 동안 기울어져가는 배에서 해경이 승객을 구하지 못한 이유를 짚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않는 상황실, 현장에 없는 현장지휘자, 구조를 ‘뒤흔든’ 손을 확인했다.

1. 상황을 파악하지 않는 상황실

해경 100t급 경비정인 123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오전 9시34분, 세월호는 52.2도 기울어져 있었다. 50도를 넘기면서 배는 급속도로 넘어갔다. 오전 8시49분 사고가 발생해 30도 정도 기울어진 때부터 해경이 도착한 9시34분까지 40여 분간 배는 약 20도밖에 더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경이 도착한 뒤 40여 분간은 급격히 기울어져서 10시17분 결국 뒤집어졌다. 해경 지휘부는 구조 세력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구조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승객 퇴선을 유도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해야 했다.

세월호 특조위 제1차 청문회에서 신현호 위원이 “돌이켜 생각해볼 때 언제쯤 (승객이) 퇴선했어야 하느냐”고 묻자, 해경 본청 경비안전국장 이춘재가 답했다. “9시30분 이전에 갑판에 나와서 대기했으면 구조 세력이 도착했을 때 바로 구조하지 않았을까.”

오전 8시58분 사고를 인지한 해경 상황실은 곧바로 세월호의 상태, 현재 승객의 상황 등에 관한 정보를 파악했어야 옳았다. 세월호가 진도VTS와 9시5분부터 9시35분까지 30분간 교신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진도VTS는 해경 구조 세력과 세월호를 잇는 단 하나의 소통 창구였다. 제주 운항관리실도 세월호와 교신했지만 해경 소속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도VTS가 파악한 정보를 어떻게 실시간으로 전파하는지, 그 정보를 토대로 해경 지휘부가 어떤 구조 작전을 펼치는지가 구조의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이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전파 수단이 잘못됐다. 진도VTS는 서해해경청 상황실에 전화로만 5~6차례 보고했다. 해경 지휘부, 구조 세력과 모두 소통할 수 있는 TRS와 문자상황보고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객선이 침몰한다는 신고를 접수받은 목포해경 상황실이 ‘여객선 신고 관련’ 단체대화방을 문자상황보고시스템에 개설하면서 진도VTS를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받지 못하면 단체대화방 개설 자체를 알 수 없다. 진도VTS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단체대화방에서 “단 한 차례” 정보도 교환한 적이 없었다.

진도VTS는 TRS도 가능했다. 그러나 해경 지휘부가 진도VTS를 호출해 교신한 것은 오전 10시1분, 단 한 차례였다.

서해해경청  진도VTS, 세월호하고 연락이 되는지?
진도VTS  세월호하고 지금 교신이 설정이 안 되고 있다.
서해해경청  선장하고 휴대전화 연결 계속하기 바란다.
진도VTS  수신 완료.

진도VTS는 세월호 선장과 전화를 못했다. 휴대전화 번호를 몰라서였다. 이 시각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이미 123정을 거쳐 전남행정선 707호로 옮겨탄 뒤였다.

둘째, 서해해경청 상황실은 진도VTS로부터 얻은 세월호 정보를 구조 세력에 전달하지 않았다. 헬기와 123정이 ‘깜깜이 출동’을 하도록 내버려뒀다.

서해해경청 상황담당관 유연식은 9시23분에야 진도VTS가 세월호와 교신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경비안전과장 김정식은 9시35분에야 진도VTS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해해경청장 김수현에게는 진도VTS-세월호 교신을 아예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입을 맞췄다. 김수현도 감사원에서 “상황실이 다소 시끄러워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로부터 1년6개월이 지난 2015년 12월14일 세월호 특조위 제1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김수현은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다. 9시18분에 이미 진도VTS가 세월호와 교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서해해경청 상황실은 진도VTS 보고를 실시간으로 받고도 세월호에 대한 구조 지휘를 하지 않았고, 그 잘못이 들통날까봐 보고받은 시각을 최대한 늦추며 발뺌했던 셈이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펴낸 <세월호, 그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펴낸 <세월호, 그날의 기록>

2. 현장에 없는 현장지휘자

수난구호법 제17조에는 “조난 현장에서의 수난구호 활동의 지휘는 지역구조본부의 장 또는 소방서장이 행한다”고 돼 있다. 해상 사고에서는 사고 해역을 관할하는 해양경찰서장이 지역구조본부의 장이 된다. 세월호 사고에서는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이 최초의 현장지휘자였다.

2012년 12월 목포해경서장에 취임한 김문홍은 “해난 구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목포해경 상황실장, 경비구난계장, 서해해경청 경비안전과장, 해경 본청 경비안전국 수색구조과장 등 해난 사고를 처리하는 부서에서 주로 일해왔고 함정 근무도 여러 차례 경험한 전문가였다.

김문홍은 2010년 12월26일 3009함 함장 시절 전남 신안군 흑산면 만재도 해상에서 뒤집힌 화물선(항로페리 2호)에서 인명을 구조한 경험도 있다. 이 배에는 전남 목포로 나가던 교사, 학생 등 15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구조세력은 차가운 바다에 떨어져 있던 승조원을 모두 구조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린 이 사건으로 김문홍은 국제해사기구(IMO)로부터 ‘바다의 의인상’을 받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는 그의 고향(조도)이었다. 김문홍은 전날 목포해경 전용 부두에서 출항한 1508함을 타고 중국 어선 특별 단속을 밤새 지휘한 다음, 4월16일 아침 헬기 512호를 타고 3009함에 내렸다. 3009함은 가거도 북서 65해리에 있었다. 김문홍이 3009함 조타실로 올라간 시각은 오전 9시3분이었다. 3009함은 “지금 맹골도 근해에서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고 보고했다. 3009함은 사고 현장으로 향했지만 도착 예정 시각은 11시30분이었다.


“구조나 이런 것을 지휘”하는 데 관심이 없는 청와대는 해경의 구조 활동을 뒤흔들었다. 세월호가 뱃머리만 남기고 침몰하던 10시30분까지 청와대는 시시콜콜 묻고 또 물으며 끊임없이 영상과 구조 인원 수를 요구했다.

김문홍은 사고 현장으로 직접 이동해 세월호의 침몰 정도, 승객 대피 여부 등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지휘해야 했다. 123정 정장 김경일은 대규모 해상 사고에 대한 구조 활동을 현장에서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법적으로도 그는 세월호 사고의 현장지휘자였지만, 당시 현장에 가서 구조 활동을 통솔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실질적이고도 유일한 지휘관 역시 그였다. 때마침 사고 현장으로 출동할 헬기 512호도 3009함에 있었다.

김문홍은 헬기 512호의 이륙을 지시하며 현장지휘자로서 헬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출발할까 “고민했다”고 감사원과 검찰에서 주장했다.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는 “TRS 정보를 듣고 대형 사고가 났구나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① 사고 현장에 마땅한 착륙 장소가 없고 ② 헬기는 소음 때문에 통신 지휘가 어려우며 ③ 각종 통신 장비를 갖춘 3009함에서 지휘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라고 해명했다.

감사원은 반박했다. ① 헬기의 호이스트(물건을 끌어올리는 전동 인양기)를 이용해 123정에 내릴 수 있었고 ② 헬기에도 통신 장비가 있어 이동 중에도 지휘할 수 있었으며 ③ 3009함에 있으면서 10시까지 아무런 지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 현장에 “전속력”으로 달려가면서도 김문홍은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다. 그가 탄 3009함에는 VHF 통신기가 있었다. VHF 채널을 67번으로만 맞췄다면 진도VTS와 세월호 간 교신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64마일이나 떨어져 있어서 VHF 통달 거리가 미치지 못할 것 같아서” 채널 67번으로 바꾸지 않았다. 실제로는 봄철이라 감도가 양호했다. 김문홍은 감사원에서 “오직 함정들과 122구조대의 신속한 출동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미처 (세월호와 교신을) 생각하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말했다.

2015년 12월15일, 세월호 특조위 청문회에 나온 김문홍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다고 추궁하자 “내가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이것을 다 챙기느냐”며 “한 일이 있는데, 그중에 없는 것만 골라서 말하느냐”고 화를 냈다.

3. 현장을 흔드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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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나 이런 것을 지휘”하는 데 관심이 없는 청와대는 해경의 구조 활동을 뒤흔들었다. 세월호가 뱃머리만 남기고 침몰하던 10시30분까지 청와대는 시시콜콜 묻고 또 물으며 끊임없이 영상과 구조 인원 수를 요구했다. 현장을 확실히 봐야 대통령 보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요구는 해경의 지휘 계통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123정까지 어김없이 전해져 결국 123정이 “구조 활동에 전념하기 어렵게 했다”. 현장 구조 세력이 제대로 구조 활동을 하는지 지휘·감독해야 할 해경 지휘부가 청와대 보고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해경청장 김석균은 “상급 부서에 보고하는 것”이 해경 본청의 역할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이 절반 이상 갇혀서 못 나온다”고 현장 보고하는데도 해경 지휘부는 현장 사진을 찍어 휴대전화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세월호가 65도 이상 기울어져 3층까지 물이 차오를 때 해경 본청 상황실장 황영태가 목포해경에 연락했다.

10시4분 해경 본청 상황실-목포해경
해경 본청  그 비디오 콘퍼런스 안 되나요? 현장 화면 못 보나요?
목포해경  잘 안 들립니다.
해경 본청  현장 화면 볼 수 없냐고요.
목포해경  아, 지금 123정이 ENG 카메라도 없는 상태에서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지금 50명을 구조해 서거차도 쪽을 가다보니까 경황이 없어가지고 지금 연락이 안 됩니다.
해경 본청 그래요? 하아(한숨).
목포해경  (123정에서 사진 올라온 거 받은 사람?) 사진을 찍어가지고 우리가 보내라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됩니다, 지금.
해경 본청  아 예,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황영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경을 기다리다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된 수백 명의 승객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청와대에 영상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와 300m 떨어져 있는 둘라에이스호 문예식 선장이 세월호 사진 “몇 컷”을 찍어 선사에 보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해경 상황실은 문 선장에게 전화했다. 세월호가 뒤집어져 물속으로 가라앉은 10시21분이었다. 문 선장은 어이가 없었다.

10시21분 해경 본청 상황실-둘라에이스호
해경 본청  사진을 보내셨다고 들었는데요, 사진을 핸드폰으로 전송해줄 수 있겠습니까?
둘라에이스호  아니, 항해 중이라 바쁘니까요, 거 좀 통화하기가 거북스럽네요.
해경 본청  현재 상황이 어떻습니까?
둘라에이스호  지금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세월호는 침몰 중입니다.
해경 본청  침몰 중이요?

해경 본청 상황실은 “침몰 중”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승객이 몇 명 탈출했느냐”고 물었지만 문 선장은 떨어져 있어서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영상과 더불어 청와대는 구조 인원 수를 실시간으로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 보고서에 한 줄을 더 채우기 위해서였다. 해경 본청 상황실장 황영태는 “5분 간격으로 전화가 쏟아졌고” “관심이 승선 인원, 구조 인원에 집중돼 있었다”고 말했다. 10시26분 해경 본청이 서해해경청에 말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게 구조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다음에 구조된 인력에 대한 카운트를 지금 정확히 못하고 있거든요. 그 카운트를 왜 하냐면 이게 청와대에서 실시간으로 물어보는데 카운터가 안 되고 있고….”

침몰하는 여객선으로 뛰어들어 승객을 구해야 할 123정 대원들은 사진을 찍고 사람 수를 세느라 바빠졌다. 세월호 2등 항해사 김영호가 말했다. “123정 선미에 있다가 조타실에 들어가보니 해경 대원 2~3명이 있는데 계속 어딘가와 교신하고 있었다. 해경끼리 상부에 보고하면서 뭐가 맞지 않는다고 서로 짜증만 내고 있었다.”

청와대가 영상을 요구하고 구조 인원을 파악한 이유는 뻔했다. “저희가 영상을 구하는 것 자체가 보고를 위한 거지, 저희가 영상을 구해서 어디다 쓰겠습니까?”(2014년 7월10일 국회 국정조사, 국가안보실 1차장 김규현)

해경,  TRS  녹취록  짜깁기한  이유


검찰·감사원·국회도  검증하지  않았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 지휘부는 TRS 채널 52번(서해해경청)으로 구조 세력과 교신했다. 사고 현장으로 출동한 해경 경비정 123정과 헬기 3대에는 문자상황보고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TRS 교신은 구조 지휘와 상황 보고가 적절했는지를 가늠하는 핵심 자료다. 그러나 해경이 검찰에 제출한 녹취록들은 엉터리였다. 작성 주체(해경 본청·서해해경청·목포해경)와 제출 기관(검찰·감사원·국회)에 따라 해경은 서로 다른 녹취록을 5개나 만들었다.
해경은 “음성파일 자체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녹취록을) 조작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녹취록은 원문 그대로를 기록해야 하는 기록물이다. 음성 감정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정하거나 삭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감사원, 검찰, 법원, 국회 그리고 세월호 특조위도 해경이 작성한 녹취록을 토대로 사고 지휘부와 구조 세력을 조사했다. TRS 원본 음성을 직접 듣고 자체적으로 녹취록을 만들거나 검증한 곳은 없었다.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피의자가 제공한 증거를 검증도 없이 인정한 셈이다.
해경이 작성한 TRS 녹취록에 누락된 주요 교신을 이 복원했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TRS 음성파일을 일일이 들으며 검증한 결과다. 삭제된 주요 교신은 이렇다.
첫째, 9시37분 헬기 511호가 교신한 “우리 지금 (안 들림) 했으니까 다섯 정도 구조하고 (안 들림) 게요. 준비하세요”다.
9시26분 세월호 침몰 현장에 도착한 헬기 511호는 9시31분 항공구조사 2명을 세월호 선체로 내려보냈다. 9시38분까지 조리부 선원 2명을 포함한 5명을 헬기에 태웠다. 그사이 도착한 헬기 513호는 주변에서 대기했다. 511호의 9시37분 교신은 5명을 구조하고 이동할 테니 ‘누군가’에게 다음 구조를 준비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3분 뒤 511호는 “5명 구조, 6명째 구조해서 서거차도로 이동해서 계속 구조하겠다”고 교신하고 세월호 상공을 떠났다. 헬기 511호가 그 자리로 와서 구조를 시작했다. 녹취록에 삭제된 이 교신은 당시 헬기들이 서로 교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사고 현장에 출동한 항공기(703호)와 헬기들(511·512·513호) 사이에서 교신이 이뤄졌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항공기와 헬기는 하나같이 세월호에 탄 승객 수를 몰랐다고 주장한다. 수백 명의 승객이 배 안에 있는 것을 알았다면 항공구조사를 선내에 진입시켜 퇴선하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항공기 703호는 인천해경 상황실에서 출동 지시를 받았을 때 사고 현장의 위치뿐만 아니라 세월호 승객 수도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천해경 상황실이 문자상황보고시스템에 9시10분 “승선원 450명, 승무원 24명”이라고 보고한 뒤 9시11분 인천 이어도에 있는 항공기 703호를 이동시키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항공 통제”와 “관제 임무”를 맡은 703호는 당연히 헬기들과 교신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세월호에 탄 승객 수 등 703호가 아는 세월호 정보를 헬기에 전파했을 가능성이 크다. 헬기 간 교신의 ‘증거’는 승객 수를 몰랐다며 구조 실패 책임에서 빠져나간 헬기에 다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단초다.
둘째, 9시39분 목포해경 상황실의 “긴급 상황 긴급 상황, 잘 들리면 잘 들리면 최대한 대응해가지고 빨리 현장으로 가서 (안 들림) 시키시기 바람”이라는 지시도 누락돼 있다.
이 교신 직후 선미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던 123정은 방향을 바꿔 세월호 선수 조타실로 다가갔고, 세월호 갑판부 선원 등 10명이 조타실 밖으로 나왔다. 선장과 선원이 승객을 버려두고 123정으로 차례로 옮겨타던 9시49분, 123정 정장 김경일은 보고했다. “지금 현재 사람들이 (안 들림) 내리고 있습니다. 먼저 들어오고 나서 다시 계류해야 합니다.”
그러나 녹취록에는 “들어오고 나서”라는 표현이 빠져 있다. 이 교신이 누락된 이유는 123정이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선원이었던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123정 대원들은 시종일관 조타실에서 구조한 사람들이 선원인 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선원임을 알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삭제한 교신은 또 있다. 11시9분 123정이 보고했다. “현재 27명 진도섬으로 옮기고 여객선에 선원 선원 현재 6명하고 응급환자 1명, 지금 7명이 대기 중 이상.” 그러나 해경이 작성한 녹취록에는 “선원, 선원 현재 6명하고”와 “지금 7명이”라는 단어가 지워져 있다.
세월호 특조위 요구에 해경은 뒤늦게 ‘원본’이라며 TRS 녹취록 3개를 공개했다. 작성 기관, 제출 기관에 따라 녹취록이 달라진 것은 “보완하는 쪽으로 추가”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교신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짜깁기’ 자체가 은폐고 조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조 실패를 조사한 감사원, 검찰, 법원은 음성파일을 듣지 않은 채 해경이 제출한 녹취록만을 근거로 결론을 내렸다. 해경이 녹취록을 짜깁기한 이유가 바로 이런 결과를 기대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용어  설명


AIS (선박자동식별시스템)  선박의 위치, 속력 등을 자동 송수신
SSB (어선공동망)  어선이 주로 사용하는 무선통신
TRS (주파수공용무선통신시스템)  해경 지휘부와 함정, 항공기가 교신하는 무선통신
VHF(초단파무선통신)  선박-육상 음성 통신 장치
VTS (해상교통관제시스템)  선박 충돌, 좌초 등 위험을 감지하는 24시간 관제센터
문자상황보고시스템  해경 메신저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발췌·정리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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