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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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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지 않았던 1천 일의 저항

세월호 침묵시위 제안자 용혜인씨, 최저임금·기본소득 도입 등 최저선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삶
등록 2017-01-10 16:09 수정 2020-05-03 04:28

그는 최저선을 지키는 사람이다. 2016년 총선에서 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해 최저임금 1만원, 기본소득 도입 등을 주장했다. 어쩌면 세월호도 그 최저선의 하나다. 국가라면 지켜야 할 생명, 정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조처의 최저선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참사였다.
인간으로서 도리의 최저선을 지키려고 슬픔으로 침묵행진을 제안한 사람이 있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대학생 용혜인(27)씨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침묵시위를 제안해 저항의 물꼬를 텄다. 그의 제안에 발맞춰 많은 시민이 침묵시위에 참여했다.
그가 가만히 있지 않았던 지난 1천 일, 공권력도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대규모 집회에 나가도 표적 채증을 당했고, 카톡 대화는 ‘털렸고’, 휴대전화는 압수수색당했다. 기나긴 재판도 있었다. 추모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됐고, 집회가 허가 범위를 넘어섰다는 명목으로 일반교통방해죄 혐의가 더해졌다.
공권력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끝없는 경찰 소환, 한 달에 한 번 이상씩 이어진 재판은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를 추모하는 이들조차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결국 2016년 11월2일 검찰은 그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1월11일 1심 재판 선고를 앞두고 그를 만났다.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2년이나 구형돼서 놀랐다.

최후진술을 하는데 공판 검사가 눈물을 찔끔찔끔 보이더라. 좋은 신념으로 한 일이지만, 이렇게 구형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은 수사 검사가 아니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치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 같다. 언제부터 재판이 시작됐나.

첫 기소가 2014년 10월31일 세월호 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한 날이었다. 여론이 악화될까 기소를 미뤘다가 털고 가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침묵행진 초기에는 집회신고를 안 했다. 관혼상제에 관한 것은 안 해도 되니까. 매번 행진을 하는데 담당 형사들이 ‘우리도 보고를 해야 하니 신고를 해달라’고 사정해 나중엔 신고를 했다. 결국 이전 집회는 신고를 안 했다고 기소하고, 이후는 집회가 신고 범위를 벗어났다고 기소하더라. 계속 기소가 추가되면서 10건이 넘었다. 집회에 단순 참가만 해도 채증해 기소했으니까. 그렇게 1심 재판만 2년여 동안 20번 넘게 받았다.

국가가 버린 ‘비국민’이 되는 체험이었겠다.

재판은 귀찮은 정도였는데, 매번 소환장이 날아오면 또 사건이 시작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특히 카카오톡 대화를 압수수색당했을 때 그랬다. 압수수색 영장이 나온 줄도 몰랐다가 유치장에 들어가서 알았다. 휴대전화 단말기도 압수수색해야 한다고 영장을 가지고 오더라. 정말 방송에서나 보던 장면이 나한테 일어날 줄 몰랐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지?’ 싶었다. 정유라가 불구속 기소 조건이면 자진 입국하겠다고 하던데, 그걸 보면서 저것도 협상 대상이 되는구나 싶었다. 나한테는 소환 일정이 안 맞아 날짜만 조정하려 해도 경찰이 체포영장 운운했다.

설마 실형이 나오겠나. 변호사는 실형감은 아니라고 한다. 벌금 400만~500만원 정도? 그래도 판결은 나와봐야 안다. 솔직히 그만한 돈이 없으니까 노역을 살고 끝내고 싶다. 노역 일당 10만원, 한 달 반 정도 쉰다고 생각하고 들어가고 싶다.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 검찰이 무조건 항소한다는데, 내가 항소하지 않으면 유죄를 인정하는 게 돼서 2심에서 불리하다고 하더라.

2014년 4월29일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 첫날 취재를 갔다. 서울 명동에서 행진을 따라가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중에 질문해주세요.” 서늘한 답이 돌아왔다. 조금은 딱딱해 보였던 그가 행진을 마치고 추모사를 하면서 울먹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6살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서 살았다. 남들보다 조금 먼저 움직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그는 서울 신림동에서 5급 공무원시험,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무원시험 준비하던 평범한 학생 당시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였다고 생각하나.

멋모르고 덤볐다고 해야 하나. 침묵시위를 준비하는데 후배가 “이러다 구속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 그래도 뭐라도 해야지 싶었다. 결정적 장면이라면, 전남 진도 팽목항의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고 진도대교로 행진한 일이다. 시험기간이라 밤늦게 공부하고 있었는데, 대규모 경찰 병력이 유족을 막아서는 장면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접했다. 유족들이 처절하게 울먹이고…,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정말 청와대까지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대통령이면 적당히 만나서 위로하고 끝낼 텐데…, 왜 저렇게까지 강경하지? 이해가 안 갔다. ‘도대체 이 나라는 뭐지?’ 의문이 들었다.

장벽이 많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생각했나.

당연히 그렇다. 지금까지 어떤 참사도 유가족이 이렇게 단결해 싸운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1주기에 시민들이 캡사이신을 맞으며 싸울 만큼 추모 열기도 뜨거웠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부딪힐 때마다 벽이었고,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렇게까지 하겠어?’ 하면 그렇게 하고 있었다.


<i> 세월호 유가족이 그의 재판에서 증언을 해주었다. 이들과 함께 울고, 함께 욕하며 견디며 1천 일이 흘렀다. 그는 “유가족이 ‘네가 국회에 갔어야 했는데’라고 하실 때 미안하다”고 했다.</i>
왜 그렇게까지 했던 것 같나.

잘 모르겠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감추고 싶은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보면서 ‘인과응보’가 떠올랐다.

304명이 정부가 구조하지 않아서 숨졌다. 정부의 태도는 끝없이 강압적이었다. 정치에 관심 없는 분들도 세월호 문제에 대해선 다르게 느끼는 게 보였다. 세월호가 끝까지 정권의 발목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호 유가족이 그의 재판에서 증언을 해주었다. 이들과 함께 울고, 함께 욕하며 견디며 1천 일이 흘렀다. 그는 “유가족이 ‘네가 국회에 갔어야 했는데’라고 하실 때 미안하다”고 했다. 대학생 용혜인은 활동가 용혜인이 되어 노동당 정치사업실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청년 세대를 대표하려 했던 그가 최저임금 수준의 활동비를 받는다. 세월호 1천 일은 그의 삶을 그렇게 바꿨다.“청년 세대를 대의하고 싶다”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를 제안한 용혜인씨. 기나긴 재판 끝에 그는 2년형을 구형받았지만, 최후진술에서 “후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승화 기자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를 제안한 용혜인씨. 기나긴 재판 끝에 그는 2년형을 구형받았지만, 최후진술에서 “후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승화 기자

보통의 삶을 준비하다 운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살고 있더라. (웃음) 중·고등학교 시절에 정말 모범생이었다. 지금도 부모님한테 좀 죄송한데,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면서 살았던 때는 무기력했다. 외롭고 돈이 없으니 학원도 못 다니고,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기출문제를 풀었다. 고시원 방에서 야구를 처음 보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려고 TV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공부했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의미 있고, 재미있고, 신난다.

총선 출마는 용혜인이 세월호의 상징으로 남아 있기 바라는 이들을 배반하는 일이기도 했겠다.

‘왜 노동당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원내정당으로 출마하지 그랬냐고. 세월호 후보로 나섰다면 더 이슈가 됐을 수 있다. 나는 세월호 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월호에서 확장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특히 새로운 사회 의제이자 내 정체성과도 맞는 청년 세대를 대의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뭘 해도 세월호 침묵시위를 했던 용혜인으로 봐주시더라. (웃음) 페이스북에 노동당 관련 글을 올리면 반응이 없는데 다른 걸 올리면 반응이 좋다.

총선에서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했다. 최저선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 힘겹진 않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다. 이런 것까지 싸워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답답하다가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다.

1천 일의 격렬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 남았나.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경험인 것 같다. 두려워하지 않고 같이 외치다 끌려간 사람들, 유치장에서 나눴던 이야기, 그런 경험을 다시 하기 어렵지 않을까.

주인공이 되는 것에 익숙해져 위험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나.

원래 낯을 많이 가린다. 침묵행진을 할 때도 더듬더듬 말을 잘 못했다. 그러다 언젠가 내가 발언에 익숙해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발언하기가 더 싫어지더라. 총선 (방송) 토론 때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어떻게 버텼을까’ 아득하다끝으로, 물어보지 않아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달라.

지난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세월호 미수습자 다윤 학생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봤다. 1천 일 동안 가족을 찾는다는 그 하나의 절망을 희망으로 붙잡고 살아온 분들이 있다. ‘어떻게 버텼을까’ 아득하다. 그런 이들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완전한 진상 규명, 실종자 찾기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마음의 짐으로 남을 것 같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고, 그 해야 할 일들을 언젠가는 해낼 것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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