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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 관리단 상설화해야”

세월호 참사 때 희생자 신원 확인에 앞장선 정낙은 성균관대 교수와 김승섭 고려대 교수의 대화…
삼풍부터 세월호까지 신원 확인의 역사

제1207호
등록 : 2018-04-09 17:07 수정 : 2018-04-1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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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슬픔이 절정에 닿는 순간. 한 생명의 죽음을 마주하는 이는 평소 그가 사랑했던 가족, 친구, 동료 등 이승의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어진 인연 한 올 없는 이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주검의 신원을 확인해야 하는 의사다.

정낙은(사진)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을 본 인물이다. 정 교수는 의대를 졸업한 뒤 포항성모병원 임상병리학과 과장으로 근무하다, 199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발을 들였다. 그해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대형 재난사고가 발생했을 때 법의관이 떠맡는 일은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과 다르다. 사인을 밝히고, 범인 흔적을 찾는 일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신원 확인’이다. 국과수에 첫발을 들인 그해 여름, 정 교수는 육중한 콘크리트 더미에서 숨진 이들 가운데 30구의 신원은 끝내 밝히지 못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인터뷰를 청한 <한겨레21>과 만나 “그때 30구의 신원을 밝히지 못한 것이 가슴에 맺혔다.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이 험한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버텨온 것은 그때의 한이 남아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2014년 봄이 닥쳐왔다. 세월호 참사 당시 그는 희생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 팀을 이끌고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숱한 주검이 그의 팀을 거친 뒤에야 살아생전의 이름을 회복했다. 2017년 5월 국과수를 정년퇴직한 정 교수는 같은 해 8월부터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국과수 퇴임 뒤 언론과 한 첫 인터뷰는 <한겨레21>과 함께 세월호 참사를 마주해온 이들을 연속으로 만나고 있는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가 맡았다. 인터뷰는 4월2일 서울 혜화동의 한 사무실에서 했다. _편집자

김진수 기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4월16일을 기억하나.

물론이다. 그날 나는 서울에 있었다. (국과수 본원이 있는 강원도) 원주팀이 당일 1차로 목포로 내려갔다. 현장에서 해양경찰과 협의가 원활치 않아, 한 차례 철수했다가 4월17일 다시 내려갔다.

협의가 원활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당시 우리 사회가 생존자가 있을 것이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세월호에 에어포켓이 있어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시점이었고, 누구도 죽음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국과수는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우리가 사건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래서 4월19일까지 세월호에서 수습된 주검은 해경이 신원 확인을 맡았다. 국과수는 이후에 업무를 시작했다.

“대형 재난, 초기 신원 확인 아주 중요”

주검의 신원 확인 절차는 어떻게 되나.

기본 단계가 있다. 우선 주검에서 정보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를 ‘사후 자료’(PM·Post-mortem Data)라고 한다. 그다음에 희생자 가족이 제공하는 정보나 본인이 쓰던 물건에서 나오는 자료가 필요하다. 이는 ‘생전 자료’(AM·Ante-mortem Data)라고 한다. 제공받은 자료와 확보한 증거물을 분석해 치아, 지문, 유전자 등의 정보를 추린다. 그 뒤 PM과 AM 자료가 일치하는지 검토해 신원을 확인한 뒤 주검을 인도한다.

문제는 AM 데이터다. 희생자 가족을 잘 위무하고 관계기관과 신뢰가 두터울수록 AM 자료가 원활하게 수집된다. 대형 재난에서는 초기 신원 확인이 아주 중요하다. 초기 한 명의 신원 확인이 잘못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 명도 신원이 바뀐다. 이 경우 엄청난 혼란이 생기는 것은 물론, 전체 신원 확인 과정에 대한 불신이 증폭된다. 따라서 먼저 발견돼 상대적으로 온전한 주검일수록 더 정확하게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 나중에 나오는 주검은 부패가 심하거나 온전하지 않아 신원 확인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앞에서 신원 확인이 잘못되면, 나중에 나오는 주검은 누구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 초기 신원 확인 과정에서 혼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초기 단계인 4월19일까지 29구가 수습됐다. 그중 3명의 신원이 뒤바뀌었다. 인지 식별(외양을 보고 주검의 신원을 판단하는 방법)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가족이 얼굴을 보고 확인하는데도 신원이 틀릴 수 있나.

보통 인지 식별로 신원을 확인할 가능성을 90% 정도로 본다. 10명 중 1명은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주검을 확인하기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국과수에서는 99.99% 이상 확실해야 신원 확인이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때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얼마 만에 신원을 확인해야 했나.

대형 재난에서 국제 기준을 따르면 최소 2주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혼란한 상황을 고려해 ‘최소 72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희생자 중에 고등학생이 많았는데, 상당수가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지문을 찍지 않은 상태였다. 치아 정보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 희생자들이 다니던 병원에서 기록을 가져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희생자 가족들의 바람은 달랐다. 결국 24시간 안에 신원 확인을 해야 했다. 정식 검안서(사인, 사망 일시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증명하는 문서)를 작성하기 전에 ‘가검안서’라는 이전에 없던 형식의 문서도 발급해야 했다.

정 교수는 인터뷰 도중 언론의 문제를 자주 언급했다. “초등학생 토막 살인 사건이 있었다. 밤 10시에 주검이 도착했다. 일단 부검을 하고 나왔는데, 기자들의 첫 질문이 ‘사인이 무엇인가요?’도 아니고 ‘성폭행이 있었습니까?’였다. 당시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았지만, 확인해줄 수도 없는 사안이었다. 부모가 언론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 사건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론은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 속보 경쟁 과정에서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가 나왔다.

“기다리지 않는 언론이 만든 오보”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맥없이 무너졌다. 이 사고로 502명이 숨졌다. 한국에서 발생한 단일 사건 가운데 가장 큰 인명 피해가 난 참사였다.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인재(人災)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 인재는 2018년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한겨레

다른 참사에선 어땠나.

2008년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때는 사고 다음날 국과수 희생자관리단의 본진이 투입됐다. 그때도 언론은 일방적으로 2~3일 안에 신원 확인이 된다고 보도했다. 결국 희생자 가족에게 직접 설명회를 열어 ‘신원 확인에 3주가 걸린다’고 말했다. 나중에 기록을 보니 주검을 전부 확인하는 데 22일이 걸렸다. 신원 확인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그중 하나가 죽음 이후에도 지켜져야 하는 망자의 프라이버시다. AM 자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편하고 빠르다고 해서 사망한 이의 개인사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면 신원 확인을 위한 다른 AM 자료를 찾아야 한다. 이 경우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때는 국가에 대한 실종자 가족들의 신뢰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신원 확인이 더 힘들었을 듯하다.

세월호 참사 때 결정적으로 혼선이 발생한 이유는, 초기에 발표된 사건 관련 숫자 때문이다. 대형 참사는 실종자 범위를 알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항공기 사고는 탑승자 명단이 명확해서 이른 시간 내에 실종자 수를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9·11 테러 같은 경우는 실종자 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 세월호 참사 땐 초기 탑승자 명단이 확정되지 않아 실종자 수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런 경우에는 초기에 실종자 수를 확정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실종자 수를 특정해 발표하다보니 혼선과 오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종자 수도 처음엔 302명이었다가 20여 일 지나서 304명으로 바꿔 발표했다. 국가 통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 뒤부터는 국가가 어떤 숫자를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됐다. 희생자 가족들과 제대로 교감하지도 못했다. 이런 대형 사고가 일어나면 처음에 설명회를 열었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 때도 여러 차례 요청했는데, 희생자 가족들을 못 만났다. 처음엔 가족들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지나서는 관계기관이 믿을 수 없는 대상이 됐다. 최소한의 ‘라포르’(교감)가 형성됐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가족 잃은 슬픔 조금이라도 완화하려”

어쩔 수 없는 불확실성을 인정한 채 소통하는 일이 한국 사회에선 쉽지 않다. 다른 참사 때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가 벌어진 뒤 700명 가까운 실종자 신고가 이뤄졌다. 이후 수사기관 조사를 거쳐 288명까지 줄였다. 그러던 중 전동차 내부에 있었던 주검 수를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실제 전동차에서 나온 주검은 149구 정도였다. 그래서 미확인된 포괄적 추정 주검 수를 ‘149+α’로 발표했다. 언론이 보도하는 실종자 수는 300명에 가까운데 추정 주검 수가 그 절반 수준이라며 국과수가 사건을 축소·은폐한다고 융단폭격 같은 공격을 당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허위 신고자들이 빠져나갔다. 당시 주민등록증을 태워 반쪽만 남겨놓고 실종 신고하는 등 별일이 다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숫자가 정확하다고 발표하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게 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 교수는 팽목항을 향하기 전에 꼭 들르던 곳이 있었다. 전남 진도읍에 있는 ‘진도개테마파크’였다. “소시지 하나를 사들고 거기로 가면 진돗개들이 반가워해줬다. 개들이 나를 반겨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당시 유일한 위안이었다.” 진도 주민들은 팽목항을 6개월 넘게 지킨 국과수 직원들이 현장을 떠난 뒤인 2014년 11월, 생후 2개월의 진돗개 한 마리를 사무실로 보내줬다. 그 개에게 ‘진돌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 교수는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공되지 않으니, 이 개를 통해서 치료받자”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희생자뿐 아니라 사고를 수습하는 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상처가 남는다. 아직 우리 사회는 그 상처를 보듬는 데 익숙하지 않다.

주검을 직접 확인하며 신원 확인을 했던 국과수팀도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것 같다. 치유 프로그램이 있었나.

없었다. 다른 기관도 마찬가지다. 잠수사들도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것으로 안다. 그 사람들도 강철은 아니다. 험한 장면을 보면 정신적 충격이 올 수밖에 없다. ‘재난 관리’라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야 하는 일이다. 희생자 가족과 마찬가지로 현장에 투입됐던 지원 인력도 비극을 극복하고 정상 업무로 돌아갈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고 퇴임한 점이 후배들한테 미안하다.

여러 대형 참사를 경험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여섯 살 꼬마가 장난감을 사러 갔다가 희생됐다. 오랫동안 주검을 찾지 못해 부모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친척 집으로 떠났다. 결국 주검의 일부가 발견돼 부모에게 연락했다. 부모가 급히 돌아와 주검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더라. 그 일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완화해주고 싶었다. 희생자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해 가족 품으로 돌려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삼풍백화점 참사에서 결국 30명의 신원을 못 찾았다. 신원 확인 시스템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내 소명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소중히 여겨야”

삼풍백화점 참사는 1995년에 일어났다. 이후 23여 년의 시간 동안 한국의 신원 확인 시스템은 얼마만큼 발전했나.

2004년 동남아 쓰나미 때, 여러 나라의 법의학자들이 푸껫으로 모여들었다. 자국 희생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때 유럽 국가들은 신원 확인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하더라. 우리도 처음엔 이 신원 확인 프로그램을 구입하려 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한 개를 사용하는 데 20만유로가 들었다. 너무 비싸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든 게 ‘대한민국 희생자 신원 확인 시스템’(MIM·Mass ID Manager)이다. AM 자료와 PM 자료를 넣으면 자동 매칭을 해서 신원을 확인해준다. 2013년 프로토타입(시제품)을 만들어 계속 개선하면서 쓰고 있다. 여러 참사에서 희생자들이 남긴 소중한 자료가 있어 MIM을 만들 수 있었다.

국과수 신원확인팀은 적은 인원인데 참사 현장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몫을 해냈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서구에선 상설화된 팀이 예상하기 어려운 참사에 대비해 체계적으로 준비한다. 한국은 20명 이상 인명 피해가 일어나는 대형사고가 터지면 규모에 따라 태스크포스팀인 ‘희생자관리단’(Korea DVI)을 구성한다. 상설화가 돼 있지 않으니 평소 훈련이 부족하다. 게다가 다들 일상 업무에 100% 역량을 투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빠져나가면 업무 공백이 생긴다. 남은 사람들이 업무 과부하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악순환을 해결해야 한다.

법의학자에게 주검은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돌아가신 분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없이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신원 확인과 부검 과정은 그렇게 만난 이들을 가족 품에 돌려주기 위한 대화의 과정이다. 그들 모두를 꽃과 같은 이라고 생각하며 소중하게 여겨왔다.

2월18일, 정 교수는 대구 달서구 상인동 대구도시철도공사 지하 강당을 찾았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15주기 추모식이 있던 날이다. “희생자 가족들이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해줬다.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참사 당시엔 희생자 가족들과 갈등도 많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에게 고마운 존재가 됐다. 참사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신뢰할 수 있었다면, 화해의 시간은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한국 사회에 비극 남긴 사건들

대형 재난의 목격자

정낙은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일하며 숱한 재난과 대형 사건을 목격해온 역사의 증인이다. 그가 법의관으로 참여한 주요 사건을 추려 짧게 요약했다. 모두 현대 한국 사회의 비극으로 남은 사건들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6월29일 오후 5시57분. 서울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렸다. 지상 5층, 지하 4층의 백화점이 붕괴해 502명이 숨지고 6명이 실종됐다. 한국에서 단일 사건으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대형 참사였다. 안전성을 무시한 무리한 건물 구조 변경이 비극적 참사의 원인이었다.

김해 중국 민항기 추락 2002년 4월15일 오전 11시21분. 경남 김해에 있는 돗대산 능선에 중국국제항공 129편이 추락했다. 탑승객 166명 중 129명이 숨졌다. 사고 3년 뒤 건설교통부 항공조사위원회는 사고 원인이 조종사의 조종 미숙에 있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대구지하철 참사 2003년 2월18일 오전 9시53분.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방화로 일어난 화재 참사다. 이 사고로 192명이 숨졌다. 실종자는 21명이었다. 피해 규모가 컸던 이유 중 하나는, 초동대응의 실패였다. 화재 당시 기관사는 마스터키를 뺀 뒤 대피했고, 이 때문에 전동차 문이 자동으로 닫혀 많은 승객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남아 쓰나미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의 강진으로 동남아시아 일대에 쓰나미가 밀어닥쳐 23만 명이 숨졌다. 당시 국과수 신원확인팀이 현장에 파견돼, 46개국 조사팀 중 가장 먼저 한국인 희생자 20명의 신원을 모두 확인했다.

이천 냉동창고 화재 2008년 1월7일 오전 10시45분. 경기도 이천시의 한 냉동 물류창고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40명이 숨졌다. 당시 화재는 인화물질이 가득 찬 상황에서 용접 작업을 하다 일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오룡호 침몰 2014년 12월1일, 러시아 서베링해에서 명태잡이를 하던 사조산업의 1753톤급 ‘501오룡호’가 침몰했다. 이 사고로 27명이 숨지고 26명이 실종됐다. 검찰은 선사가 자격 미달의 선원을 승선시켜 위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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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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