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사상 최대 규모 ‘선거의 해’다. 세계 70여 개국에서 전국 단위 선거가 치러지고, 인류의 절반가량이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태평양의 투발루와 유럽의 산마리노는 인구가 각각 1만1천여 명과 3만3천여 명에 그치지만,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14억 명과 2억7천만 명이나 된다. 투표를 잘해도, 잘못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2024년 지구촌 선거의 문은 방글라데시 총선(1월7일)이 연다.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이끄는 아와미연맹(AL)의 재집권이 유력한데, 제1야당인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이 일찍부터 선거용 중립내각 구성을 촉구해온 터라 선거 뒤 정국 혼란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파키스탄에서도 2월8일 총선이 치러지는데, 2018년 총선에서 31%의 득표를 올리며 집권했다가 의회의 불신임으로 축출된 뒤 부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임란 칸 전 총리가 이끄는 파키스탄정의운동당(PTI)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023년 4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이 복귀한 브라질에서 10월 치러질 지방선거는 향후 정국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야권이 승리하면, 집권 1년 반으로 접어든 룰라 대통령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 6월2일로 예정된 멕시코 대선에선 퇴임을 앞둔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이끄는 진보 성향의 ‘국가재건운동’이 재집권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하는 같은 당 소속인 멕시코시티 시장 출신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후보가 당선된다면 멕시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될 터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3월에 대선이 치러질 예정이다. 6월6~9일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에서 치러지는 유럽의회 선거는 향후 미-중 양대 강국과 유럽이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2024년 안에 총선을 치러야 하는 영국에선 집권 보수당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한 터라, 14년여 만에 노동당 재집권 가능성이 점쳐진다. 11월5일 대통령과 상원의원의 3분의 1, 하원의원 전원을 선출하는 미국 선거는 2024년 지구촌 최대 관심사다. 전세계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세계의 이목이 대만에 집중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대만 총통 선거는 1월13일 치러진다. 친독립 성향의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 양안(중국-대만)관계는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침체 심화 속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부쩍 ‘조국통일’을 강조하는 터라, 자칫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반면 친중국 성향의 국민당이 집권한다면 양안관계에 훈풍이 불 수 있다. 국민당 집권기인 1992년 중국과 대만 쪽은 이른바 ‘92공식(공통인식)’을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합의한 바 있다. 이럴 경우 ‘대만 방어’를 내세워 중국과 날을 세워온 미국의 정책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과 맞물린다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지나친 ‘대륙 친화’는 대만 내부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부를 가능성도 커 보인다. 지난 30년여 대만인의 ‘정체성’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92공식’이 발표된 1992년 대만 국립정치대학 선거연구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자신을 ‘대만인’으로 인식한다는 응답은 전체의 17.6%에 그쳤다. ‘중국인’이란 답변은 25.5%였다. ‘대만인이자 중국인’이라고 답한 사람이 46.4%로 가장 많았다. 2023년 6월 실시한 같은 조사 결과는 전혀 달랐다. ‘대만인’이란 응답이 62.8%까지 치솟았다. 31년 만에 무려 45.2%포인트나 높아진 게다. ‘대만인이자 중국인’이란 답변은 15.9%포인트 떨어진 30.5%를 기록했고, ‘중국인’이란 답변은 23%포인트 떨어진 2.5%로 급락했다. 대만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됐다.
정체성 변화는 대중국 관계에 대한 입장 변화로 이어졌다. 대만정치대학이 관련 조사를 처음 실시한 1994년 응답자의 38.5%는 ‘현상 유지 속 추후 결정’이라고 답했다. 2023년 6월 조사에선 같은 응답이 28.6%로 떨어졌다. 반면 ‘영원한 현상 유지’를 원한다는 답변은 같은 기간 9.8%에서 32.1%로 올라섰다. 또 ‘현상유지 속 독립 추진’을 원한다는 답변은 8.0%에서 21.4%까지 높아졌다. ‘가능한 한 빠른 독립’을 원한다는 의견도 3.1%에서 4.5%로 높아졌다. 반면 ‘현상유지 속 통일 추진’을 원한다는 답변은 15.6%에서 5.8%까지 떨어졌다. ‘가능한 한 빠른 통일’을 원한다는 의견도 4.4%에서 1.6%로 줄었다.
해석해보자. ‘현상 유지’를 원하는 여론은 48.3%에서 60.7%로 높아졌다. ‘독립 추진’ 여론도 11.1%에서 25.9%로 두배 이상 뛰었다. 같은 기간 ‘통일’을 원한다는 여론은 20.0%에서 7.4%까지 떨어졌다.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현상을 유지하거나 아예 독립국가를 선포하자는 여론이 중국 본토와 ‘통일하자’는 주장을 10배 이상 압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만 사회의 달라진 현실을 체감할 수 있는 사례를 보자.
“중국 고전 교육 축소 문제가 대만 대선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중화권 유력매체인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2023년 12월30일 이렇게 보도했다. 2019년 차이잉원 총통 정부가 내놓은 개정 고등학교 교과과정 기준에서 기존에 ‘필수 이수’ 대상이었던 중국 고전 30편 가운데 절반가량을 덜어낸 조치가 선거를 앞두고 정치 쟁점화한 탓이다.
야권에선 “세대갈등을 부추기기 위한 정권 차원의 ‘탈중국화’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제3당인 민중당의 커원저 후보는 12월8일 선거유세에서 “나도 학창시절 당송시대 시를 배웠다. 중국과 대만은 인종·역사·종교·문화를 공유한다. 정치체제와 삶의 방식이 다르지만, 양쪽이 경쟁하더라도 연계의 끈을 아예 끊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제1야당인 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는 이튿날 유세에서 “중국 고전을 통해 충성심과 효행, 선행, 공감능력을 배울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청소년도 중국 고전을 배운다”며 “어떤 정치적 이념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차이잉원 정부에서 부총통(부통령)을 지낸 집권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는 “교과서 집필의 참고 자료로 제시한 것일 뿐, 일말의 정치적 노림수도 없다”고 말했다. 대만 교육부 쪽도 자료를 내어 “중국 고전과 함께 현대 대만문학과 외국문학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를 함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대만 사회에서 ‘중국’이란 화두가 가진 폭발력을 짐작게 한다.
선거 판세는 어떨까? 선거를 열흘 앞둔 1월2일 자정부터 대만에선 선거 관련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됐다. 1월2일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라이칭더 후보의 우세를 가리킨다. 현지매체 <타이완뉴스>가 14개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한 결과, 라이 후보는 35.3%의 지지를 얻어 허우 후보(28.7%)와 커 후보(24%)를 앞섰다. 대선 기간 무려 101차례나 여론조사를 한 인터넷매체 <메이리다오 전자보>는 같은 날 최신 지지율을 △라이 후보 39.6% △허우 후보 28.5% △커 후보 18.9%라고 보도했다.
변수가 없는 건 아니다. 대만 최고 권위의 대만민의기금회(TPOF)가 2023년 12월29일 발표한 최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당 지지도에서 국민당(28.5%)이 민진당(28.3%)을 오차범위 안에서 앞섰다. 민중당은 18.2%로 3위를 기록했다. 임기 말치곤 나쁘지 않지만, 차이 총통의 직무 수행 지지율도 찬성(41.5%)보다 반대(48.2%)가 높았다. 특히 ‘정권 교체’에 대한 의견을 묻는 말에 59.4%가 ‘기대한다’고 답한 반면, ‘기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4.1%에 그쳤다. 응답자의 86.6%는 투표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막판 판세에 따라 라이-허우 후보 간 1%포인트 안팎의 접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대 변수는 2020년 선거 당시 ‘집에 가서 투표하자’ 운동을 벌이며 차이 총통의 압도적 지지기반 구실을 했던 청년층이다. 대만 경제의 부흥을 주도하는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통신 분야를 제외하고는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싱가포르국립대학이 2023년 9월 낸 자료를 보면, 대만의 청년층 실업률은 11.2%로 평균 실업률(3.5%)을 3배 이상 웃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만의 젊은 세대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인권·생태·환경 등 인류 보편의 문제에 민감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도 높다.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의 열기 속에 치러진 2020년 선거 때 대만 청년은 ‘중국=경제성장’만 강조하는 국민당을 철저히 외면했다. ‘중국 문제’만 도드라진 이번 선거에서 대만 청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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