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북쪽이 발신하는 신호가 심상찮다. <노동신문>은 2023년 12월31일치 1면에 실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12월26~30일)의 확대회의에 관한 보도’에서 당 총비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 분단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발언이다. ‘헤어질 결심’을 밝힌 북쪽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남북관계에는 크게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잠시 총성은 멈췄지만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적대적 두 국가’다. 둘째, 1991년 9월17일 동시 가입한 유엔의 두 회원국이다. 셋째, 1991년 12월10~13일 열린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 본회담 결과 체결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기본합의서)가 규정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다. 김 위원장은 이 가운데 첫 번째 측면으로 남북관계가 “완전히 고착됐다”고 못박았다.
“한 혈육, 한 형제, 한 민족의 따뜻한 정을 더해준 남녘 동포들에게 감사한다. (…)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된다면 하나의 핏줄, 하나의 언어, 하나의 역사, 하나의 문화를 가진 북과 남은 하나가 돼 민족 만대에 끝없는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김 위원장은 2018년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판문점선언을 서명·발표한 뒤 이렇게 말했다. 지난 5년8개월여 정세가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적대적 두 국가’란 규정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노동신문>은 김 위원장이 “불신과 대결만을 거듭해온 쓰라린 북남 관계사를 냉철하게 분석한 데 입각해, 대남 부문에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할 데 대한 노선”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먼저 정세 인식이다. 김 위원장은 작금의 한반도 정세를 “통제 불능의 위기상황이 항시적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특히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그 어떤 사소한 우발적 요인에 의해서도 물리적 격돌이 발생하고 확전될 수 있다”고 봤다. 또 현재 한반도에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가 병존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이 “갑작(돌연) 변이와 같은 우연적 현상이 아니며 북남 관계사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필연’이란 표현이 눈에 걸린다.
기존 대남정책에 대한 평가가 이어질 차례다. 김 위원장은 “반세기를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가 내놓은 조국통일 사상과 노선, 방침들은 언제나 가장 정당하고 합리적이고 공명정대한 것”이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인이 뭘까? 김 위원장은 역대 남쪽 정부가 추진한 대북·통일정책의 공통점을 ‘정권붕괴’와 ‘흡수통일’로 꼽고, “(남쪽 정부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했다.
또 김 위원장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에 기초한 우리의 조국통일 노선과 극명하게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며 “(남쪽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고 규정했다. 그간의 대남정책을 사실상 ‘실패’로 규정한 셈이다. 그는 “(남쪽과) 통일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결론은 뭔가? 김 위원장은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북남 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입장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절박한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실을 냉철하게 보고 인정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 부문의 기구들을 정리, 개편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며 근본적으로 투쟁원칙과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에 걸맞게 당-정 기구를 바꾸는 후속조처가 이뤄질 것임을 예고한 게다.
북쪽의 ‘노선 변경’은 어느 정도 예견돼왔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막을 내린 데 이어, 같은 해 6월 판문점 3자 정상회동마저 성과 없이 끝난 직후부터 북은 남쪽과 ‘거리 두기’를 노골화했다. 2020년 6월 대북 전단 살포를 문제 삼아 북쪽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무단 폭파한 것은 남북관계 단절의 상징이었다.
2023년 들어선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었다. 남북관계 관련 부서가 아닌 외무성이 나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불허 결정을 발표(7월1일)한 것은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다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혔다. 7월10일과 11일 주한미군 정찰기의 북쪽 배타적경제구역(EEZ) 상공 비행에 대해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내놓은 비난 담화에서 남쪽을 ‘대한민국’으로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구갑우 북학대학원대 교수는 “북쪽은 2017년 11월 말 이른바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 직후부터, 특히 2021년 1월 8차 당대회 이후 부쩍 국가·국기·국화·국조 등 국가적 상징물을 앞세워 기존의 ‘우리 민족끼리’ 대신 ‘우리 국가 제일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조해왔다”며 “그동안 진행돼온 내부 논의를 총정리해 ‘적대적 두 국가 체제’란 새로운 노선을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북한발 남북관계의 ‘근본적 전환’이 본격화했다는 말이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은 “북쪽이 ‘국가 담론’을 들고나온 것은 남북관계 차원을 넘어 큰 틀에서 달라진 북의 외교·안보 전략 차원에서 봐야 한다. ‘하노이 노딜’ 이후 북·중·러 삼각관계 강화 속에 북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대남정책의 비중과 역할이 줄어든 게 현실이다. ‘두 국가론’은 정세 악화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달라지는 건 없다. 중요한 건 전쟁과 평화다. 군사적 충돌을 막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갈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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