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가 돌아왔다. 브라질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7)가 연임(2003~2010년)을 마치고 정계 일선에서 물러난 지 12년 만에 다시 대통령이 됐다. 2022년 10월30일(현지시각) 대선 결선투표에서 룰라 전 대통령(노동자당)이 득표율 50.87%로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자유당)의 득표율 49.13%에 앞서 당선했다고 브라질 최고 선거법원이 공식 발표했다. 1.74%포인트 간발의 차이였다.
룰라는 퇴임하고 8년이나 지난 2018년에 대통령 재임 시절 ‘뇌물 수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불명예 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뜨거운 환호와 기대 속에 보란 듯이 사법적 복권에 이어 정치적 재기까지 성공했다. 항소심에서 1심보다 무거운 징역 12년에 피선거권 박탈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대법원의 하급심 ‘무효’ 결정으로 580일 만에 풀려난 지 3년 만이다. 룰라는 1891년 브라질이 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이래 131년 만에 최초의 3선 대통령이자 최고령 대통령 당선자라는 기록을 보탰다.
10월30일 저녁 룰라 대통령 당선자는 승리 연설에서 “오늘 우리는 세계에 ‘브라질이 돌아왔다’고, ‘브라질이 따돌림받는 신세로 전락할 수는 없는 큰 나라’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 국가의 신뢰와 예측 가능성과 안정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굶주림과 기후변화에 맞선 싸움에 다시 참여할 준비가 돼 있으며, 특히 아마존 열대우림과 생태계를 보호하겠다”고 했다. 극우 성향의 군인 출신 전임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브라질의 트럼프’를 자임하며 아마존 막개발을 허용하고 혐오와 분열의 정치를 펴다가 국제사회의 냉대를 받은 것을 바로잡고 새로운 발전 모델을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룰라는 또 “우리는 브라질을 원자재와 희소자원 수출국으로만 여기는 무역협정에는 관심이 없다. 지식경제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하고 녹색경제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남미 위성방송 <텔레수르>는 “룰라 대통령 당선자가 새로운 기준으로 미국, 유럽연합과의 관계 회복을 말한 것”이라고 전했다.
2023년 새해 첫날 출범하는 룰라 정부는 최근 몇 년 새 라틴아메리카를 휩쓰는 ‘핑크 타이드’(분홍 물결·좌파 정부 집권)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북미에 있지만 라틴아메리카권인 멕시코(2018년)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2019년), 볼리비아(2020년), 페루(2021년), 칠레(2021년), 콜롬비아(2022년) 등 중남미 주요국의 민심이 잇따라 좌파 정부를 선택한 흐름에 브라질도 가세했다. 브라질은 국토 면적 세계 5위, 인구 7위, 경제규모 12위의 대국이자 자원 부국이다. 그러나 극심한 소득 불평등 탓에 2억1500만 명 인구의 30%(약 6300만 명)가 월 소득 497헤알(약 13만7천원) 이하의 빈민층이다.
룰라의 대통령 복귀는 보우소나루와 기득권 세력의 동맹 집권 4년 새 브라질에서 더욱 깊어진 분열과 경제 양극화,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에 크게 실망한 브라질 유권자가 변화의 열망을 표현한 결과로 풀이된다. 룰라는 앞서 집권기에 브라질의 빈곤율과 영아사망률을 크게 낮추고 빈곤층 교육을 확대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보우소나루 집권 4년 동안에는 코로나19 방역 실패와 신자유주의 정책 확대로 실업률과 물가가 치솟고 빈부격차는 다시 벌어졌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투표소에서 룰라에게 표를 준 도서관 사서 스테파니(30)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룰라가 모든 문제의 해답은 아니지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룰라는 선거운동 중 자신의 비전을 담은 ‘내일의 브라질을 위한 헌장’을 발표했다. 헌장은 “새 정부의 우선적 정책은 3300만 명 국민을 굶주림으로부터, 그리고 1억 명 넘는 국민을 빈곤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빠짐없이 존엄한 삶을 누릴 때만 참다운 것이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재정 건전성, 사회적 책임, 지속가능한 발전의 조화는 가능하며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2010년 룰라는 90% 안팎의 경이적인 지지율로 퇴임하면서 “왜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 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모든 정책의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2년 뒤 다시 중책을 맡게 된 룰라는 여전히 그런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룰라 대통령 당선자가 부패 혐의로 감옥살이까지 했다가 극적으로 명예를 되찾고 3선 대통령이 된 것과 대조적으로,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앞날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우소나루는 재임 중 최소 237차례나 자신의 정부는 “부패 제로”라고 공언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취임 첫해인 2019년 12월 보우소나루가 이듬해 정부 예산안에 연방의회 의원이 쓸 수 있는 ‘비밀 예산’을 끼워넣어 통과시킨 사실이 이번 선거 기간 중 텔레비전 생방송 토론에서 재론되기도 했다. 브라질 국제투명성기구의 브루누 브란당 사무총장은 “국가 예산으로 의원들을 매수하는 ‘부패의 제도화’”라고 비난했다.
10월30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익명을 요구한 보우소나루 정부의 고위 관리 2명의 말을 인용해, 보우소나루가 퇴임한 뒤에는 면책특권이 사라져 (부패 혐의로) 수감될 수 있다는 전망에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우소나루와 그의 측근들이 공금 횡령, 정부 직원 임금 착복, 코로나19 대응 실패 등을 포함한 여러 혐의에 대한 조사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학의 한 교수는 “브라질에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검찰총장만, 기소는 대법원만 할 수 있다”며 “그동안 검찰총장이 보우소나루의 방패가 됐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보우소나루는 대선 결선투표에서 룰라의 당선이 공표된 지 45시간이 지나도록 의례적인 ‘축하’는커녕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는 11월1일 저녁에야 2분가량 짧은 연설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말로 에둘러 정권 이양의 뜻을 밝혔지만, 지금껏 대선 패배를 명확히 인정한 적은 없다. 그는 선거 전부터 자신의 당선에도 쓰인 전자개표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수차례 언급하며 선거 불복 가능성을 내비쳤다. 강성 지지자들은 개표 뒤 보우소나루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군대여, 브라질을 구하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극성 지지자들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대선 당일부터 사흘간이나 대형트럭으로 전국의 주요 고속도로 300여 곳을 점거해 통행을 막았고 일부는 한때 상파울루공항을 점거했다. 급기야 11월1일 브라질 대법원이 “연방고속도로경찰(PRF)은 불법적인 도로 봉쇄를 중단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즉각 시행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대법원은 트럭을 도로 봉쇄에 사용하는 운전자에게는 시간당 10만헤알(약 2760만원)의 벌금을 매기고, 연방고속도로경찰이 법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최고책임자도 같은 금액의 벌금뿐 아니라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방고속도로경찰은 10월30일 대선 결선투표일에도 룰라 지지세가 강한 브라질 북동부의 주요 도로에서 유권자를 태운 버스의 통행을 막아 세우는 등 노골적인 선거 방해 행위를 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룰라 대통령 당선자의 앞길이 장밋빛은 아니다. 무엇보다 정치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다. 대선과 의회 총선, 지자체 선거를 함께 치른 이번 선거에서 브라질은 두 쪽으로 완전히 갈렸다. 대선 결선에서 맞붙은 두 후보의 득표율만 박빙인 게 아니었다. 의회 전체 513석 중 보우소나루 소속 자유당(99석)을 포함해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우파 정당들이 모두 247석(48%)으로 원내 최대 세력을 차지했다.
반면 룰라의 노동자당과 좌파 정당 연합은 124석(24%)에 그쳤다. 27개 주의 지방선거에서도 브라질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거주하는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미나스제라이스 등 14곳에서 룰라에게 반대하는 우파 정당들이 주지사에 당선했다. 11월1일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의 마우리시우 산토루 교수는 “지난 4년 동안 브라질은 훨씬 보수화했고, 보우소나루에 대한 지지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룰라는 강력하고 잘 조직된 우파 야당 세력과 타협 임기를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지금은 룰라 대통령이 정책 방향을 두고 중도좌파 성향의 브라질사회민주당(PSDB·사민당)을 주로 상대해야 했던 때와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고 짚었다. 룰라는 이번 선거운동 중 “사민당이 우리의 상대였을 때는 좋았다. 그땐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진보 성향 민간 싱크탱크 브라질 분석·계획 센터의 마티아스 알렌카스트로 연구원은 “의회에서 전통적인 중도우파와 별 이념이 없는 기회주의 정당들의 블록인 ‘센트랑’(중도대연합)이 유튜브와 트위터를 활용하는 인플루언서(영향력 있는 사람)로 대체되고 있다. 그들의 문화는 자기과시와 지속적 대립이다”라고 지적했다.
선거 기간에 표출된 극심한 정치 갈등과 깊어진 분열, 경제 불평등 완화와 국민통합도 룰라가 풀어가야 할 어려운 과제다. 10월30일 당선이 확정된 직후 연설에서 룰라는 “두 개의 브라질은 없다. 우리는 하나의 나라, 하나의 국민, 위대한 브라질 국민이다. 증오로 물든 시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국민 화합을 호소했다.
국제사회는 룰라의 재등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0월30일 저녁 룰라 후보가 당선된 직후 “자유롭고 공정하고 믿을 만한 선거를 거쳐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며 “앞으로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양국 사이의 협력을 계속해나가기 위해 함께 일하게 될 것을 고대한다”는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다음날에는 바이든 대통령과 룰라 당선자가 전화 통화로 두 나라의 강력한 연대를 재확인했다고 미국 백악관이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식량안보에서 무역,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룰라 당선자와 함께 일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브라질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도 외교부 성명에서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브라질이 새로운 성과를 거두길 바란다. (…) 양국의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영국·프랑스·독일·스페인 등 서방 주요국과 아르헨티나·멕시코·베네수엘라·칠레·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권 국가의 정상들도 룰라의 당선을 축하하고 우호·협력을 기대하는 메시지를 내놨다.
노르웨이는 브라질에 ‘아마존 기금’ 지원을 재개할 뜻을 밝혔다. 노르웨이는 아마존 열대우림 보호를 위해 2008년 창설돼 국제사회의 기부로 조성된 아마존 기금의 최대 공여국이었다. 그러나 2019년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한 뒤 ‘경제 주권’을 내세운 아마존 벌목과 삼림 황폐가 심각해지자 노르웨이 등 기금 공여국들이 기부를 끊으면서 기금 운용이 중단됐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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