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1848년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서문에 쓴 첫 문장이다. 지금껏 수없이 인용된 까닭에 식상하지만 또 한번 패러디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유령이.’ 170여 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낡은 유럽의 모든 (기득권) 세력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프랑스·이탈리아·스웨덴·오스트리아·핀란드·헝가리·스페인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총선에서 잇달아 극우 세력이 급부상하거나 약진하며 유럽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비주류로 존속해온 극우 정당들이 점차 주류 정치세력으로 편입하거나 집권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유럽에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넘게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이 경합하며 집권한 양당 체제가 굳어졌다. 여기에는 20세기 전반 독일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 등 극우 세력이 선거로 권력을 쥔 뒤 전 유럽을 전쟁과 학살의 참화로 몰아간 전례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경계와 다짐이 녹아 있다.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무역과 복지의 확대, 이주자 환대, 경제통합을 넘어 정치통합까지 지향하는 유럽연합(EU) 결성 등은 그 구체적 표현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유럽에서 급부상한 극우 포퓰리즘은 그런 가치 대부분을 정면으로 부인하거나 무시한다. 2022년 들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들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유럽연합의 제재에도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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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25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극우 정당 이탈리아형제들(FdI)이 주축인 우파 연합이 유효투표의 43.8%를 얻어 승리했다. 네오파시즘(신파시즘)을 공공연히 표방하는 이탈리아형제들은 단일 정당으로도 1위(득표율 26%)에 올랐다. 2018년 총선 득표율이 겨우 4%를 넘긴 군소정당에서 불과 4년 만에 수권 정당이 됐다. 중도좌파 민주당이 2위를 차지한 것을 빼고는 오성운동, 동맹, 전진 이탈리아 등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득표율 상위를 차지했다. 코로나19 장기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경기침체와 최악의 인플레이션, 이에 편승한 반이민 정서와 가족주의 같은 보수적 가치로 표심을 파고든 게 주효했다. 낙태 금지, 정부 지출 확대, 대규모 감세도 공약했다.
이탈리아형제들의 조르자 멜로니(45) 대표는 총선 승리가 확정된 뒤 “이탈리아 국민은 이탈리아형제들이 이끄는 우파 정부를 선호한다는 명백한 메시지를 보냈다”며 “모두를 위한 정치를 하겠다. 국민의 신뢰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총리 후보 1순위인 멜로니는 곧바로 정부 구성 작업에 착수했다. 그가 총리직을 맡으면,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1922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이후 꼭 100년 만에 집권한 첫 극우 성향 지도자가 된다.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이탈리아 총선 다음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멜로니는 (집권이라는) 진정한 꿈을 이뤘지만, 유럽연합에 그것은 악몽”이라며 “멜로니의 열렬한 민족주의가 유럽연합을 골치 아프게 한다”고 꼬집었다. 이탈리아는 유럽연합의 3대 경제대국이자 유럽연합 창립국 중 하나다. 그러나 평소 멜로니는 “이탈리아가 유럽의 부유한 강대국들의 압제에 신음한다”며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 또는 유럽연합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홍역을 치른 유럽연합은 또다시 ‘트로이의 목마’를 만났다.
멜로니는 15살이던 1992년 이탈리아사회운동(MSI)의 청년조직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사회운동은 1921년 무솔리니가 창당한 국가파시스트당의 직계 후신이다. 정당 상징인 삼색 불꽃 로고와 핵심 표어인 ‘신, 가족, 조국’도 국가파시스트당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멜로니는 이번 선거운동에서 이민자, 외국인, 성소수자, 유럽 통합 등에 노골적인 반감과 배타성을 드러냈다.
앞서 2022년 6월 멜로니는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의 집회에서 한 찬조연설에서 “자연스러운 가족 찬성, 엘지비티(LGBT·성소수자) 반대, 성적 정체성 예스, 젠더 이념 반대… 이슬람 폭력 반대, 국경안보 찬성, 대량 이민 반대… 유럽연합 관료들 반대!”라는 선명한 구호로 열광적 지지를 끌어냈다. 이탈리아는 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대량 발생한 난민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밀려드는 최전선으로 10년 넘게 몸살을 앓아왔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가 주도한 난민 수용 정책을 두고 유럽연합과 갈등을 빚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연합의 러시아 대응 연대에도 물음표가 생겼다. 멜로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가 유럽의 가치를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우파 연정에 참여할 전진이탈리아(FI)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푸틴과 친분이 깊다.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도 친러 성향이 뚜렷하다. 이탈리아 차기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불거진 에너지 위기 국면을 돌파하려 친러시아, 정확히는 친푸틴 정책을 펴리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테른>은 이탈리아 총선 직전에 멜로니를 표지이야기로 다루면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란 제목을 달았다. 부제에는 ‘포스트 파시스트인 멜로니가 푸틴의 친구들 도움으로 총선 승리 예상돼… 이는 유럽에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썼다. 2015년 1월 그리스 총선에서 압승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를 두고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고 한 별칭을 멜로니가 이어받았다.
멜로니는 헝가리의 극우 성향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의 친분도 과시한다. 멜로니가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 오르반은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유럽의 난제에 대한 공통의 비전과 접근 방식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하다. 헝가리-이탈리아 우호, 만세!”라며 뜨겁게 반겼다. 앞서 2022년 7월 오르반 총리는 “우리는 다인종 국가가 아니며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유럽인과 비유럽인이 섞인 나라는 더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외국인 이주자와 난민, 집시를 겨냥한 말이었다.
오르반은 유럽연합이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으로 자국에 할당한 1300명의 난민 수용 요청을 거부하면서 “무슬림 침략자들은 목숨을 돌보지 않는다”고 했다. 2022년 9월 유럽의회는 “헝가리가 더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볼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유럽의회는 “헝가리가 유럽연합의 민주적 규범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선거독재 하이브리드 정권”이라고까지 비난했다.
2022년 9월11일 스웨덴 총선에선 스웨덴민주당을 포함한 우파연합이 전체 349석 중 과반 기준을 1석 넘긴 176석을 확보했다. 기존 집권당인 사회민주당 중심의 중도좌파연합(173석)을 박빙의 차이로 따돌리고 승리해 새 정부 구성 절차를 진행 중이다. 특히 극우 성향 스웨덴민주당은 중도좌파 집권당이던 사회민주당(107석) 다음으로 많은 73석을 차지하며 단숨에 원내 제2당이 됐다. 사회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은 스웨덴에서 극우 정당의 집권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다.
스웨덴민주당은 1988년 네오나치(신나치즘) 운동에 뿌리를 대고 탄생했다. 2010년 총선에서 5.7% 득표율로 의회에 입성해 2014년 12.9%, 2018년 17.5%로 세를 불렸고, 2022년 총선에선 20.6%를 기록하며 집권을 넘보게 됐다. 스웨덴민주당도 난민 제로, 이슬람 반대, 이민자 수용 반대, 유럽연합 반대, 배타적 애국주의를 내세워 중도우파부터 극우까지 ‘빅텐트’를 치는 전략으로 보수표를 끌어모았다.
임미 오케손(43) 스웨덴민주당 대표는 선거 유세에서 “스웨덴을 최우선에 둬야 할 때”라거나 “다시 스웨덴을 위대하게 만들자”고 호소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공화당) 후보가 외쳤던 슬로건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MAGA)와 판박이다. 그는 스웨덴 남단 말뫼 인근 소도시 출신으로, 10대 때 스웨덴민주당에 입당해 26살에 당대표에 올랐다. 말뫼는 이민자 유입이 많은 만큼 반이민 정서도 강한 지역이다.
선거에서 패배한 좌파 진영뿐 아니라 우파연합에 참여한 4개 정당 중 스웨덴민주당을 뺀 중도당·기독교민주당·자유당도 오케손 스웨덴민주당 대표가 총리까지 꿰차는 것에는 거부감을 보인다. 9월19일 스웨덴 의회는 각 정당 지도부와의 논의를 거쳐 중도당의 울프 크리스테르손 대표에게 차기 정부를 구성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우파연합 내부에선 스웨덴민주당을 연립정부에 포함할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린다. 이 때문에 실제로 차기 정부가 출범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과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도 극우 포퓰리즘의 기세가 거듭 확인됐다. 2022년 6월 총선에서 유럽 극우의 선봉인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이 정통 보수정당 공화당을 제치고 우파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국민연합은 전체 577석 중 89석을 차지해, 집권 중도연합과 제1야당 좌파연합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꼭 10년 전인 2012년 총선 때 국민전선(FN, 당시 정당명)이 처음 2석을 확보해 원내 진출에 성공하고, 2017년 총선에서 8석을 얻은 것에 견주면 ‘급성장’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극적인 성취다.
마린 르펜의 선전은 총선 두 달 전에 치른 4월 대선에서 더 도드라졌다. 과반 당선자가 나오지 않은 1차 투표에서 르펜(23.2%)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27.9%)을 바짝 쫓아 2위를 기록했다. 두 후보만 맞붙은 결선투표에서 마크롱(58.5%) 대 르펜(41.5%)의 표차가 좀더 벌어졌지만,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극우 정당의 잠재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정치사를 지탱해온 양대 정당인 사회당과 공화당 후보들은 2017년 대선에 이어 2022년에도 한 자릿수 득표율에 그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며 컷오프에서 탈락했다.
독일도 극우 포퓰리즘의 극단을 보여준 나치즘의 꺼진 불씨가 되살아날까봐 신경이 곤두서 있다. 2021년 9월 총선에서 네오나치와 민족주의 우파가 뒤섞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이 전체 735석 중 83석을 차지해 5위에 올랐다. 2017년 총선의 94석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독일을위한대안은 2013년 창당해, 이듬해 유럽의회에 의석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난민 수용 반대, 외국인 혐오, 친러시아 성향, 성소수자 반대 등을 주장한다. 그래도 아직 독일은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 중도우파 기민/기사련의 양당 체제가 굳건하다. 2021년 총선에서 녹색당이 3위를 차지해 사민당 연정에 참여할 정도로 비교적 건강한 정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 극우 정치세력은 포퓰리즘과 겹친다. 애초 포퓰리즘은 엘리트 관료주의 지배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나왔다.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사상이나 활동’을 통칭한다. 정치적 스펙트럼도 좌에서 우까지 폭이 넓다.남미에선 좌파 집권당, 유럽에선 중도 좌·우파 양당 체제에 도전하는 우파 정당들이 주로 거명된다.
극우 포퓰리즘 연구 권위자인 카스 무데는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두 진영,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보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중심이 얇다는 것은 포퓰리즘이 정교한 이론이나 이념 체계가 아니라 주로는 대중의 정서와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적 전략 또는 현상이라는 뜻이다.(카스 무데, <포퓰리즘>, 2017)
근대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대체로 우익 성향이었다. 그들은 엘리트가 공산주의자, 복지 수혜자, 이민자를 지나치게 신경 쓴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유럽에서 ‘포퓰리스트’라는 용어는 좌파·중도 성향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경멸의 의미로 쓰는 말이 됐다.(존 주디스, <포퓰리즘의 세계화>, 2016)
포퓰리즘이 그 자체로 위험한 것은 아니다. 모든 정치인은 대중의 요구를 파악하고 지지를 얻기 위해 일정 정도 포퓰리즘 성향을 갖는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우리’ 안에서 ‘타자’를 구별하고 배제하며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집단 이념으로 나타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재 유럽에서 반이민, 반이슬람, 반유럽연합(유럽 회의주의)을 내세운 극우 포퓰리즘이 그렇다.
최근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2015~2020년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즘의 1차 격랑이 있었는데 유럽연합 지도부가 그들의 성공을 무시했다. 이제 명백하게 2차 격랑이 시작돼 유럽연합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2023년에는 스페인과 핀란드가 총선을 치른다. 스페인의 극우 정당 복스는 2019년 4월과 11월 두 차례 총선에서 연거푸 3위를 차지하며 처음 의회 의석을 확보했다. 복스는 이탈리아 극우 정당의 돌풍이 자국에도 영향을 미치길 기대한다. 핀란드에서도 극우 포퓰리즘 성향의 핀란드인당이 2014년과 2019년 총선에서 연거푸 2위를 차지했다.
2022년 9월18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사설에서 “각국의 투표는 후보의 인성, 특정한 사건, 시기, 지역 문제, 정당 충성도, 선거제도 등의 영향을 받으며 모든 선거는 해당 국가(지역)마다 다르지만,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의 득세)은 모든 민주주의자와 관련된 범유럽의 문제”라고 짚었다. 유럽연합의 결속력, 나아가 보편적 인권과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조일준 선임기자 i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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