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학교의 마지막 날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갈 곳이 없어요. 거긴 학교가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마세요. 아무리 장벽이 높아도 하늘은 더 높습니다. 언젠가는 세계가 이 사정을 알고 도와줄 거예요. 남이 해주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단결해야 합니다.”
2002년 개봉한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영화 <칸다하르> 초반의 한 장면이다. 난민으로 살다가 미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란 국경에서 아프간으로 넘어가는 여학생들은 남자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인형 속에 숨겨진 지뢰를 피하는 훈련을 받는다. 아프간 내전을 피해 캐나다로 떠나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주인공 나파스는 조국에 홀로 남아 꿈을 잃고 “개기일식 때 목숨을 버리겠다”는 여동생의 전갈을 받는다. 아프간 남부의 칸다하르로 향하는 여정에서 나파스는 “이곳(아프간) 여성들은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이름도 이미지도 없다.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까”라고 자신의 녹음기에 기록을 남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아프간 여성의 현실은 어떠한가? 왜 여성들은 피란을 가거나 다시 집에 머물러야 하는가? 아프간 여성들에게 하늘만큼 높아 보이는 ‘장벽’은 왜 다시 드리워지고 있는가? 지난 20년간 그들이 기다렸던 ‘세계’는 어디에 있었을까?
2001년 9월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최악의 테러가 벌어져 전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라덴이 숨어 있다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 소식만큼이나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성들의 모습이다. 아프간 여성들은 억압받고 고통받는 무슬림 여성의 전형이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정당성이 부여됐다.
당시 미국 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인류학자 릴라 아부루고드는 “미국의 아프간 침공이 아프간 여성의 해방이나 구조라는 명분을 내세운다”며 비판했다. 아부루고드는 부르카를 입은 무슬림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그들의 베일을 벗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과 연대하고 사안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 전쟁,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등장으로 무슬림은 ‘테러리스트’ ‘야만적인’ ‘비문명적인’ 등 다양한 재현과 타자화의 대상이 됐다. 히잡 또는 부르카는 무슬림의 전근대성을 대표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적 이미지로만 남았다. 히잡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결에 대한 이해는 사라졌다.
아프간 문제는 단순히 부르카의 문제가 아니다. 서구 열강이 일으킨 전쟁과 침략의 역사, 끊임없던 내전 그리고 ‘이슬람’을 내세운 가부장적인 부족주의로 인한 내부 분열 등 아프간의 역사는 늘 혼란 속에 존재했다. 이 소용돌이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아프간의 여성과 아이들이다.
부르카를 통해 본 세상, 세상이 보는 부르카 속 사람아프간 여성은 때로 강압에 의해, 때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르카를 쓴다. 부르카 안에서 조각으로 나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마음의 부르카’를 쓰고 촘촘하고 작은 구멍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아프간의 여성과 아이들을 억압받고 불쌍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을 불안하고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아프간 복귀 이후,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샤리아 율법에 따라 우리는 여성에게 일을 허용할 것이다. 여성은 사회의 중요 요소이며, 우리는 그들을 존중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여성은 적극적인 역할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지에 대한 법적 해석은 너무나 유동적이라, 샤리아 율법에 따라 아프간 여성의 인권과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지는 알 수 없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샤리아 율법이 도입된 뒤 40년 넘게 저항하는 이란 여성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아프간 여성들의 미래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탈레반이 오직 ‘신’(알라)의 이름으로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외침을 주장하며 강제로 여성들에게 부르카를 씌운다면, 그 행위는 진정한 이슬람으로서 의미를 잃게 된다.
지난 20년간 아프간 여성들은 꿈을 꿀 수 있었다. 교육받고 직장에서 일하게 됐고, 자신의 시를 짓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지난 20년은, 적어도 여성과 아이에게는 잠시나마 전쟁의 상흔을 조금씩 치유하고 자기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대부분 여성 제작진과 진행자로 이뤄진 ‘ZAN TV’(여성 TV)이다. 하지만 “만약 탈레반이 다시 온다면 나는 맞서 싸울 거예요”라고 용감하게 외치던 20살의 젊은 여성 방송인은 지금도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프간 여성들은 이 두려움의 상황에서도 해시태그로, 영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전한다. “탈레반은 20년 전과 변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우리는 20년 전의 아프간 여성이 아니에요. 아프간 여성이여!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프간 여성은 집에만 있지 마세요.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입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드높여야 해요.” 트위터에서 ‘아프간 여성’(Afghanistan Women)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 속 여성들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용감하게 맞서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인 랑기나 하미디, 탈레반의 카불 입성을 떨리는 목소리로 알렸던 영화감독 사라 카리미, 그리고 최연소 여성 시장인 자리파 가파리는 각각 파키스탄, 이란, 인도에서 ‘난민’으로 지내다 고국으로 돌아가 아프간 여성의 인권을 위해 활동한 이들이다. 그들은 지금 다시 ‘난민’이 됐지만 분명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잠시나마 곁을 내줄 수 있는 전 지구적인 연대의 힘이다.
구기연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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