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달러 시대, 우리의 삶은 나아졌는가. 질문을 더 줄이자. 오늘 우리는 행복한가?
적도 반대쪽의 뉴질랜드가 이 질문의 해답을 찾는 세기의 도전을 시작했다. 국가 정책과 예산의 목표를 ‘부(GDP·국내총생산)의 성장’에서 ‘행복 증진’으로 바꾸는 대전환의 실험이다. 뉴질랜드의 야심 찬 행복 정책을 이끄는 사령탑은 30대 젊은 여성 총리 저신다 아던. 그는 총예산의 3.4%에 해당하는 38억뉴질랜드달러(약 2조9400억원, 순증액) 규모의 ‘행복 예산’(웰빙 예산)을 5월30일 발표했다. 아던 정부는 4년 동안 256억뉴질랜드달러(약 19조8600억원)의 행복 예산을 투입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록스타 혼자 어떻게 잘나갈 수 있겠는가”</font></font>
아던이 ‘가보지 않은 길’로 대전환을 선택한 이유는 명료하다. 국가정책 목표로서 GDP의 한계 인식이 출발점이다. 2019년 국가예산안에서 아던 총리는 “GDP 증가가 경제활동의 질을 반영하지 못할뿐더러,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뒤처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점을 통렬하게 짚었다.
그는 “뉴질랜드 경제가 지난 몇 년 동안 뚜렷이 성장했지만 우리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최악의 자살률, 감당할 수 없는 홈리스 증가, 수치스러운 가정폭력과 아동 빈곤 수준” 등 성장의 숲에 가린 뉴질랜드의 어두운 그늘을 드러냈다. 그는 “GDP 성장만으론 삶의 질을 높일 수 없고 위대한 나라를 만들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고 단언하면서, “이제 국가 성공의 정의를 재무 건전성뿐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 자원을 지키는 것으로 확대한다”고 구체적인 행복 예산안과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영국 일간지 은 “영국처럼 국가행복지수를 측정한 나라들이 있지만, 행복(웰빙)을 중심으로 전체 예산을 편성하고 행복 증진에 맞춰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나라는 뉴질랜드가 서양 국가 중 첫 사례”라고 뉴질랜드 행복 예산 대전환의 의미를 평가했다. 은 “주변에 홈리스가 많아지고 아동 빈곤과 불평등이 커지는데, 록스타 혼자 어떻게 잘나갈 수 있겠는가”라는 뉴질랜드 그랜트 로버트슨 재무장관의 발언도 인용했다. 로버트슨 장관은 “뉴질랜드가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록스타’ 성장률을 구가하지만 사람들 삶의 질이 나아지거나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고 행복 예산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미국의 인터넷 매체 는 “GDP를 잊어라, 뉴질랜드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Well-being) 도입”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뉴스를 내보냈다. 부제 또한 “새로운 국가 행복 예산, 돈보다 시민 행복 우선”이란 선명한 메시지를 담았다. 는 기사 첫머리에서 뉴질랜드 행복 예산으로의 대전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의 성공을 GDP라는 잣대로 평가해왔다. 그런 고정관념을 뉴질랜드가 흔들었다. 처음으로 행복 예산을 도입하면서 국가의 성공을 전혀 다른 잣대로 평가하겠다는 도전장을 던졌다.”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뉴질랜드가 처음 도입한 행복 예산은 정부가 일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주고, 국가의 성공을 다른 방식으로 측정하려는 것”이라면서 “GDP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고 환경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함양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자는 것”이라고 에 설명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정신건강 증진, 아동 빈곤 개선에 중점</font></font>
구체적으로 뉴질랜드의 첫 행복 예산은 다섯 가지 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터너 대사는 “뉴질랜드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정신건강, 아동 빈곤, 가정폭력과 같이 뉴질랜드가 직면한 장기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동시에 마오리 원주민과 남태평양계 뉴질랜드인들의 삶을 지원하고, 경제구조를 전환하면서 생산적인 국가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는다”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이 말을 뒤집으면, 뉴질랜드에서 불행한 사람들을 덜 불행하게(또는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하는 데 예산을 가장 먼저 투입하겠다는 뜻이다. 또한 경제구조 전환이나 경제의 활력 증진에 당연히 힘을 쏟겠다는 계획이다.
뉴질랜드 행복 예산에서는 정신건강 증진이 최대 역점 분야로 제시됐다. 그만큼 정신질환으로 불행에 빠진 뉴질랜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올해 행복 예산 총액 38억뉴질랜드달러 중 무려 13억5800만뉴질랜드달러가 투입된다. 뉴질랜드의 집권 노동당은 행복 예산을 설명하는 누리집에서 “우리는 정신건강과 중독 문제를 너무나 오랫동안 개인 일로 치부해왔다”면서 “행복 예산을 도입하면서 뉴질랜드 사람의 정신건강 증진에 사상 최대 투자를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궁극적으로는, 정신질환 예방부터 집중 치료에 이르기까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즉시 도움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정책 목표다. 이를 위해 시민단체나 대학, 지역 커뮤니티센터 등에 훈련된 전문 인력을 두루 배치하기로 했다. 중·고등학생 5600명이 추가로 학교에서 자살 예방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홈리스 2700명이 안락한 집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방안도 있다.
두 번째 정책 목표가 아동 빈곤 개선이다. 뉴질랜드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이가 많다고 파악했다. 고질적 가정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는 데 예산을 많이 쓰기로 했다. 전문가의 도움을 강화하고, 피해 어린이의 피난처 제공도 확대하기로 했다. 정부에서 학교 지원 예산을 늘려, 저소득층 부모가 학교 기부금을 내야 하는 부담도 덜어준다.
행복 예산은 마오리 원주민과 남태평양 섬 주민의 공동체 강화에도 집중 투입된다. 이들은 백인 뉴질랜드인보다 소득도 낮고 교육 수준도 낮고 행복지수도 낮게 측정된다.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덜어주는 것이 행복 예산의 궁극적 목표다. 마오리와 남태평양 주민의 건강 격차를 줄이는 데 힘을 쏟고, 이를 위해 전통적인 공동체 건강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범죄를 저지른 주민이 재범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고유 언어의 사용과 확산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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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예산이 GDP의 한계를 비판한다고 해서 ‘돈’과 ‘성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부의 성장’만으로 국가의 성공을 재단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행복 예산에서는 ‘부의 성장’ 중에서도, 국가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전환과 국가 생산성 강화에 힘을 쏟기로 했다. 국가 생산성을 강화하려면,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미래의 일자리 감축을 가져오는 자동화에 대비하고 가계의 실질소득을 확충하는 일에 예산을 집중 투입한다.
경제구조 전환은 기후변화와 수질, 토양 침식, 쓰레기 등 주로 환경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뉴질랜드 경제를 능동적으로 또 선제적으로 친환경 구조로 바꾸는 길을 열어가자는 것이다. 그 길목에 행복 예산이 있다.
아던 총리는 2017년 취임 이후 줄곧 세계의 이목을 끈다. 최연소 여성 총리로 임신 뒤 출산휴가를 떠나는가 하면 지난 5월 연인과 뒤늦은 약혼 소식을 세계로 전파했다. 3월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 사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 때는 히잡을 쓰고 피해자 가족을 안고 위로하는 모습으로 세계인의 감동을 일으켰다.
아던은 그동안 자신만의 감성적 행보로 성공적인 총리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아던이 행복 예산이란 정책 도전에서도 성공을 거둘지 주목된다. 뉴질랜드 제1야당인 국민당은 “행복 예산은 사회간접자본과 공공서비스 확대를 바라는 뉴질랜드인들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당은 “정부의 행복 예산을 보면, 친구와 잘 지내는 것이 당뇨병을 예방하는 것보다 두 배나 더 중요하다는 인식에 빠져 있다”면서 “난센스”라고 질타했다.
뉴질랜드에 앞서 행복 정책의 길로 들어선 나라들도 있다. 히말라야의 작은 나라 부탄이 대표적이다. 부탄은 행복을 국가정책 목표로 헌법에 명시했으며, GDP를 대체하는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 개념을 구체적으로 도입했다. 33개 지표로 나눠 국민총행복 지수를 조사하며, 주요 정책에 행복영향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국민총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정책은 행복영향평가에서 탈락한다. 국민총행복 정책을 총괄하는 장관급 위원회 조직도 운영한다.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는 2016년 행복부를 설립했다. 정부 차원에서 행복을 측정할 수 있는 행복성과지표도 개발했다. 또, 정부 부처마다 행복사무관을 두고, 공공기관에는 행복위원회를 설치했다. 직장 내 행복 문화 증진을 도모하는 장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서울시 1월 시민행복증진 조례 공포</font></font>
양극화의 불행이 만연한 우리 사회도, 성장 중심에서 행복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첫걸음을 뗐다. 지난해 박진도 당시 지역재단 이사장을 중심으로 국민총행복전환포럼을 설립했다. 35개 지방자치단체장이 가입한 행복정책실현지방정부협의회도 정책 공조의 틀도 갖췄다. 지난 6월19일 행복정책실현지방정부협의회는 서울시, 서울시의회와 공동으로 행복한 지역공동체 구축을 위한 행복정책 심포지엄을 열었다. 서울시는 올 1월 시민행복증진 조례를 공포했으며, 연말까지 행복위원회 구성과 행복지표 구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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