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 나선다. 10월13일부터 21일까지 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교황청·덴마크 등지로 7박8일 이어지는 강행군이다. 2년마다 열리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아셈) 참석이 가장 중요한 일정일 터다. 아셈에는 아시아 21개국과 유럽 30개국,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사무국과 유럽연합이 참여한다. 규모 면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비할 바 아니다. 기적처럼 일궈낸 한반도 냉전 해체의 기회, 화해와 평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하기에 맞춤한 다자외교 무대다. 최근 문 대통령은 부쩍 다자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야흐로 한반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는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로 이어질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며, 또 도움이 되는 과정이라 보고 있다.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냉전체제를 해체할 수 있도록 미국 외의 다른 관련국들과 협력해나가는 데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문 대통령, 10월8일 국무회의 머리발언)
‘한판 승부’로 평화 얻을 수 없어북-미 협상이 본격화하고 있지만,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언제, 어디서 얼음이 갈라질지 알 수 없다. 뚜벅뚜벅 앞서나가며 북-미 관계를 추동하는 남북관계를 두고 미국 쪽에서 나오는 ‘볼멘소리’도 괜한 걱정을 만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0월10일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한국 정부가 대북제재 해제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전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5·24 조치 해제 검토’를 발언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5·24 조치는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0년 천안함 사건에 정부가 내놓은 ‘대북 행정 조치’다. 남북교역 중단과 신규 대북투자 불허, 북한 주민 접촉 제한 등의 내용이 뼈대다. 이로써 사실상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 협력 사업이 가로막혔다.
올해 남과 북은 두 정상이 세 차례나 직접 만나 ‘전쟁 없는 한반도’를 약속했다. 이 시점에서 정부가 5·24 조치 해제를 검토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되레 묻는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제재와 압박’에 열을 올리는 미국은 대체 무슨 심산인가? ‘승인’은 동맹을 향해 쓰는 표현이 아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뻥 뚫린 탄탄대로만 좋을까? 목표 지점과 방향이 어긋났다면, 한참을 에둘러 돌아가야 한다. 구불구불 비탈길이 마냥 나쁜 것도 아니다. 오르는 길 험난해도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협상의 어려움은 ‘적대의 세월’에 정비례한다. ‘한판의 승부’로 평화를 얻을 순 없다. 북-미 협상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란 뜻이다. 협상이 어려워졌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강물이 거꾸로 흐르지 못하도록 수문에 작은 빗장 하나 걸어둬야 한다. 10월17~18일로 예정된 문 대통령의 교황청 방문을 눈여겨보는 이유다.
“(지난 9월18~20일 열린) 평양 남북 정상회담 기간에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김 위원장에게 ‘프란치스코 교황(교종)이 한반도 평화 번영에 관심이 많으니 김 위원장이 교황을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이에 김 위원장이 ‘교황님이 평양을 방문하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며 적극적인 환대 의사를 밝혔다고 문 대통령이 말했다.”
한반도 평화 위한 기도 호소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10월9일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문 대통령이 교황청 공식 방문 때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김 위원장이 밝힌 초청의 뜻을 전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평양 정상회담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그 방법의 하나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제안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세계 10억 명 넘는 신자를 가진 가톨릭 교회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북-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도 여러 차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한 바 있다. 그는 4·27 남북 정상회담 직후 “남북 지도자의 용기 있는 결단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6·12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로운 미래를 보장하기 바란다”고도 축원했다. 교황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의 ‘불가역성’을 높이는 동시에 북-미 협상의 강력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쿠바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1998년 1월2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상 처음으로 쿠바 땅을 밟았다. 《AP통신》 등 외신의 당시 보도를 종합하면, 그날 오후 4시께 활주로에 내린 교황은 접시에 담아온 쿠바 흙에 입을 맞췄다. 이어 환영을 나온 어린이 4명과 반갑게 포옹했다. 공항에 나와 있던 환영 인파는 이렇게 외쳤다. “후안 파블로 세군도, 테 뷔에레 토도 엘문도!”(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우리 모두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영접을 받은 교황은 이 자리에서 “쿠바가 자유와 신뢰, 정의와 항구적인 평화의 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교황 환영 행사를 위해 쿠바 정부는 특단의 조처를 했다. 수도 아바나 일대 노동자들은 당일 오후 모두 휴가에 들어갔다. 공항에서 아바나 시내까지 20㎞ 남짓한 거리는 환영 인파로 가득 찼다. 손에 손에 교황청과 쿠바 국기를 든 인파는 찬송가를 부르며 깃발을 흔들었다. 가로수며 가로등마다 교황의 초상이 내걸렸다. 1959년 혁명 직후 카스트로 의장이 혁명 동지들과 함께 쿠바를 ‘무신론자 국가’로 선포했던 의사당에도 마찬가지였다. 방문 기간 아바나 한복판 혁명광장에서 교황이 집전한 미사에는 50만 명가량이 몰려들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방문 기간에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쿠바가 세계에 문을 열고, 세계도 쿠바를 향해 문을 열어젖힐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교황청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봉쇄 정책을 줄곧 반대해왔다.
교황이 미국과 쿠바 화해 중재“특별히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맞는 지금, 쿠바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있음을 확신한다. 쿠바가 새로운 지평을 더욱 넓혀나갈 것임을 굳게 믿는다.” 그로부터 14년여가 흐른 2012년 3월25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아바나 공항에 내려섰다. 2008년 은퇴한 피델 카스트로를 대신해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공항 영접에 나섰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미국의 봉쇄는 굶주림과 절망을 부추겨 정부를 붕괴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새롭고 개방된, 더 나은 사회 건설을 향해 나아가라”고 화답했다. 변화는 더디기만 했다.
교황의 사상 첫 쿠바 방문이 이뤄진 199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쿠바인들을 극심한 고통에 몰아넣은 봉쇄와 고립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쿠바 정부와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르고글리오 주교는 2013년 3월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이후 미국과 쿠바의 화해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2014년 12월1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의장이 미국-쿠바 외교관계 복원에 나설 것을 공식 발표한 것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역할이 컸다. 이듬해인 2015년 9월20일 그가 탄 알리탈리아 전세기가 아바나 공항에 착륙했다. 미국과 쿠바가 대사급 외교관계를 복원한 지 두 달 만의 일이다.
“쿠바인들의 희망을 지지하기 위해, 그들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해 찾아왔다.” 라울 카스트로 의장의 공항 영접을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내외신 기자 1천여 명의 열띤 취재 경쟁 속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튿날인 9월21일 쿠바의 동부 도시 올긴을 방문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는 교황이 올긴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열대성 폭우가 쏟아졌다”고 전했다. 강이 범람할 정도로 큰비였지만, 건기가 길어져 가뭄에 시달렸던 쿠바인들에겐 그야말로 ‘단비’였단다.
미국은 뭘 내놨을까프란치스코 교황은 쿠바 방문 기간에 “쿠바와 미국의 관계 복원 노력은 전세계에 보여준 화해의 모범 사례”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화해를 향해 가는 그 길 위에서 부디 인내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2016년 3월21일)으로 절정에 이르렀던 쿠바와 미국의 화해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 ‘제재 부활’과 함께 삐걱대고 있다. ‘화해’에는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믿음’이 없을 때, 더욱 그렇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0월7일 당일치기로 방북했다. 아침 7시께 일본 도쿄에서 출발해 평양에서 회담을 마친 뒤, 오후 5시13분께 경기도 오산 주한미군 공군기지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도쿄~평양~오산을 오간 비행시간을 빼면, 평양 체류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을 터다. 그럼에도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이 만난 시간은 5시간30분이라고 전달받았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폼페이오 장관 일행과 오찬까지 함께했다. 사실상 김 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을 직접 상대했다는 뜻이다.
성과도 적지 않았다. 먼저 북-미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를 위해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곧 실무협상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또 김 위원장이 지난 5월 이미 폭파·폐기한 함북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이 ‘불가역적으로 해체됐는지’를 확인할 사찰단을 초청했다고 미 국무부가 밝혔다. 김 위원장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등 ‘선제적 비핵화 조치’에 대한 미국의 의심에 답답함을 호소해왔다.
2차 정상회담 합의 외에 미국 쪽은 뭘 내놨을까? 폼페이오 장관은 10월7일 밤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취할 비핵화 조치와 미국 정부의 참관 문제 등을 협의했고, 미국이 취할 상응 조치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미 국무부도, 백악관도 ‘미국이 취할 상응 조치’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도 10월8일치 관련 기사에서 “비핵화 해결을 위한 방안들과 쌍방의 우려 사항들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건설적인 의견 교환”을 했으며, “매우 생산적이고 훌륭한 담화”였다고만 밝혔다.
북한 의심 걷어내고 비핵화 속도 붙이려면‘상응 조치’의 핵심은 ‘믿음’이다. 북한은 미국의 ‘믿음’을 얻기 위해 핵실험장 사찰을 받아들였다. 미국에 대한 ‘믿음’의 상징으로 북한은 ‘종전선언’을 지목한 바 있다. 북한의 ‘의심’을 걷어내고 비핵화에 속도를 붙이려면, 대북제재 유예와 완화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방미 기간 중이던 9월25일, 미국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매체다.
“앞으로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게 되면 미국 쪽이 장기간 참관할 필요가 있을 텐데, 그 참관을 위해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는 적대관계를 청산한다는 미국의 의지도 보여주면서, 참관단들이 머물면서 활동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 비핵화 조치가 완료되면 북한의 어떤 밝은 미래, 그런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경제시찰단을 서로 교환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북-미 관계를 새롭게 수립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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