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장미 대선’에 한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돼 있듯 유럽도 머잖아 치르는 굵직한 선거들로 초긴장 상태다. 프랑스에선 5월7일(현지시각) 대통령선거 결선투표가 치러지는 데 이어, 6월 총선(11일, 18일)이 예정돼 있다. 영국(6월8일), 독일(9월24일) 등 주요국에서도 정부 구성을 판가름하는 선거가 줄줄이 대기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치러지는 프랑스 대선은 프랑스만의 선거가 아니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유럽 전체, 더 나아가 세계경제 전체가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럽연합(EU) 탈퇴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는 극우정당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마린 르펜 후보가 당선된다면 지난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결정과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이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3대 정치 이벤트가 완성되는 것이다.
‘6.4%’ 집권당 최악의 득표율4월23일 1차 투표에선 중도파 ‘앙마르슈’(En Marche·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르펜 후보가 각각 24%, 21.3%의 득표율로 1·2위를 차지했다. 중도우파 공화당(Les Rpublicains) 후보는 3위로 밀려났고, 강경좌파로 분류되는 ‘불굴의 프랑스’(France Insoumise)의 장뤼크 멜랑숑 후보는 19.6%를 득표했다. 집권 사회당(Parti Socialiste)의 브누아 아몽 후보는 불과 ‘6.4% 득표’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다. 1~4위의 득표율을 비교하면 그 격차가 미미하다. 그만큼 이번 대선 1차 투표는 혼전을 보였고, 주로 중도 좌우파가 번갈아 집권하는 유럽 정치의 전통적 모습에서 크게 벗어났다.
이번 프랑스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주류 정당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정당정치가 사실상 실종됐다는 것이다. 많은 유럽 국가들처럼 프랑스에도 다양한 정당이 있고 선거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반면 프랑스 정치는 좌우 구분이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좌우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정당들도 있다. 좌파를 대표하는 정당이 사회당(중도좌파)이라면, 우파를 대표하는 정당은 공화당(중도우파)이다. 영국의 노동당·보수당과 달리 당명은 시기에 따라 변해왔지만 지난 40여 년간 유지해온 기본적인 정당 성격은 유사하다.
집권 사회당의 사정을 보자. 대선 직전 사회당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2012년 ‘유로존 위기’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긴축 반대와 과감한 일자리 공약을 내세우며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집권 5년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프랑스 경제는 저성장을 면치 못하고 실업과 양극화 문제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내수와 수출, 고용 등 모든 경제지표가 훨훨 날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닌 독일 경제와의 격차는 점차 더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올랑드 대통령은 밀어붙이기식 우편향적 노동개혁을 시도했다. 그 결과는 전통적 좌파 지지층의 이탈이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결국 당내 여론에 밀려 중임 시도를 포기하고 만다.
올해 초 당내 경선을 통해 등장한 인물은 49살의 비교적 젊은 정치인 브누아 아몽이었다. 올랑드 대통령의 우편향 정책을 비판하다 경제부 장관에서 밀려난 바 있다. 아몽은 중도좌파의 전통적 가치 복원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일부 공약에선 급진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노동을 대체하는 산업자동화에 세금을 부과하는 ‘로봇세’가 대표적인 예다. 그 결과 지지율이 다소 회복하는 듯했으나 유세 기간 내내 10%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을 면치 못했다. 투표 결과 득표율은 그보다 떨어진 6.4%였다. 집권당으로서 최악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이다.
사회당의 참패가 집권당에 대한 심판과 전통 지지층 이탈 때문이라면, 우파 공화당의 참패는 후보자 개인 비리에 따른 것이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에서 ‘조용히’ 총리직을 수행한 프랑수아 피용은 2016년 11월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했다. 이 기세가 계속될 경우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꼽혔다. 집권 사회당의 초라한 실적, 전직 총리로서 안정적 이미지를 배경으로 피용은 보수층의 표심을 흡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실제 피용은 동성 커플의 입양과 낙태에 반대했고,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포용하는 성향을 보이면서 중도우파는 물론 르펜의 지지층도 잠식할 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 초 자신의 가족을 보좌관으로 임명해 결과적으로 세비를 부정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한다.
양당정치가 붕괴하며 나타난 현상은 중도파와 강경좌파 등 대안세력의 급부상이었다.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한 중도 성향 에마뉘엘 마크롱은 현재 만 39살로, 대통령이 될 경우 1958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최연소 대통령이 된다. 올랑드 정부에서 경제부 장관을 한 그가 지난해 여름 탈당할 때만 해도 대선 출마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반면 공화당 피용 후보의 횡령 비리 수사가 본격화되고, 아몽 사회당 후보는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마크롱이 선거조직 앙마르슈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하자, 사회당과 공화당에 실망한 중도 좌우파 유권자들이 중도를 표방한 이 젊은 후보에게 몰려들었다. 앙마르슈는 창립 7개월 만에 당원 8만8천 명을 확보해 사회당에 버금가는 선거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마크롱이 사회당 내 우파들의 표심에 호소했다면, 좌파 멜랑숑 후보는 강경좌파 유권자에 더해 사회당 내 좌파들의 표심을 끌어들였다. 포퓰리스트를 자처한 멜랑숑은 스스로를 지난해 미국 대선 과정에서 선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비교했다. 그는 근로시간 단축, 정년연령 하향, 부유층 과세 등 전통적인 좌파의 공약을 내걸었다. 또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도 탈퇴할 것임을 밝혔다. 대중연설에 강한 멜랑숑은 텔레비전 토론을 최대한 활용했고 대규모 대중집회를 통해 선거 직전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현상을 보였다. 일부 여론조사에선 그가 르펜과 함께 1·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도 했다.
팽배하는 ‘자국 중심주의’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미국 대선, 올해 프랑스 대선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은 ‘자국 중심주의 확대’다. 유럽연합 체제 아래서 정치·경제적 통합이 진행돼온 유럽에서 자국 중심주의는 ‘유럽 회의주의’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 활발해진 역내 회원국 간 노동이민, 유럽연합 분담금, 유럽연합의 규제, 유로화 체제 등에 대한 거부가 유럽 회의주의의 대표적 모습이다. 유럽 회의주의는 선거 때 ‘국민주권 보호’라는 더 세련된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이런 선거 전략은 유럽 내 많은 극우정당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띈다. 장기간 계속되는 저성장과 실업, 이민에 따른 사회 통합의 어려움, 각종 테러 위협이 극우 정당에 활동하기 좋은 정치 토양을 제공해준 것이다.
프랑스에서 극우정당의 부상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국민전선은 이미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내 1위의 성적을 거두며 유럽의회에 가장 많은 의원을 배출했다. 2015년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도 1위를 거두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르펜은 최근까지의 여론조사에서 1·2위를 차지해 일찌감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꼽혔다. 르펜은 자국 문화 고수와 이민 반대를 주장해왔고, 유럽연합 탈퇴와 솅겐조약(체결국 간 자유로운 출입국을 보장하는 조약) 철회 등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르펜은 프랑스가 처한 경제·사회적 문제점을 유럽연합과 외부 세계로 돌리는 전형적인 극우정당의 선거 전략을 보여주었다. 이 전략은 보수주의 유권자와 일자리 문제에 민감한 서민층에게 동시에 호소력을 갖는다. 프랑스에도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대역전승을 가져다준 ‘샤이 트럼프’ 같은 유권자층이 있다. 이들은 비교적 진보 성향인 언론과 소셜미디어 사용자에게 상대적으로 덜 감지될 뿐이다.
극우정당 자체의 쇄신 노력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공의 배경이다. 마린 르펜은 당대표 부임 이후 오랜 기간 전임 당대표 장마리 르펜의 강경 이미지를 불식하는 데 역점을 뒀다. 대중친화적 이미지 구축에 주력한 마린 르펜은 당 구조를 쇄신하고 ‘집권이 가능한’ 정당으로서 전 이슈에 대해 당의 입장을 재정비했다. 마린 르펜이 주장해온 국민주권 최우선 정책은 브렉시트 찬성론자나 미 대선 후보 시절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결선투표를 향한 ‘리셋’프랑스 대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넘는 득표자가 없을 경우 2차 결선투표를 벌인다. 결선투표의 특징은 후보자는 물론 유권자도 선거 전략을 다시 ‘리셋’하게 된다는 점이다. 1·2위 득표율을 기록하지 못한 후보나 정당은 향후 정치적 입지와 의정 활동을 고려해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가장 유사한 후보의 지지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다. 유권자도 이를 고려해 투표한다.
1차 투표 뒤, 올랑드 대통령과 공화당의 피용 후보는 공개적으로 마크롱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과거 전례와 선거의 전략적 측면을 감안할 때 마린 르펜은 자신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이 2002년 그러했던 것처럼 결선투표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좌파의 분열 속에 2002년 장마리 르펜은 16.86%의 득표율로 간신히 2위를 차지해 사회당의 현직 총리인 리오넬 조스팽을 불과 0.68%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장마리 르펜은 17.79%의 표를 얻는 데 그쳐, 80% 이상을 득표한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2002년과 비교할 때 이번 대선의 양상은 매우 다르다. 첫째, 대선이 끝나고 불과 한 달 뒤인 6월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치러진다. 프랑스 헌법상 하원에서 과반 의석을 획득하는 정당이 총리를 배출한다. 이번 총선에서 급조된 정당인 앙마르슈가 과반 의석을 획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마크롱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15년 만에 대통령과 총리가 서로 다른 당 출신으로 구성되는 ‘동거 정부’가 출범함을 의미한다. 마크롱에게 투표한다는 것은, 곧 동거 정부를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같다.
둘째, 이번 대선은 국민전선이 기록한 역대 최대 성과다. ‘톨레랑스’(Tolrance·관용)로 알려진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가 자국 중심주의로 향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르펜을 지지하는 ‘샤이 보터’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이라는 두 번의 예측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전망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강유덕 한국외국어대 LT(Language and Trade) 학부 교수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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