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8일 필리핀 페이스북 유저들의 타임라인 화제는 신임 대통령 로드리고 로아 두테르테가 마닐라 공항 보안심사대를 지나는 장면이었다. 두테르테는 여느 승객과 다름없이 두 손을 들고 몸수색에 응한 뒤 엑스레이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언론은 일제히 “VIP 대우는 없었다”고 제목을 뽑았다. VIP 대우가 없기는 대통령궁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7월18일 말라카냥 대통령궁 ‘밥 타는 줄’에는 두테르테가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를 다바오 시장이라 불러라”</font></font>두테르테는 5월 대통령선거에서 39.01%의 득표율로 필리핀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3.45%를 얻은 자유당(Liberal Party) 마누엘 로하스 후보를 약 500만 표 차로 이겼다. 자유당은 15대 대통령을 지낸 베니그노 아키노 3세가 이끈다. 베니그노는 1986년 피플파워 혁명 뒤 당선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테르테가 속한 민주필리핀당(PDP-Laban)은 30년 전 코라손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당이다.
필리핀은 아시아 최초로 피플파워 혁명을 일궈냈지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선 질적 성장을 보지 못했다. 규칙적 선거와 제도적 민주주의의 근간은 살아 있지만 빈곤과 실업, 토지개혁 등 근본적 현안에 손대지 못한 채 엘리트 민주주의자들이 주고받는 ‘대통령 교체’만 있었을 뿐이다. 정당정치보다는 인물 중심, 특히 일부 엘리트 가문이 정치의 심장부를 독점한 과두정치가 필리핀 정치를 상징하는 단어다. 두테르테의 등장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테르테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경제 중심지로 통하는 다바오시 태생이다. 그는 1988년 2월 이래 거의 30년간 다바오의 시장과 부시장을 두루 역임한 베테랑 지방 정치인이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그는 마닐라 대통령궁보다는 비행기로 약 2시간 걸리는 다바오를 찾는 일이 잦다. 당선이 확정된 다음날인 5월31일 그가 첫 기자회견을 한 곳도 다바오였다.
“나를 대통령이라 부르지 말고 다바오 시장이라 불러라.”
지난 8월21일 새벽 1시30분, 다바오시 대통령 게스트하우스로 기자들을 불러모은 ‘한밤의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이 말을 반복했다.
두테르테는 통상적인 대통령의 권위나 품격을 보이는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멀다. 줄무늬 셔츠와 티셔츠를 즐겨 입고, 공식 석상에서도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기 일쑤며, ‘F’자나 ‘S’자가 들어간 상스러운 단어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툭툭 내뱉는다. 보통 사람이 그의 말을 따라 한다면 여혐, 남혐, 혹은 소수자 혐오를 하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엘리트 정치에 신물 난 서민들은 그의 상스러운 언어에 되레 환호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회주의 vs 포퓰리즘</font></font>두테르테 앞에 자주 붙는 수식어 중 하나가 ‘모순적 인간’이다. 그의 혐오스런 표현과 정책이 모순을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문제를 예로 보자. 그는 자신의 발언에 비판적인 마닐라 주재 미국대사에게 “창녀의 아들, 게이”라고 응수한 적이 있다. 동성애 혐오자라는 비난을 살 만한 막말이었다. 그런데 성소수자에 대한 그의 정책은 사뭇 다르다. 그는 동성결혼 합법화에 찬성하는 정치인이다. 다만, 법제화는 의회를 거쳐야 한다는 현실을 덧붙였다. 두테르테의 성소수자 정책은 성소수자(LGBT) 등 소수자 차별을 금지한 다바오시 조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그는 당선 직후 첫 기자회견에서 “부패한 언론이라면 암살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라며 언론과 각을 세웠지만 그렇다고 언론혐오증을 앓는 정치인은 아니다. 틈만 나면 기자회견을 열고 질의응답을 ‘즐기는’ 기자회견의 고수다. 대본은 없다. 험한 입담에다 ‘법 외 사형’ 문제가 두테르테 뉴스를 도배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법치를 외치는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6월30일 취임식 연설에서도 두테르테는 자신이 변호사·검사 출신이기에 대통령 권한의 (법적) 한계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독립언론 편집장 마리테스 비투그는 두테르테가 세 가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대통령이라고 했다. 최초의 지방정치인 출신,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선언, 그리고 최초로 연방제 지지를 선언한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필리핀 출신 대표적 좌파 지식인 윌든 벨로는 두테르테의 ‘사회주의자 선언’을 두고 “이념적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포퓰리즘”이라고 평한 바 있다. 세 가지 ‘최초’를 이해하려면 두테르테의 정치적 고향 민다나오 군도와 다바오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민다나오는 반란의 섬이다. 필리핀공산당(CPP)이 40년 동안 무장투쟁을 벌여온 공산반군의 본향이자 모로(Moro) 분리주의자 반군도 수십 년 자치를 외치며 싸우고 있다.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을 시작으로 1차 분파 조직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그리고 납치를 일삼는 ‘아부사야프그룹’까지 조직도 다양하다. 당연하게도 민다나오의 이미지는 내전, 납치, 범죄 등이다. 민다나오 군도에 속하는 술루제도에는 아직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캐나다 등 외국인들이 아부사야프그룹에 인질로 잡혀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민다나오의 분쟁 종식은 국가 안정에 중요한 과제이자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두테르테가 지난 7월25일 첫 대통령 국정연설에서 반군들을 향해 일방적 휴전을 선언한 건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반군 진영도 화답하는 분위기다. 모로민족해방전선 최고 사령관 누르 미주아리(77)는 이미 대선 직전인 5월 초 (Vice News) 인터뷰에서 “두테르테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공산당과의 협상은 8월22일 시작됐고 7일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분쟁의 섬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font></font>그런데 민다나오의 치안 불안에서 예외인 도시가 바로 다바오시다.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각종 통계를 게시해온 누리집 ‘넘베오’(Numbeo)는 지난해 다바오시를 전세계 가장 안전한 도시 9위에 올려놓은 바 있다.
“대학 시절 새벽 3∼4시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게 다반사였다. 택시 기사들도 정직해서 손님이 놓고 내린 물건이 있으면 돌려줄 만큼 안전하다.”
타이 방콕의 한 국제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오렐리오(34)의 말이다. 다바오 출신인 그는 다바오가 “필리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라며 “방콕에서 다바오까지 직항이 있으면 자주 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치안이 불안한 마닐라를 거쳐 갈 생각을 하면 집에 갈 맘이 싹 사라진다”는 말도 했다.
바로 그 안전한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명성을 제대로 날린 두테르테 전 시장은 이제 대통령으로서 안전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부패와 범죄 그리고 마약을 뿌리 뽑겠다는 게 그의 대선 캠페인 기조였다. 필리핀 유권자 약 40%가 그 정책에 기꺼이 표를 던졌지만 그의 인기는 더욱 상승하고 있다. 7월20일 기준 필리핀 공공여론 조사기관인 ‘펄스 아시아 폴’에 따르면 두테르테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91%로 압도적이다.
그러나 그의 캠페인은 지금 위험한 실험으로 흐르고 있다. 8월22일 두테르테 정권의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상원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경찰청장 델라 로사는 7월1일 이후 7주간 경찰과 자경단에 의한 사망자 수는 약 1800명이라고 밝혔다. 이 중 경찰이 사살한 900명 가운데 712명이 마약거래 용의자라고 했다. 581건은 경찰 조사 중이며 23건만이 경찰 체포에 불응해 사살한 경우라고 말했다. 전체 사망자 중 1067명은 무장괴한에 의한 것이며 자신은 그 행위를 비난한다고 덧붙였다.
자경단은 두테르테가 다바오시 범죄 소탕 작전에서 활용했던 방식으로 수년간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 자신과 자경단의 관계를 시인할 때도 있고 부인할 때도 있다. 물론 언론이 두테르테의 정책을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로 단정하는 건 선정적 보도 측면이 있다. 두테르테는 여러 기자회견에서 ‘총 먼저 쏘지 말고 우선 체포하되 경찰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낄 경우 총을 쏴도 좋다’는 기조를 반복해왔다. 그럼에도 사살을 용인하고 두둔하는 그의 발언은 경찰은 물론 ‘자경단’으로 통하는 무장괴한들의 법 외 사형을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그게 법이다”</font></font>게다가 현재 두테르테가 벌이는 마약과의 전쟁이 과연 마약 범죄의 중추 권력을 잡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7월2일 두테르테 정권의 마약과의 전쟁에 협조하겠다고 했던 필리핀공산당은 8월12일 “경찰과 자경단의 광기를 끝내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애초 그들이 협조를 선언할 때 강조했던 대상은 마약과 연루된 군, 경찰, 공무원 등이었다.
두테르테의 또 다른 위험은 그가 8월7일 발표한 전 독재자 마르코스의 영웅묘 안장 계획이다. 마르코스는 1965년 민주적으로 선출됐지만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한 이래 공포정치를 펼쳤던 필리핀의 독재자다. 마르코스 영웅묘 안장에는 야당 정치권은 물론 노동계, 여성계 등 대부분의 시민사회가 반대하고 있다. 두테르테 지지층 일부에선 “코라손 아키노의 보안견도 그곳에 묻혔다. 개가 묻혔을 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며 맞선다. 두테르테는 마르코스가 전직 대통령이고 군인 출신이라는 점만으로 영웅묘에 안장될 조건에 부합한다며 “그게 법이다”로 맞서고 있다.
마약과의 전쟁, 마르코스 안장 모두에 반대하는 공산당이 두테르테를 향해 가한 일침은 이랬다.
“두테르테는 지금 그동안 누려보지 못한 방대한 권력에 취해 있다. 마치 법체계를 뒤집고 인권을 변호하는 이들을 매도해도 무사할 거라 여기는 것 같다.”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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