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어느 학교 다녀요?”
칠레에서 참 많이 듣는 질문이다. 8살 딸이 다니는 학교를 알려는 물음만은 아니다. ‘너 어느 정도 먹고사냐?’를 에둘러 묻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 살아요?”만큼이나 많이 물어본다.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에 따라, 어느 수준의 사람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학교에 다녀요?”는 어디에 사는지, 성씨가 무엇인지와 함께 누군가의 계급을 매기는 수단이다.
“어느 학교 보내냐”는 질문
소득에 따라, 다니는 학교의 종류가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칠레에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따로 없고 ‘콜레히오’(Colegio)로 통합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 학교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대부분 다 가르친다. 그런데 학교가 순수 사립학교, 구(시)의 지원을 받는 보조형 사립학교, 구(시)가 운영하는 공립학교로 나뉜다. 순수 사립은 부모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공립은 무료다. 일간 2013년 7월8일 보도를 보면, 보조형 사립의 경우 무료이거나 수업료를 내는 곳은(38%) 월평균 1만6천페소(약 3만2천원)를 받는다. 순수 사립은 월 20만~40만페소 수준이다. 2012년 재학생 기준으로 순수 사립이 7.2%, 보조형 사립이 53.1%, 공립이 39.7%다.
2011년 칠레 전국사회경제특성조사(CASEN)를 보면, 정부 보조금을 포함해 가구당 평균소득은 80만274페소다. 소득 격차가 커서 평균치가 높을 뿐, 1분위(하위 10%) 소득은 13만5천페소, 7분위 소득도 약 68만페소다. 그러니 중·하위 계층이 순수 사립에 2명 정도의 자녀를 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상위 20%에 속하는 10분위(305만페소)나 9분위(122만페소)는 돼야 자녀를 순수 사립에 보낼 여유가 있다. 중산층들은 최대 8만원까지 내는 보조형 사립이라도 보내면서 위안을 삼는다.
실제 2009년 기준 공립학교 학생의 50%는 1~3분위 계층의 자녀다. 반면 순수 사립은 10분위가 50.3%, 9분위는 18.6%로 조사됐다. 순수 사립은 소수 상류층 자녀만 다닐 수 있는 ‘엘리트 사립학교’인 것이다. 그러니 하위 계층 부모는 제 자식은 공립에 보내고,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집의 자녀가 수업을 마칠 때 데리러 갔다가 사립학교 구경이나 해볼 뿐이다. 교육 여건도 차이가 난다.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 자료를 보면, 순수 사립의 경우 1학급당 학생이 23.8명인 반면 공립은 29.6명이다. 이런 학교들은 대부분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서 수업하고, 학교 이름이 아예 영어인 경우도 많다. 더 그레인지 스쿨(The Grange School), 산티아고 칼리지(Santiago College) 같은 식이다. 반면 보조형 사립과 공립은 ‘에스쿠엘라’(통상 유치원 및 초등과정) 또는 ‘리세오’(통상 중등과정 또는 통합과정)로 이름 붙어 있거나 과정이 나뉜 경우가 많다.
지난해 말 2014년도 대학선발시험(PSU) 성적이 나왔다. 이후 일간 는 1월 중순까지 시험 성적 등 각종 교육 통계를 잇따라 보도했는데, 칠레의 교육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학 과목의 경우, 순수 사립 출신은 평균 610점(만점 850점)으로 공립(468점)보다 142점을 더 얻었다. 보조형 사립은 499점을 얻었다. 언어 과목에서 순수 사립은 평균 598점을 기록해, 공립(470점)보다 128점이나 높았다. 보조형 사립은 500점을 기록했다. 이처럼 엘리트 사립과 나머지 학교 사이에 점수 차이가 현격하다. 올해만 그런 게 아니다. 2010년 이후 상위 최고 성적을 낸 50개 학교 가운데 공립은 단 2개뿐이다.
성적 상위 50개 고교 가운데 공립은 2곳
칠레에서 이른바 상위권 대학은 최소 600점은 받아야 입학한다. 그러니 순수 사립을 다니는 학생은 중간만 하면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지만, 공립 출신은 원서조차 내밀기 어렵다. 한국에서 출신 대학을 따지듯 칠레도 만만찮다. 칠레대와 가톨릭대가 아니면 시쳇말로 ‘안 쳐준다’. 올해 칠레 가톨릭대는 합격자 점수(언어·수학 평균)가 681.4점, 칠레대는 676.1점이다. 또 인기가 높은 의대는 대학 평균 합격 점수가 735.8점이다. 그러니 결국 엘리트 순수 사립 출신들이 명문대학, 인기 학과를 대거 차지한다. 이들 학교 출신이 가톨릭대는 63.5%, 칠레대는 34.1%에 이른다. 공립 출신은 각각 11.3%와 25.8%에 그친다. 7.2%밖에 안 되는 순수 사립 비율을 고려하면, 약 5~9배에 이르는 수치다.
가톨릭대에서 스페인어 연수를 받는 한 한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 가면 때깔이 다르다. 뽀얀 백인들도 많고, 길거리에서 보는 애들과 너무 차이가 난다.” 같은 20대라도, 순수 사립에 보낼 형편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랐으니 잘 차려입고 때깔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 가톨릭대 졸업생은 대학원에서 정체성에 대해 공부하려는 이유를 이렇게 털어놨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나와 전혀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데 놀랐다.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 모여 신세타령을 하고 고민하면서 정체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수재여서 가톨릭대에 들어간 경우다. 그러니 사는 곳도 다닌 학교도 달랐던 그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계층과 제대로 접촉하게 됐고, 정체성을 고민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하위 계층 학생들이 명문 대학을 마치면 장래는 밝을까? 당장 수업료가 한두 푼이 아니다. 대학 평균 수업료가 지난해 연간 216만5천페소였다가 올해는 3.8% 올라 평균 224만2천페소에 이른다. 60개 정규 대학 가운데 16개인 국공립대의 경우 지난해 198만3천페소였는데, 올해는 208만7천페소로 5.3% 올랐다. 칠레대는 국립이지만 330만7천페소다. 사립인 마요르대학 테무코 캠퍼스 교육학과는 지난해보다 무려 142%가 올라, 256만3천페소를 기록했다. 데사로요대학 치대는 올해 등록금이 662만5천페소에 이른다.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장학금을 받아도, 중·하위 계층의 가정은 감당하기 힘든 액수다. 한국처럼 4년 과정도 아니다. 정규대학은 5~6년 과정이 대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대개 엄청난 빚을 떠안는다. 한 20대 직장인에게 대학 수업료가 비싸다고 얘기했더니, 자신도 이미 1500만페소의 빚을 지고 있다며 “언제까지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의 평생을 갚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인기가 없는 신문방송학을 공부한 그가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은 50만페소 남짓이다. 그래서 남들이 쉬는 토요일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학자금 상환 위해 주말에도 일하는 직장인들
이런 교육 현실은 질곡의 칠레 역사 속에서 싹텄다. 1973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피노체트는 교육 분야에서도 ‘경쟁’과 ‘효율’을 앞세웠다. 신자유주의에 기반해, 교육 분야도 의료나 연금 등 다른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역할과 지출을 축소하는 대신 시장과 경쟁에 맡겼다. 경쟁을 통한 교육의 질 개선과 공립학교 효율화, 선택의 자유가 그가 내세운 논리였다. 1980년 교육법 개정 이후 공립을 줄이는 대신 보조형 사립학교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공립 운영은 각 지역에 넘겼다. 결과는 서열화와 계급화, 지역별 불평등, 공교육 피폐화의 심각한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민주화 이후에도 지난 20여 년간 ‘사유화’된 교육 시스템에 큰 변화를 이뤄내지는 못했다. OECD 2013년 발표 자료를 보면, 교육 분야에 대한 정부 지출은 칠레 국내총생산(GDP)의 3.9%로 평균 5.4%에 크게 못 미친다. 그만큼 정부의 공교육 투자가 적다는 얘기다. 사회 불평등을 낳는 결정적 변수가 교육 수준인데, 정부가 공교육을 통해 계층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고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런 교육 불평등은 칠레가 OECD 최악의 소득 불평등 국가가 된 핵심 원인이다.
지난해 10월 헤드헌팅 기업 ‘세미나리움 펜린 인터내셔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그들만의 리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최고위 행정직과 상·하원 의원 등 정치 엘리트의 60%가 순수 사립학교 출신이다. 10년 전 45%에서 더 높아졌다. 행정부는 그 비율이 76%에 이른다. 특히 상·하원과 행정부 최고위직의 약 20%가 5개 학교 출신이다. 행정부처 최고위직 가운데 14.55%가 베르보디비노를 나왔다. 상원의원의 13.2%, 하원의원의 3.3%가 세인트조지를 다녔다. 전체 1만2550개 학교 가운데 0.1%도 안 되는 10개 학교가 정치 엘리트의 29%를 배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순수 사립학교 안에서도 또 다른 초엘리트 사립학교가 존재하는 셈이다. 출신 대학은 칠레대와 가톨릭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상원의원은 칠레대 출신이 39.5%, 가톨릭대 출신이 23.7%다. 하원의원은 칠레대와 가톨릭대 출신이 각각 25%와 16.7%를 차지한다. 행정부는 가톨릭대 56.4%, 칠레대 18.2%로 나타났다.
이처럼 지배 엘리트는 콜레히오 단계부터 키워진다. 그러니 부모는 좋은 학교를 보내려 안달이고, 명문 엘리트 사립학교는 배짱을 부린다. 순수 사립의 47%가 입학하려면 6~10개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10개 이상을 요구하는 학교도 8.8%에 이른다. 반면 공립은 50.4%가 3~5개 서류만 준비하면 된다. 심지어 기부금도 내야 한다. 50만페소에서 150만페소가 대부분이다. 행정부 고위직 가운데 9.1%가 졸업한 타반쿠라의 경우, 입학 기부금이 340만페소에 이른다. 유치원 과정에 들어가는 데 입학시험을 치르는 비율이 50.5%에 이르고, 34.6%가 응시료를 낸다.
카드·계좌번호까지 요구하는 입학 상담
한 칠레 교민은 손꼽히는 명문 엘리트 사립학교에서 자녀 입학 상담을 했던 경험을 전했다. “학교가 좋다고 해서 애들을 입학시키려고 갔는데, 신용카드와 은행 계좌번호, 로터리 같은 가입한 클럽 명단을 쓰라고 칸이 몇 개씩이나 되더라. 내 수준이 아니다 싶어서 그냥 나왔다.” 철저하게 최고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학교임을 보여주는 일화다. 주목할 것은 순수 사립학교들이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사실이다. 이런 학교 가운데 입학 때 세례 증서를 제출하는 비율이 15.7%에 이른다. 10.5%는 부모가 종교적 결혼식을 올렸다는 증명서를 내야 한다. 공립은 각각 0.09%, 0.06%다. 베르보디비노·세인트조지·타반쿠라 3개 학교 모두 가톨릭계다.
곧 칠레의 지배 엘리트는 기득권 가정에서 태어나 보수적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육받은 뒤, 최고 명문대학을 마치고 사회 엘리트 그룹에 들어가는 구조를 갖춘 것이다. 이렇게 그들만의 리그가 재생산된다. 이런 학교는 유치원 때부터 거의 14년을 같이 다니고, 학년별로 학급도 2~4개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소속감도 강하고 같은 학교 출신은 서로 알아, 그만큼 밀어주고 당겨주는 학연이 끈끈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엘리트 사립학교에 들어가려는 경쟁은 치열한 반면, 공립학교 지원자는 줄어든다. 1990년 재학생 기준 59.7%였던 공립 지원율은 2012년 기준 39.7%로 떨어졌다. 최근 2~3년 동안 학생들의 점거시위로 학교가 몇 달씩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진 뒤 불신은 더 깊어졌다. 공립의 상징이자 자존심으로 꼽히는 ‘인스티투토 나시오날’조차, 2000년 7:1의 경쟁률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2:1로 줄었다. 1월16일 보도를 보면, 공립 가운데 20.3%가 건물 파손 등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래서 칠레인들은 공립에 대해 “말로, 무이 말로”(¡Malo, muy malo!)라고 평가한다. 엉망이라는 얘기다. 잡화상을 하는 한 교민은 이렇게 전했다. “종업원이 공립학교를 졸업했는데 영어라고는 ‘굿모닝’밖에 모르고 뺄셈도 어려워해 어이가 없더라.”
결국 학생의 미래를 결정할 교육이 학교의 돈벌이 수단이 됐고, 학부모는 소비자가 돼버렸다. 그것도 마음대로 골라잡지 못하는 소비자가 됐다. 이런 시스템의 최대 희생자는 죄 없는 학생들이다. 교육평가시험(SIMCE)과 대학선발시험 결과 뒤 발표되는 ‘랭킹’은 이런 악순환을 떠받친다.
어찌 보면 교육 현장의 차별과 배제에 맞서 2011년 터져나온 학생 시위는 당연한 결과다. 어떻게 그동안 참아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학생 시위는 사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교육 시스템을 개혁하라는 요구였다. 대학 무상교육과 공교육의 질 향상이 핵심이다. 그리고 학교와 교육이 영리 추구의 수단이 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개혁, 칠레 좌파는 할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카밀라 바예호 등 대학생 시위 지도자 출신 20대 4명이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만큼 교육개혁 욕구가 거셌음을 보여준다. 3월11일 두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하는 미첼 바첼레트는 과연 교육개혁을 실현할 것인가? 우파에 정권을 내준 뒤 4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범좌파는 수많은 과제를 떠안고 있다. 최대 도전으로는 ‘부푼 기대’가 꼽힌다. 특히 대학 무상교육 등 공교육 혁신은 재원 마련도 우파의 저항도 만만찮은 과제다. 국가 재정을 좌우하는 국제 구리 가격이 2011년 1t당 1만달러를 넘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현재 7천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바첼레트는 우파로부터는 “공산주의 정책을 편다”며, 좌파한테서는 “또다시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며 양쪽 모두에서 공격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루아침에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는 얘기다. 칠레의 교육 불평등이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컷 칠레를 ‘욕’하고 보니, 한국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나은가? 낫다면, 언제까지.
산티아고(칠레)=김순배 통신원 otromundo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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