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미 줌후리야 에 파키스탄.’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중간에 자리한 위치가 절묘하다. 남으로는 아라비아해, 동으로는 인도와 맞닿아 있다.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서남쪽으로는 이란, 북동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프간 국경의 와칸 협곡 지대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타지키스탄을 만날 수 있다. 남쪽 바다 건너엔 중동의 오만이 자리를 잡고 있다. 파키스탄 이슬람공화국, 문명의 교차로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세계 47위, 구매력 기준으론 세계 27위의 경제 규모를 갖춘 파키스탄은 세계 6위 규모의 1억8천만 인구가 살아가는 대국이기도 하다. 병력 규모로는 세계 7위의 군사대국이자, 무슬림 국가 가운데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이다. 지난 5월11일 치러진 파키스탄 총선 결과를 눈여겨보는 이유다.
57년 만의 평화적 정권 교체
이번 선거 결과는 파키스탄이 ‘역사적 분수령’을 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가, 임기를 모두 채우고, 다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에, 평화적으로 권력을 넘겨주게 됐다. 1947년 8월 영국 식민지배를 벗어난 인도에서 분리독립한 때부터 따지면 66년, 1956년 3월 이슬람공화국 수립 이후부터만 따져도 옹근 57년 만의 일이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제14대 국회의원(하원의원)과 펀자브·신드 등 4개 주의회 의원을 뽑은 이번 선거에는 모두 104개 정당이 난립했다. 양원제 국가인 파키스탄에선 하원 342석 가운데 직접 투표로 272석을 결정하고, 나머지 70석은 여성(60석)과 종교적 소수자(10석)에게 할당한다. 하원과 달리 재정정책에 간여할 수 없는 상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배정된 인원을 4개 주의회에서 선출한다.
2002년과 2008년에 치른 총선의 투표율은 각각 41.8%, 44%에 그쳤다. 선거 때마다 탈레반의 무장 공세가 기승을 부렸던 탓이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도 에사눌라 에산 파키스탄 탈레반 대변인은 ‘선거 보이콧’ 지령을 내렸다. 곳곳에서 유세장을 겨냥한 테러 공격이 불을 뿜어 줄잡아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투표 열기는 뜨거웠다. 파키스탄 선거관리위원회가 5월12일 잠정 집계해 내놓은 자료를 보면, 등록 유권자 8190만 명 가운데 4900만 명(약 60%) 정도가 투표에 참여했다. 동부 벵골 지역을 기반으로 방글라데시가 분리독립을 선언하기 직전인 1970년에 치러진 선거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이다. 결과를 살펴보자.
전체 272석 가운데 124석을 차지해 제1당에 오른 것은 ‘파키스탄무슬림연맹-나와즈’(PML-N)다. 집권여당 ‘파키스탄인민당’(PPP)은 3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선거운동 막판까지 여론조사에서 PML-N과 접전을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크리켓 선수 출신 임란 칸이 이끈 ‘파키스탄정의운동당’(PTI)은 27석을 확보했다. 이 밖에 개혁 성향의 ‘통일국민운동’(MQM)과 이슬람 성직자를 주축으로 구성된 보수 성향의 ‘자미아트 울레마 에 이슬람’이 각각 18석과 10석으로 두 자릿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의석은 무소속과 10여 개 군소 정당이 나눠가졌다.
무샤라프의 쿠데타로 실각 뒤 망명
‘부정선거’ 의혹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바람을 일으켰던 PTI 쪽은 개표 결과 발표 직후, 잇따라 부정선거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카라치·라호르 등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적어도 25개 선거구에서 선거 부정 사례가 드러났다는 게다. 그럼에도 ‘대세’가 뒤집힐 것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쪽에서조차 “역대 가장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른 선거”란 평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관심은 자연스레 차기 정부를 이끌게 될 인물로 모아진다. ‘펀자브의 사자’로 불리며 이미 두 차례나 총리를 지낸 미안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 말이다.
나와즈 샤리프는 1949년 12월25일 펀자브주 수도이자 파키스탄 제2의 도시인 라호르에서 태어났다. 부친 무함마드 샤리프는 파키스탄 최대 철강회사인 이테파크 그룹의 창업자다. 이 업체는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부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 시절인 1970년대에 국유화됐지만, 1980년대 초반 샤리프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 군사독재 정권이 되돌려줬다. 이후 이테파크 그룹은 설탕·제지·섬유 분야까지 사세를 넓히면서 파키스탄의 대표적 ‘재벌’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2010년을 기준으로 이 업체의 연간 수입은 4억달러를 넘어섰단다.
라호르의 가톨릭계 사학인 성 앤서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샤리프는 펀자브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81년 펀자브 주정부 재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울하크 군사독재 정권의 농촌개발기금의 70%를 펀자브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했다. 독재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부토 정권의 등장 등 1980년대 후반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야권 지도자로 떠오른 샤리프는 1990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하며 임기 5년의 총리에 취임했다.
집권 기간에 대규모 개발사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나름의 성과를 올린 샤리프는 권력 암투 끝에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1993년 4월 실각했다. 하지만 1997년 2월 치른 선거에서 다시 승리하며 두 번째 총리에 취임했다. 당시 선거에서 하원 의석의 3분의 2를 거머쥔 그는 개헌을 통해 의회 해산권과 총리 해임권을 명문화한 수정헌법 제8조 규정을 삭제했다. 이후 파키스탄 대통령은 명목적인 국가원수로 전락했고, 실권은 총리가 모두 거머쥐게 됐다.
대외정책도 강경했다. 인도의 핵실험에 맞서 독자적인 핵무장을 추진했고, 서구 각국이 원조 중단 등 경제제재에 나서자 외국 자산 동결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1999년 카슈미르 카길 지역의 무력 경쟁에서 인도에 밀리며 다시 한번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자신이 직접 임명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육군참모총장 해임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 때문이다.
섣부른 대응이었다. 무샤라프는 쿠데타를 감행했고, 샤리프는 권좌에서 또다시 축출됐다. 잠시 수감까지 됐던 그는 그해 10월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집권에 성공한 무샤라프는 다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정국을 개편했다. 샤리프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강한 경제, 강한 파키스탄’ 내세워
긴 망명 생활을 접고 샤리프가 귀국길에 오른 것은 2007년 11월25일, 2008년 1월로 예정된 총선 출마 후보 등록 시한을 불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귀국 즉시 샤리프는 총선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사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치적 위기를 자초한 무샤라프 정권은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였다. 하지만 부토 전 총리의 PPP 등 야권 대부분이 선거 참여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샤리프 역시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드주의 부토 가문과 펀자브주의 샤리프 가문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가던 선거 판세는 부토 전 총리가 유세 도중 테러범에 암살을 당하면서 격변하기 시작했다. 2008년 2월로 선거는 연기됐고, 무샤라프 정권은 테러범 소탕 작전을 구실로 선거 유세까지 막았다. 그럼에도 부토 전 총리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이끈 PPP와 샤리프의 PML-N은 각각 86석과 66석을 차지하며, 40석을 얻는 데 그친 무샤라프의 ‘파키스탄무슬림연맹-쿠아이드’(PML-Q)를 무너뜨렸다.
PPP 주도의 연립정부에 참여하면서 화려하게 정치권에 복귀한 샤리프는 즉각 무샤라프 축출을 위한 여론몰이에 나섰다. 2008년 6월 치른 재·보궐 선거에서 PML-N은 의석을 91석까지 늘리며 정치적 위상을 높였다. 그해 8월 파키스탄 하원은 마침내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했다. 샤리프는 탄핵은 물론 반역죄로 기소까지 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결국 무샤라프는 자진 사임한 뒤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지난 5년 PPP의 집권 기간에 파키스탄 경제는 줄곧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끝 모를 경기침체와 함께 극심한 전력난까지 이어지면서 일부 지역에선 하루 최대 18시간 동안 정전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2008년 한 해 85억달러에 이르던 외국인 직접투자는 2012년 5억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루피화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2008년 선거 당시 1달러에 63.1루피이던 환율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99.7루피까지 평가절하됐다. PML-N이 지난 1월5일 펴낸 선거공약집의 제목으로 ‘강한 경제, 강한 파키스탄’을 내건 것도 이 때문이다.
‘강한 경제’가 국내용이라면, ‘강한 파키스탄’은 나라 밖을 겨냥한 구호다. 샤리프의 파키스탄이, 무샤라프(와 자르다리)의 파키스탄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단체 외교관계위원회(CFR)는 지난 5월7일 내놓은 자료에서 “미국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단호히 맞서는 동맹세력을 원한다면, ‘샤리프 정권’의 등장은 단연코 실망스러운 사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슨 뜻일까?
“파키스탄 탈레반의 활동은 아프간 국경지대인 북서부 변경지대에 제한된 게 아니다. 인구가 많고 가장 번화한 펀자브주에서도 탈레반의 활동이 창궐하고 있다.” 는 2010년 6월3일치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샤리프의 텃밭인 펀자브주가 탈레반의 새로운 거점으로 떠올랐다는 게다. 앞서 그해 3월 샤리프의 친동생이자 PML-N의 2인자 격인 샤바즈 샤리프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탈레반과 PLM-N은 무샤라프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압력에 저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서로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샤리프와 탈레반이 ‘돈독한 관계’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다.
“미 무인항공기 폭격 좌시 않을 것”
“무샤라프 정권의 독재와 9·11 동시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간 침공이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강경세력이 몸집을 불리는 계기를 제공했다.” PML-N은 공약집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과의 관계가 이전과 다를 것이란 얘기다. 은 5월12일치에서 앤서니 코데스먼 전략국제연구센터(CSIS) 선임 연구위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샤리프는 파키스탄 탈레반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국과의 협력도 제한적일 것이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보냈다. 가뜩이나 소극적이던 아프간 탈레반 소탕 작전에 대한 파키스탄의 지원이 더욱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는 곧장 2014년 말까지 전투병력 철수를 추진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전략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음을 뜻한다. 파키스탄의 협조가 없다면, 당장 아프간에서 막대한 병력과 군사장비를 빼내오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다. 파키스탄이 병력과 장비 통과를 거부한다면, 험준한 산악지대를 뚫고 북쪽 중앙아시아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탓이다. 벌써부터 “샤리프 정권이 철수하는 미군에 거액의 ‘통행료’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군 이후 상황도 마찬가지다. 탈레반의 복귀를 막고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면, 파키스탄 쪽의 지속적인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단적인 사례가 지난 5월9일 아프간 국경지대인 페샤와르 고등법원이 내놓은 판결이다. 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도스트 무함마드 칸 재판장이 내놓은 판결문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했다.
“무인항공기 폭격은 불법이며, 비인도적이고, 국제 인권 규약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무고한 인명을 해치고 있으니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마땅하다. (파키스탄) 정부는 향후 무인항공기 폭격이 금지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국의 무인항공기 폭격을 비판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결의안을 이끌어내기 위해 외교부가 앞장서야 한다. 미국이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것까지 검토해야 할 것이며….”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들어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무인항공기를 이용한 ‘표적암살’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안팎의 비난이 커지고 있음에도, 파키스탄은 물론 아프간·예멘·소말리아 등지에서도 무인항공기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샤리프는 지난해 3월 캐머런 문터 당시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에게 “무인항공기를 동원한 폭격은 파키스탄 영토주권에 대한 도발 행위이자,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 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주장했다. 파키스탄 영자지 이 전한 내용을 보면, 샤리프는 “(집권하면 무인항공기 폭격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단다. 자칫 미국의 대테러 전략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무샤라프는 지난 3월24일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탈레반의 살해 위협에도 총선 출마를 통해 정계에 복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파키스탄 법원은 그의 출마 자격을 박탈했고, 부토 전 총리 암살사건 연루 혐의로 가택연금에 처했다. 망명길에서 돌아와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샤리프와 견줘볼 만하다.
‘포스트 빈라덴’ 시대에 초점
무샤라프 정권은 9·11 동시테러가 불러온 이른바 ‘포스트 9·11’ 시대에 미국의 충직한 동반자였다. 파키스탄은 대테러 전쟁의 병참이자 전진기지였다. 자르다리 정권 아래서도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샤리프 정권 제3기는 ‘포스트 빈라덴’ 시대에 초점을 맞출 공산이 커 보인다. 13년째 이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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