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대처 여사, 당신이 저지른 짓을 보시오

BBC ‘영국 사회계급 조사’ 발표… 1980년대 이후 노동계급 균열·분화 뚜렷, ‘연소득 1360만원·대졸자 비율 3.3%’ 불안정 노동계급이 인구 15% 차지
등록 2013-04-26 21:27 수정 2020-05-03 04:27

“제 뒤에 서 있는 밴드는, 이 트로피가 제게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겁니다. 틀린 얘깁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긴 했지요. …음악이, 어떻게 사람보다 중요할 수 있겠습니까? 이깟 트로피 받는다고,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수상을 거부한다면, 아마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뉴스에 한 줄이라도 나오겠지요.”
‘대니’의 말에 일순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대 앞에 있던 사진기자들의 스트로보(플래시)가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다. 마크 허먼 감독이 1996년 연출한 영화 의 클라이맥스는 이렇게 흘러간다. 대니는, 영국 북부 요크셔의 작은 탄광촌 마을 ‘그림리’의 브라스밴드 지휘자다. 그가 이끈 ‘그림리 밴드’는, 우리의 세종문화회관 격인 런던의 왕립 앨버트홀에서 열린 전국 브라스밴드 경연대회에서 막 1등을 한 참이다. 조금 길지만, 대니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자.
“물개나 고래였다면 이렇게 방치했을까”
“보셨죠? 제가 무슨 말 하는지. (플래시는 계속 터지고 있다.) 이제 그나마 사람들이 제 말에 귀기울이겠죠? 지난 10년 동안 이 빌어먹을 정부는 조직적으로 한 산업을 통째로 파괴했습니다. 우리의 산업, 바로 석탄산업 말입니다. 파괴한 건 산업만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삶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했습니다.
며칠 전, 이 밴드가 속한 탄광도 문을 닫게 됐습니다. 1천 명이 넘는 광산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잃어버린 건 일자리 뿐이 아닙니다.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이길 수 있다’는 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더는 싸울 엄두를 못 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살려는 의지, 숨을 쉴 의지마저 잃어버렸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이건 얘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가 만약 물개나 고래였다면, 여러분 모두 두 팔을 벌리고 살리려 나섰겠지요?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썩 괜찮은 인간일 뿐인데. 삶에 대한, 한 줌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대니가 말한 ‘빌어먹을 정부’는, 지난 4월8일 87살을 일기로 숨을 거둔 마거릿 대처가 이끈 보수당 정권이었다. 대처 전 총리는 과도한 사회복지 지출과 노동조합의 막강한 영향력, 그로 인한 임금 인상과 생산성 저하로 요약되는 이른바 ‘영국병’을 고치겠다는 공약으로 1979년 5월 집권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11년6개월여,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1990년 11월까지 이어진 대처 정권은 노동조합을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그 핵심이자 영국 산업의 근간이던 석탄산업이 철저히 짓밟힌 이유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곳곳에서 폐광이 잇따랐다. 의 시대적 배경은 1992년이다. ‘그림리’의 노동자뿐 아니라, 영국 전역에서 일자리를 잃은 광산 노동자가 유령도시로 변한 탄광촌을 떠나던 시절이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새삼 그의 ‘업적’을 들춰보는 이유다.
2011년 1월26일 는 대대적인 보도와 광고를 앞세워 ‘영국 사회계급 조사’(GBCS)를 시작했다.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설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상류층·중산층·노동계급 3단계로 나눴던 영국 사회의 계급 구조에 대한 21세기판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16살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도록 한 설문은 25분 남짓이 걸리도록 설계됐다. 내용을 살펴보자.
홈페이지에 등록한 뒤 참여하도록 돼 있는 설문의 첫 번째 질문은 ‘거주지역’에 관해서다. 지방 소도시의 개인 주택부터 도심의 대저택까지, 주거 형태와 거주 지역의 특성을 모두 15가지로 세분화해 선택하도록 했다. 이어 취미와 관심거리, 여가활동과 좋아하는 음악·음식 취향 등에 대한 문항이 촘촘히 이어진다. 교육 수준과 사회적 활동 등에 대한 질문과 교우관계와 주변인물의 직업 등을 묻는 항목도 등장한다.
영국 전역서 16만여 명 설문조사 참여
주로 대하는 신문·텔레비전·라디오, 인터넷 매체 등 언론에 대한 선호도 역시 개인의 계급을 가르는 주요 항목으로 등장한다. ‘14살 때 누가, 어떤 일을 해 가족을 먹여살렸는지’를 묻는 질문은, 사회적 배경을 유추하는 데 요긴했을 터다. 이어 지난 1년간 휴가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여행지와 숙박 형태까지 꼼꼼히 따져 기록하도록 했다. 소득수준과 신상정보도 빠질 수 없다. 마지막으로 부모 세대와 견줘 ‘사회적 이동 가능성’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등에 대한 질문으로 설문은 마무리된다.
조사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해 6월까지 영국 전역에서 모두 16만1458명이 조사에 참여한 게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전해받은 런던정경대(LSE)·맨체스터대를 비롯해 3개국 6개 대학 연구팀은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설문 참여자의 절대다수가 소득·교육 수준이 영국 사회 평균보다 높은 ‘전형적인 시청자층’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다국적 여론조사 전문기관 ‘GfK리서치’에 맡겨 계층별로 대표성을 지닌 1026명을 따로 심층면접해 조사 결과 ‘보정작업’을 벌여야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연구팀의 관심은 애초 한곳으로 모아졌다. 바로 ‘전통적인 계급 분류법’이 21세기에도 유효한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국 사회는 더욱 복잡하게 파편화했단다. 영국사회학회(BSA)가 4월15일 인터넷에 올린 최종 보고서를 보면, 전통적인 3계급 구조는 이제 ‘7계급’으로 세분화됐다.
최상위층은 영국 사회의 특권 집단인 ‘엘리트 계급’이다. 전체 인구의 6%를 점하는 이들은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자본’이 가장 많은 집단이다. 연평균 최소한 8만9천파운드(약 1억5천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14만파운드(약 2억4천만원) 이상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 기업체 고위 간부와 경영자, 변호사·펀드매니저·의사 등이 이 부류에 많은데, 좋은 집안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킹스칼리지 등 명문대 출신의 집중 현상이 뚜렷했단다.
두 번째 집단은 전체 인구의 25%를 점하는 ‘기성 중산층’이다. 경제·사회·문화적 측면에서 고루 ‘자본력’을 갖춘 이들은 평균 46살의 전문 기술직으로, 연평균 4만7천파운드(약 8천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며, 문화적 취향도 다양한 집단으로 분류됐다.
전통 중산층·노동계급 전체 인구 39% 머물러
이른바 ‘전통적 노동계급’으로 분류된 이들은 전체 인구의 14%에 그쳤다. 경제·사회·문화의 3개 평가 항목에서 고루 낮은 수준을 보인 이 집단의 평균연령은 66살, 연평균 수입은 1만3천파운드(약 2200만원)에 머물렀다. 그나마 주거용 부동산값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설문 참여자들은 주로 비서직군과 전기·전자 등 기술직, 돌봄서비스 노동자였다. 전통적 의미의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전체 인구의 39%에 그쳤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계급은 △기술적 중산층 △풍족한 신 노동계급 △신흥 서비스 노동계급 △불안정 노동계급(프리캐리아트) 4가지다. 계급별로 특징이 있는데, ‘기술적 중산층’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사회·문화적 자산이 적은 계급이다. 파일럿·약사·연구직 종사자 등이 대부분인 이들은 영국 사회의 6%를 차지한다.
‘풍족한 신 노동계급’은 영업직과 유통·부동산 업계 종사자가 많은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수준이지만 사회·문화적 욕구는 왕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대도시에 거주하는 ‘신흥 서비스 노동계급’은 이들에 견줘 상대적으로 경제 능력이 떨어지지만, 특히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사회·문화적 ‘자본’은 풍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요리사·간호조무사·보육교사 등이 다수인 이 부류는 평균연령이 34살로, 조사 대상 가운데 가장 젊은 집단이란다.
영국 사회의 최하층을 이루고 있는 집단은 ‘프리캐리아트’, 곧 불안정 노동계급이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가장 취약한 이 계급은 전체 인구의 15%를 점한다. 연평균 소득은 8천파운드(약 1360만원). 수적으론 엘리트 계급의 2배가 넘지만, 소득은 10분의 1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얘기다. 평균 예금액은 800파운드(약 136만원), 대학 교육을 받은 비율도 30명 중 1명꼴에 그친단다.
“대처 전 총리 집권 직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소득분배 구조는 독일·네덜란드와 엇비슷했다. 하지만 1980~90년대를 거치며 영국 사회는 미국·캐나다와 더욱 유사해졌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을 하루 앞둔 4월16일 인터넷 매체 영문판은 이렇게 전했다. 이 매체는 “2012년 말 네덜란드의 국가 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70%이며, 독일의 실업률은 5.4%에 그쳤다”며 “같은 시기 영국의 국가 채무는 GDP 대비 90%, 실업률은 7.8%였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영국병’이 사라졌다지만, ‘질병’이 사라진 것은 환자가 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탄광의 문을 닫아 건 것은 시장이 아니었다.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보수당 정권이었다. ‘부작용’은, 시장이 고치도록 내버려뒀다.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던 광산 노동자들은 ‘잉여 노동력’이 돼, 고스란히 고용시장의 ‘예비군’으로 흘러들었다. 가 “극도로 가난하지는 않지만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집단, 프리캐리아트는 결국 대처 전 총리가 남기고 간 유산”이라고 꼬집은 것도 이 때문이다.
16세기로 퇴행한 하층 노동계급의 처지
‘귀족(젠틀맨)-시민-자영농-노동계급.’ 일찍이 1577년 성직자이자 출판인이던 윌리엄 해리슨은 란 책에서 당시 영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크게 4가지로 구분했다. 인터넷 도서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gutenberg.org)에 실린 책 서문을 보면, 해리슨은 ‘국왕 바로 아래인 왕자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으로 귀족계급을 세분화했다. 그는 이어 “인종, 혈통 또는 도덕적으로 고귀한 집단”이라고 묘사했다. 대처 전 총리는 생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얻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정의는 어땠을까? 해리슨은 “일용직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 일부 땅이 없는 자영업자와 인쇄 보조공, 재단사, 구두수선공, 벽돌공 등”을 이 부류로 봤다. 트리스트램 헌트 영국 하원의원(노동당)은 지난 4월7일치 에 기고한 글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해리슨의 정의를 따 이렇게 적었다. “영국 사회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권위도 없는 집단. 누군가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지배를 받기 위해 태어난 계급.” 16세기의 노동계급이, 21세기의 ‘프리캐리아트’란 얘기다. 지금, 당신은 어떤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