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총선을 치르고도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구제금융에 딸려온 초긴축재정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 속에, 유로존 탈퇴와 국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까지 거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6월17일 재선거를 앞둔 그리스로, 유럽은 물론 지구촌의 눈과 귀가 쏠린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6월 들어 전세계 언론의 관심이 삽시간에 스페인으로 옮아갔다.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지난해 스페인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733억8300만유로를 기록했다. 그리스의 약 5배에 이르는 규모다. 유로존 17개국 가운데 스페인은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 이어 경제규모가 네 번째로 크다. ‘작은 나라’ 그리스의 위기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스페인이 구제금융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 경우, 자칫 유로존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너무 커서 구제할 수 없다?
유럽연합통계청(Eurostat)이 내놓은 최신 자료를 보면, 지난 4월 말 현재 스페인의 공식 실업률은 24.3%에 이른다. 같은 기간 유럽연합 평균치가 11%, 최악의 경제위기에 허덕이고 있는 그리스가 21.7%를 기록했다. 특히 스페인의 청년층 실업률은 50%를 오르내리고 있단다. 상황의 위중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의 위기 상황을 두고, ‘규모가 커서 망할 수 없다’(Too big to fail)는 말 대신 ‘규모가 커서 구제할 수 없다’(Too big to bail)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스페인 금융위기는 △과도한 부동산 담보대출 △갑작스런 경기 위축에 따른 부동산 가격 폭락 △이에 따른 부실채권 급증이란 3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부동산 경기 활황세가 장기간 이어지자 너나없이 싼 이자로 돈을 빌려 부동산 개발에 나섰다. 한동안은 거침없어 보였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번지자 부동산 시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2008~2012년 스페인 부동산 가격은 평균 25%나 폭락했다. 부실채권이 쌓인 것은 당연했다.
전세계 금융기관의 연합체인 국제금융협회(IIF)가 지난 6월1일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부동산 담보대출 부실화에 따라 스페인 금융권이 감당해야 할 손실 규모는 최대 2600억유로에 이른다. IIF는 보고서에서 “스페인 금융권의 전면적인 붕괴 상황을 막기 위해선, (GDP의 6%에 가까운) 약 600억유로가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보다 적어도 2배가 넘는 자금이 투입돼야 한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영국 일간지 은 지난 6월3일치에서 유럽 금융권 관계자의 말을 따 “적어도 1200억유로 규모의 신규 자금이 투입돼야, 스페인 금융권이 부실채권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GDP의 10%를 웃도는 금액이다.
‘위기’의 한가운데에 똬리를 튼 것은 2010년 12월 ‘카하 마드리드’와 ‘방카하’ 등 7개 저축은행(카하)이 합병해 탄생한 ‘방키아’다. 스페인 제4위의 은행으로 평가받는 방키아의 고객은 약 1200만 명, 수신고도 전체의 10%에 이른다. 이미 지난 5월 초 45억유로 규모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이 업체는 지난 5월25일 스페인 사상 최대 규모인 190억유로의 추가 구제금융을 당국에 요청했다. 불과 보름여 전 1차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때만 해도, 방키아 쪽에 필요한 추가 지원금의 규모는 50억유로 수준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 금융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스페인 정부의 금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유럽연합이 정한 재정적자 규모를 넘어선 스페인 정부로선 방키아 쪽의 요청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유럽중앙은행(ECB)의 구제금융을 받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방키아 쪽이 이를 ECB를 통해 현금화하는 일종의 ‘간접 구제’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사이, 방키아가 촉발한 시장의 불신은 스페인 금융권 전체로 번져갔다.
동시에 전해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때맞춰 전해진 불길한 소식은 시장의 불안에 기름을 부었다. ECB가 내놓은 최신 자료를 보면, 지난 1분기에만 스페인에서 빠져나간 외국자본이 970억유로에 이른다. 스페인 GDP의 10%에 육박하는 규모다. 국제 채권시장에서 스페인 국채(10년 만기물)의 이자율이 6.7% 선까지 치솟았다. 국채 이자율이 7%에 다가선 국가들은 그간 예외 없이 ECB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다. 퇴임을 앞둔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가 지난 6월1일 에 쓴 기고문에서 “유럽이 점점 유리를 깨고 비상 화재경보를 울려야 하는 쪽으로 다가서고 있다”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페인 정부는 금융기관을 통한 ‘간접 구제’ 방식을 고집했다. 직접 구제금융을 지원받으면, 그에 따른 초긴축재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탓인지, 결국 유럽연합이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스페인 일간 는 6월4일 인터넷 영문판에서 “유럽연합 고위층에서 (오는 7월부터 가동에 들어가는 5천억유로 규모의) 유럽안정화기구(ESM)의 자금을 금융기관을 통해 지원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전했다. ESM의 자금지원은 애초 각국 정부에 대한 직접 지원을 원칙으로 명문화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밝았다. 10억~20억유로의 자금조달을 목표로, 6월7일 스페인 정부가 지난 4월에 이어 두 달여 만에 국제 채권시장의 문을 두드린 게다. 국제사회는 숨죽이며 시장을 주시했다.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은 이날 “스페인 정부가 국제 채권시장에서 20억700만유로를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지난 4월 국채 발행 당시 5.74%(10년 만기물 기준)이던 금리가 6.04%로 0.3%포인트 오르긴 했지만, 2.56 대 1이던 채권 입찰 경쟁률은 되레 3.29 대 1로 높아졌다. 시장의 반응이 나쁘지만은 않았던 게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이날 유럽 각국의 주가는 △영국(FTSE 100) 64포인트(1.18%) △프랑스(CAC 40) 13포인트(0.42%) △독일(DAX) 50포인트(0.82%) 등 일제히 상승한 채 장을 마쳤다. 급한 불은 일단 끈 셈인가?
빚을 내려면 ‘신용’이 있어야 한다.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신용에 등급을 매기는 일은, 이른바 ‘빅3’로 불리는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가 한다. 미국에 본사를 둔 ‘스탠더드앤드푸어스’와 ‘무디스’,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 각각 본사를 두고 있는 ‘피치’가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제일 먼저 피치가 움직였다.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스페인 정부의 신용등급을 기존의 ‘A등급’에서 ‘BBB등급’으로 한 단계 하향 조정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내놓은 게다.
한 계단 추락하면 ‘정크 본드’
지난 4월 이 업체가 내놓은 ‘신용등급의 정의와 기타 옵션’이란 제목의 자료를 보면, 국가별 신용등급은 최고인 ‘AAA’부터 최하인 ‘D’까지 모두 11단계로 나뉜다. 이 가운데 AAA·AA·A·BBB 등 4개 등급을 묶어 ‘투자등급’이라 부른단다. 그 아래인 BB~D까지 7개 등급은 이른바 ‘투기등급’이다. 한 단계만 더 추락하면, 스페인 국채가 ‘정크본드’가 된다는 얘기다. 산 너머에 또 산이 있는 형국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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