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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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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해협의 긴장을 즐기는 자들

미국의 이란 원유 수출 제재로 높아진 호르무즈해협 긴장의 이면… 대선 앞둔 오바마 정부와 총선 앞둔 이란 보수파의 ‘적대적 공생’인가
등록 2012-01-19 15:44 수정 2020-05-03 04:26

지난해 세계 원유 생산량은 하루 평균 8800만 배럴이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유조선에 실려 5대양을 누볐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와 맞닿아 있는 말라카해협은 인도양과 대서양을 이어준다. 그곳을 통과해야 남중국해를 거쳐, 중국·한국·일본에 가닿을 수 있다. 2009년을 기준으로, 말라카해협을 거쳐간 원유 물량은 하루 1360만 배럴에 이른다. 말라카의 좁은 바닷길을 막아버리면, 동북아는 질식을 할 수밖에 없다. ‘숨통’이다.
북위 26도34분, 동경 56도15분.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이어주는 바닷길이 있다. 너비가 54km에 불과한 그곳에서 남쪽의 오만과 북쪽의 이란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 바닷길을 넘어서야, 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이라크를 만날 수 있다. 역으로, 그 바닷길을 통하지 않고는 이들 나라에서 생산된 원유가 너른 세상으로 나오기는 불가능하다. 호르무즈해협, 지구촌의 또 다른 ‘숨통’으로 부를 만하다.

아프간, 이라크에 이어 이란?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펴낸 자료를 보면, 지난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한 원유는 하루 평균 약 1700만 배럴에 이른다. 2010년에 견줘 하루 100만~150만 배럴이 늘어난 수치다. 바닷길을 통해 세계에서 유통된 원유의 35% 정도가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했단다. 기름을 가득 실은 거대한 유조선이 하루 평균 14척씩 그곳을 거쳐 세계로 나아갔고, 또 다른 14척의 텅 빈 유조선이 기름을 싣기 위해 그곳을 통과해 페르시아만 연안으로 갔다. 지구촌의 ‘숨통’을 찾는다면, 가장 먼저 바라봐야 할 곳이 호르무즈란 얘기다. 그곳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단 한 방울의 원유도 호르무즈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12월27일 이란 관영 은 모하마드 레자 라히미 이란 부통령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미국과 유럽이 추가 경제제재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비볼라 사야리 이란 해군사령관도 아랍 권위지 과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필요하다는 판단만 내리면,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하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을러댔다. 역시 추가 경제제재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이 무렵 이란 해군은 호르무즈해협 부근 자국 영해에서 열흘 일정으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었다.
나흘 뒤인 지난해 12월31일, 하와이로 연말 휴가를 떠나기 앞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도 미 국방예산안에 서명했다. 미 국방예산안은 예산이 필요한 국가안보 관련 정책 내용이 함께 명기돼 해마다 일반 법안(이른바 ‘국방수권법’)처럼 통과된다. 올 국방예산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란에 대한 강화된 경제제재다. 쉽게 풀어보면, 이란의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어떤 국가·기업·금융기관도 미국 금융기관과 거래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게 뼈대다.
이란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핵개발 의혹과 관련해 2006~2010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대이란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핵개발 의혹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거부하고, 우라늄 농축 활동을 지속한 데 따른 조처였다. 이에 따라 중화기 등 무기류 수입과 핵 관련 기술·장비 이전, 이란의 무기 수출 등이 금지됐다. 핵 활동과 관련된 이란 주요 인사와 업체의 자산도 동결됐다. 2010년 통과된 유엔 안보리 결의 제1929호는 이란이 핵 활동 관련 물질·장비를 수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을 임검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유럽연합(EU)의 자체 제재안도 여럿이다. 우라늄 농축에 사용될 수 있는 장비·부품의 수입을 제한했고, 핵 활동과 관련된 이란 주요 인물과 기관의 EU 자산도 동결했다. 또 정유와 천연가스 생산 관련 장비와 기술에까지 금수 조처를 내려, 사실상 이란의 원유산업에 타격을 가했다.

이란의 봉쇄 vs 미국의 행동
그리고 미국이 있다. 1980년 4월 테헤란 주재 자국 대사관 점거 사태 이후 이란과 외교관계를 끊은 미국은 이후 지속적으로 이란에 제재 조처를 부과해왔다. 테러지원·인권유린·핵개발 등 명분은 다양했다. 인도적 필요에 따른 의약품과 농산물 등을 제외하고, 미국은 이란과의 거의 모든 교역을 차단해놓은 상태다. 특히 지난해 11월 IAEA가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이 군사적 목적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은 뒤, 미국은 이란의 원유산업을 정면으로 겨냥하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이 2012년 국방예산안에 포함된 셈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중동 전문가 페페 에스코바르는 1월7일 인터넷 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란의 원유 수출 대금은 모두 중앙은행을 통하게 돼 있다. 그러니, “중앙은행과의 금융거래를 막는 것은 사실상 이란의 원유 수출을 봉쇄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게다.
수전 말로니 미 브루킹스연구소 사반중동센터 선임연구원은 1월5일 외교안보 전문지 인터넷판에 기고한 글에서 “외교관계 단절 이후 지난 30년 세월 유지해온 미국의 대이란 정책의 원칙은 압박과 설득이었다”며 “오바마 행정부의 이번 조처는 그 근간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말로니 연구원은 이어 “이란의 지도부와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상태까지 간 이상, 오바마 행정부는 앞으로 이란의 정권교체(레짐체인지)를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갔다”고 덧붙였다.
이란이 스스로 내걸었던 ‘해협 봉쇄’의 명분이 채워졌다. 이란은 끝내 지구촌의 숨통을 조이게 될까?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도 이란은 여러 차례 ‘해협 봉쇄’를 들먹였지만, 이를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해협을 따라 기뢰를 설치하긴 했지만, 군을 동원해 들고 나는 유조선을 가로막은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호르무즈해협은 이란에도 ‘숨통’이기 때문이다. 원유산업은 이란 수출의 80%, 정부 수입의 70%를 차지한다. 해협 봉쇄는 ‘자살행위’란 얘기다.
그럼에도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경제주간 는 1월11일 인터넷판 기사에서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의 말을 따 “이란 해군은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겠지만) 실제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전했다. 뎀프시 의장은 “이란은 호르무즈해협 봉쇄 능력을 갖추기 위해 꾸준히 투자를 해왔으며, 미국도 그런 이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를 계속해왔다”며 “이란이 해협을 봉쇄하면, 바닷길을 다시 열기 위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리언 파네타 미 국방장관도 1월8일 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호르무즈해협 봉쇄는 핵무장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레드라인’(한계선)”이라며 “이란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즉각 (군사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이프라인이 채우지 못하는 공백
미국과 이란은 호르무즈에서 실제로 충돌한 경험이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8년 4월14일 4200t급 미 구축함 USS 새뮤얼 로버츠호가 이란이 뿌려놓은 기뢰와 충돌했다. 선체에 7.6m 크기의 대형 구멍이 뚫려 난파할 뻔했다. 다행히 인명피해 없이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로 견인됐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흘 뒤인 4월18일 이란 해역으로 넘어가 군사작전을 펼쳤다. 구축함 1척이 완파됐고, 1척은 반파됐다. 고속정 6척과 군함 1척도 난파됐다. 2003년 11월6일 국제사법재판소는 당시 미국의 행동이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조처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어떤 이유로든 ‘짧은 기간’이라도 호르무즈해협이 막히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은 1월11일 인터넷판에서 “원윳값이 배럴당 200달러대까지 치솟으며 지구촌 경제가 다시 깊은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원윳값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총연장 약 1198km에 이르는 ‘동서 파이프라인’(페트로라인)을 이용해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압카이크에서 서부 홍해 연안으로 원유를 옮기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페트로라인의 하루 처리 능력은 약 500만 배럴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라크-터키 파이프라인을 통해 지중해의 항구도시 케이한으로 원유를 북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라크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여서, 이 역시 처리 능력이 제한적이다. 아랍에미리트가 야심차게 추진해온 하루 180만t 처리 능력을 갖춘 파이프라인은 오는 5월로 개통이 연기된 상태다. 호르무즈에 견줄 바가 아니란 얘기다.
전략비축분 원유를 동원할 수도 있다. 1991년 제1차 걸프전 당시 미국은 7억 배럴에 이르는 비축유를 풀었던 경험이 있다. 1973~74년 오일쇼크 당시 결성된 국제에너지기구(IAE) 회원국들도 90일치 분량의 원유를 비축해두고 있다. 은 1월6일 IAE 고위 관계자의 말을 따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면, 하루 1400만 배럴의 원유를 세계시장에 공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도 하루 300만 배럴 정도의 증산 여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기로 기회를 만드는 보수파
국제사회의 잇따른 제재에도, 이란은 새로운 우라늄 농축 시설 가동을 시작했다. 은 지난 1월8일 “이란 정부가 전폭기의 공습도 견뎌낼 수 있는 새로운 지하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시작했다”며 “테헤란 남부에 위치한 새 농축시설은 지하 90m 깊이의 벙커 형태로, 규모는 작지만 기존 시설에 비해 원심분리기 등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전했다. 상황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의 위기가 어느 정도나 깊어진 것인지는 헤아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위기가 누구에게 기회가 될지는 뻔해 보인다. 오는 3월20일 이란에선 총선이 치러진다. 이란 의회(마즐리스) 290석 가운데 195석(67.2%)을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다. 개혁파는 51석(17.9%)에 그친다. 이번 선거에선 마즐리스 의석이 310석으로 늘어난다. 2009년 여름 선거부정 규탄 시위 이후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 개혁파 쪽에선 출마자조차 많지 않을 것이란다. 이란 해군은 선거를 코앞에 둔 2월 또다시 미국을 겨냥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할 것이라고 이미 예고했다. 이런 걸 두고 ‘적대적 공생’이라 하는 건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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