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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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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발 ‘외교 쓰나미’ 덮치나

팔 자치정부, 9월 유엔 총회서 국가 승인 요청할 듯…국가 인정 땐 가자지구 등에 유엔 평화유지군 요청도 가능
등록 2011-09-22 16:57 수정 2020-05-03 04:26

팔레스타인에서 9월8일 한 캠페인이 시작됐다. 이름하여 ‘팔레스타인 국가 194’. 팔레스타인을 유엔의 194번째 회원국으로 승인해달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은 독립국가 승인 신청에 앞서 들떠 있다. 반면 국제정치 무대에서는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 신청을 놓고 “외교 쓰나미”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큰 파장이 예상되고 있다.

미국 반대해도 ‘비회원 옵저버 국가’ 가능

자료: <AFP> 등

자료:

팔레스타인은 공언한 대로 9월20일(현지시각) 뉴욕에서 개막하는 유엔 총회에서 독립국가 승인을 요청할 계획이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9월23일 총회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할 예정이다. 서안(웨스트 뱅크)과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등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을 기반으로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제안이다. 물론 팔레스타인이 완전한 독립국가로 승인받지는 못할 전망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상임이사국인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다른 선택이 남아 있다. 안보리를 거치지 않고 유엔 총회에서 결의를 채택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팔레스타인은 완전한 독립국가 대신 ‘비회원 옵서버 국가’(Nonmember Observer State)로 승인받을 수 있다. 193개 회원국 가운데 과반수가 찬성하면 된다. 팔레스타인이 1974년부터 갖고 있는 ‘옵서버 독립체’(Observer Entity)보다 승격한 지위다. 완전한 독립국가로 가긴 위한 디딤돌로, 현재 바티칸, 그리고 2002년 유엔에 19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기 전 스위스가 지녔던 지위다. 유엔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1988년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일방적으로 독립국가 수립을 선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팔레스타인이 유엔에 직접 호소하게 된 배경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팔레스타인은 그동안 이스라엘과 ‘지겹도록’ 평화협상을 벌여왔지만 독립국가 수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협상은 2010년 9월 정착촌 건설 문제로 갈등을 빚어 1년째 중단된 상태다. 당시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 동결’ 조처를 연장하는 걸 거부해 협상이 깨졌다. 팔레스타인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국가를 수립하려는데,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서안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강행한 탓이다.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200개 넘는 정착촌에는 50만여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47년 유엔 분할안(유엔 결의 181호)은 영국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땅을 2개 국가, 곧 각각 하나의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토록 결정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을 성취한 반면, 팔레스타인은 조상의 땅에서 쫓겨나는 ‘나크바’(대재앙)를 맞았고 독립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비극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7년 6일 전쟁 뒤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는 “이스라엘군이 최근 충돌에서 차지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명시했지만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1967년 전쟁 이전의 국경을 기초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와 서안을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하도록 했지만 이 또한 이스라엘은 지키지 않았다. 2003년에는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국가 건립을 뼈대로 하는 ‘중동 평화 로드맵’이 제시됐지만 마찬가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엔에 가지 말고 다시 협상 테이블로 오라’는 제안을 팔레스타인 쪽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사적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는 9월13일 사설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위한 합리적 조건들을 제때 수용하지 않아 아바스가 유엔으로 가는 구실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나빌 엘라라비 아랍연맹 사무총장의 인터뷰가 이런 정서를 잘 보여준다. 그는 9월7일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20년간 협상한 뒤 유엔에 직접 호소하는 게 무엇이 잘못인가? 이스라엘이 분쟁 종료를 원치 않기 때문에 협상을 하더라도 향후 20년간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 채 보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상호 국가 존재의 인정 및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영토 분할 등 서로 타협하기 어려운 쟁점과 뿌리 깊은 불신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갈등 해결의 출구를 찾기 어렵게 하고 있다.

아랍권 등 130개국 지지…미·이스라엘 난감

팔레스타인의 독립국 승인 추진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아랍권을 포함한 약 130개국은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지지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9월13일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며 “팔레스타인 국기가 유엔에서 게양될 때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움직임을 비난하면서도 명확한 대응 조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팔레스타인이 유엔 총회에서 국가 승인을 요청할 경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신해서 걷고 있는 세금 및 관세 수입의 이전을 중단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스라엘 항구를 통해 팔레스타인 시장으로 들어가는 상품들에 대한 관세수입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재정수입의 약 3분의 2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이동 제한 및 정착촌 건설 확대 등도 강경책도 점쳐지고 있다. 아비그도르 리에베르만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팔레스타인의 조처가 향후 협상 가능성을 사라지게 해 “가혹하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외교적 쓰나미’라는 표현처럼, ‘비회원 옵서버 국가’지만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받으면 국제 외교 무대에 큰 파장이 일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네스코(UNESCO) 등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는 경우다. 이스라엘의 점령 및 정착촌 건설, 2008~2009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등과 관련해 이스라엘 군이나 정부 인사를 제소할 수 있다. ICC는 그동안 팔레스타인이 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사를 벌이지 않았지만, ICC 수석검사 루이스 모레노오캄포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의 지위가 승격될 경우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팔레스타인이 서안과 가자지구에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을 요청할 경우, 1967년 이후 두 지역을 점령 및 통제하고 있는 이스라엘군과 갈등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훤하다.

‘외교적 쓰나미’를 맞기는 미국도 이스라엘 못지않다. 미국이 그동안 주도해온 대화를 통한 중동 평화협상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팔레스타인이 사안을 유엔 총회가 아니라 예상을 깨고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는 경우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아랍의 봄’ 이후 이 지역에서 새로운 입지를 다지려는 미국으로서는 아랍권과의 관계 악화 등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거부권 행사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원조 중단 등의 조처는 아랍권의 거센 반발로 이어질 게 뻔하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인 투르키 알파이살 전 미국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가 9월11일 에 기고한 글은 그 파장을 잘 보여준다. 그는 미국이 유엔에서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미국의 영향력은 더 줄어들고, 이스라엘의 안보는 취약해지고, 이란의 세력을 키움으로써 중동에서 또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도 과거처럼 미국에 협조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미국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직접대화를 강조하는 한편으로 팔레스타인에 데이비드 헤일 중동특사를 보내 아바스 수반을 만나도록 하는 등 국가 승인 신청을 철회하도록 막판까지 설득 작업을 펴고 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에 한해 약 5억달러에 이르는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팔레스타인의 조처가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물을 늘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쪽은 “어딘가에서 혹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확실한 방안을 내놓는지 지켜보겠다”며 막판까지 미국의 애를 태웠다.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고 1967년 6일 전쟁 이전 국경을 토대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관한 협상에 나서 향후 국가 건설 일정 등을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외교적 파장과 별개로 당장 급한 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고조된 긴장이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최근 서안 등에서 자동차에 불을 놓고 올리브 농장 등을 습격하는 등 팔레스타인 쪽을 자극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유대인 정착촌 공격 등을 우려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유엔 총회에 맞춰 서안 등에서 국가 승인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일 예정이어서 양쪽의 유혈 충돌 가능성도 있다. 가뜩이나 최근 이집트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이 습격을 당하고, 터키에서 이스라엘 대사가 추방되는 등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긴장이 높아진 상태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 신청이 이스라엘의 보복 조처로 이어질 경우,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2000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아라파트 PLO 의장과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가 직접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 도출에 실패한 뒤 수년간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 테러, 이에 맞선 서안과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공격 등이 이어져 수천 명이 희생됐다.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 악순환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경우다.

이-팔 양자협상 없인 현상 타개 어려워

문제는 유엔 총회 이후다. 팔레스타인으로선 유엔 총회에서 한 단계 높은 ‘국가’ 지위를 얻더라도,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어야 실체적 의미가 있다. 결국 중동 평화와 2개 국가 공존을 위해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양자 간 직접 협상이 불가피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9월12일 “유엔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언론의 관심을 받겠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는 실제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 총회 이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미국의 ‘2인 3각’식 협상 테이블이 기다리는 셈이다. 역사가 보여주는 바, 그 협상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아랍권의 희망대로 ‘국가 대 국가 협상’의 새로운 패러다임까지는 아니더라도, 팔레스타인이 지금까지보다는 좀더 대등한 위치에서 테이블에 앉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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