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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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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 마오타이에 취하다

공산당과의 인연으로 ‘국주’에 오른 마오타이…

환경오염 심각하고 가짜 판쳐도 자부심 여전한 생산지 마오타이진을 가다
등록 2011-02-17 15:24 수정 2020-05-03 04:26

‘중국 제1의 술 고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중국 내륙 구이저우성 서북부의 한 산골마을 마오타이진.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입간판이 찾는 이를 맞는다. 중국 최고의 술 브랜드인 마오타이(茅台)를 생산하는 마을의 자부심이 한껏 담긴 환영 문구다.
마오타이진이 속한 런화이시는 구이저우성 수도인 구이양시에서 216km 떨어진 오지다. 길이 험해 자동차로 5시간 넘게 걸린다. 하지만 런화이시는 구이저우성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다. 지난해 런화이시의 지역 총생산액은 190억위안(약 3조23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인구 63만 명의 작은 내륙 도시가 거둔 경제 성적으로는 만만치 않은 성과다.

마을의 한 해 총생산액 1조3천억원
런화이시는 12개의 진과 6개의 향으로 구성됐지만, 마오타이진에서 거두는 재정수입이 독보적이다. 지난해 런화이시 정부는 마오타이진 한 마을에서만 5688만위안(약 96억690만원)의 지방세를 거뒀다. 런화이 전체 지방세 수입의 45%에 해당한다.
지난해 마오타이진의 지역 총생산액은 78억4천만위안(약 1조3328억원). 구이저우성의 향·진 가운데 가장 많다. 주민 1인당 총소득도 1만7850위안(약 303만원)에 달해 구이양시를 제외하고 최고 수준이다. 마오타이진이 구이저우성에서 가장 잘사는 마을이 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중국에서 ‘국주’(國酒)로 불리는 마오타이주의 생산지이기 때문이다.

마오타이 공장 정문에 ‘국주 마오타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마오타이 공장 정문에 ‘국주 마오타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중국은 오랜 역사만큼 기나긴 술과 음주의 문화를 지녔다. 어느 지방을 가든 지역 특색을 지닌 술이 있고 독특한 음주 문화가 있다. 2010년 현재 중국 공상관리국에 등록된 주류 공장은 3만7천여 개. 중대형 기업만도 1100여 개에 달한다. 중국 전통주는 제조 방법이나 발효 방식에 따라 바이주(白酒), 황주(黃酒), 바오젠주(保健酒) 등으로 나뉜다. 바이주는 중국 술을 대표하는데, 수수를 주원료로 다양한 곡식을 더해 누룩으로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든다. 우리에게는 중국 북방식 발음인 ‘배갈’(白干兒) 혹은 ‘고량주’(高梁酒)로 잘 알려졌다. 색깔이 투명하다고 하여 ‘바이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카치위스키, 코냑 브랜디와 더불어 세계 3대 증류주 가운데 하나다.

바이주는 다시 향과 숙성 기간에 따라 농(濃), 장(醬), 청(淸), 미(米) 등으로 분류된다.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농향형 술은 맛이 강하면서 풍부하다. 최근 중국에서 생산되는 바이주의 70% 이상이 농향형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우량예(五粮液), 수이징팡(水井坊) 등이 여기에 속한다. 장향형은 깊은 간장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술이다. 마오타이가 그 대표 주자다. 청향형은 맑고 산뜻한 맛이 특징이다. 산시성 펀양시 싱화진이 주 생산지인 청향형 술 펀주(汾酒)는 1500년의 역사를 지녔다. 시인 두목(杜牧)은 시 ‘청명’(淸明)에서 “청명절에 가는 비가 내리니 행인들 마음은 울적하네/ 술집은 어디에 있는지 물으니 목동은 저 멀리 싱화촌을 가리키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다른 바이주를 뒤로하고 마오타이가 국주의 명예를 차지하게 된 데는 오랜 제조 역사와 공산당과의 깊은 인연이 자리잡고 있다. 마이타이진에서 술이 생산된 것은 기원전 2세기부터다. 한무제가 남방 정벌을 위해 파견했던 장군 당몽(唐蒙)은 “런화이 츠수이허(赤水河) 일대에서는 곡식을 발효해 맛 좋은 술을 제조한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당나라 때에는 마오타이진의 술이 조정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지정됐다. 이때부터 원나라 때까지 술 생산을 관부가 독점했다. 명말청초 한족 이주민이 런화이시로 대량 유입되면서 수많은 민간 술도가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다. 19세기 초 마오타이진에서는 20여 개의 이름난 술도가가 성업 중이었고, 한 해 생산량은 170여t에 달했다.

부자들의 신분 과시용 ‘명품’

마오타이가 세계에 이름을 처음 떨친 곳은 1915년 파나마운하의 개통을 기념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장이었다. 중국 술을 대표해 출품돼 당당히 금상을 받았던 것. 마오타이진에서 생산되는 술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 라이마오(賴茅)의 구이저우성 쭌이시 판매법인 장위헝 대표는 “처음에는 단순하고 투박한 병 모양 때문에 관람객의 외면을 받았지만 우연히 병 하나가 깨져 술 향기가 박람회장에 퍼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소개했다.

1935년 홍군(紅軍·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과의 만남은 마오타이가 국주의 지위에 오른 계기가 됐다. 당시 국민당군에 쫓겨 대장정에 나섰던 홍군은 마오타이진을 가로지르는 츠수이허에서 네 차례에 걸친 도강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은 마오타이를 이용해 소독하고 치료했다. 도강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홍군 장병들은 마오타이를 마시며 승리를 자축했다.

당시의 추억을 잊지 못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1950년 사회주의 정권 수립 1주년 기념연회에서 마오타이를 국빈 연회 술로 지정했다. 1952년 바이주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 열렸던 제1회 전국술평가회에서는 마오타이가 펀주, 루저우다취(瀘州大曲), 시펑주(西鳳酒)와 함께 중국 4대 명주로 등극했다. 그 뒤 술평가회가 네 차례 더 열리고 4대 명주가 8대 명주로 늘었지만, 마오타이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1972년 마오타이는 전세계인의 주목을 다시 받았다.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에게 저우언라이는 마오타이를 대접하며 냉전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1979년 재방한 닉슨을 맞이한 덩샤오핑이 내놓은 만찬주도 마오타이였다. 덩샤오핑이 마오타이의 열렬한 팬이었던 김일성 북한 주석에게 마오타이 한 상자를 선물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훙량훈 본사 직영 판매점에 술이 전시돼 있다. 훙량훈은 마오타이의 인기를 등에 업고 판매량을 늘려가고 있는 술 제조사다.

훙량훈 본사 직영 판매점에 술이 전시돼 있다. 훙량훈은 마오타이의 인기를 등에 업고 판매량을 늘려가고 있는 술 제조사다.

마오타이진에서는 중국 바이주의 태두라는 자부심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구이저우성 정부에서 운영하는 ‘마오타이주식회사’ 공장 정문에는 ‘국주 마오타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역대 사회주의 정권 최고 지도자의 모습이 부감돼 있다. 1만㎡에 달하는 공장 안에는 1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다. 마오타이진 전체 주민이 4만9천 명인 점에 비춰볼 때 적잖은 수다. 후궈량 마오타이 영업부 매니저는 “공장 노동자의 대부분은 마오타이진과 런화이시 출신”이라며 “관련 산업 종사자까지 합치면 대략 4만~5만 명의 현지 주민이 마오타이와 함께 살아가며 그 혜택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생산라인 노동자 왕밍은 “중국 내 다른 농촌과 달리 마오타이진에서는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나가는 주민이 거의 없다”며 “마오타이 공장에서 일한 경력을 밑천 삼아 술도가를 열거나 장사를 하는 이가 많다”고 밝혔다.

오늘날 마오타이진에는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술 제조사가 성업 중이다. 2001년 문을 연 훙량훈(紅梁魂)도 그중 하나다. 현지인 출신인 양광융 사장은 마오타이 공장에서 18년간 일한 경력이 있다. 양 사장은 “마오타이진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한 집 건너 술을 담글 정도로 역사가 깊고 기술이 축적돼 있다”며 “마오타이 공장에서 배운 대량생산 기술과 현대적 관리 방식이 회사 운영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독자 브랜드 ‘100년 춘장(純醬)’을 생산·판매하는 라오장구이(老掌櫃)의 청빙치 매니저는 “외부에서 투자 손길이 줄을 잇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마오타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베이징·상하이·광둥 등지에서 돈뭉치를 싸들고 찾아오는 투자자가 일주일에만 3~4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1월1일 마오타이는 53도짜리 500g의 공장 출고가가 이전보다 20% 오른 619위안(약 10만5230원)으로 인상됐다. 마오타이의 소비자 판매가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1400~1600위안에 형성돼 있다. 중국 도시 노동자의 월평균 수입이 2600위안임에 비춰볼 때, 서민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가격이다. 마오타이의 가격 인상은 이번만이 아니다. 2009년 말 900위안대였던 소비자가격은 지난해 두 차례에 걸친 가격 인상으로 30%나 뛰어올랐다. 겉으로는 지난해 봄 중국 서남부 지역을 엄습한 가뭄 피해를 가격 인상 이유로 내세우지만, 중국 언론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을 악용한 것”이라고 질타한다.

과밀화·오염 심각하자 주민 강제 이주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한 중국은 고소득층과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중국인들은 경제적 신분 상승을 과도한 소비로 거리낌 없이 과시한다. 마오타이주의 연간 생산량은 20만t. 해마다 생산규모를 조금씩 늘리고 있지만, 소비자의 수요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이 때문에 일부 부자들은 마오타이를 명품의 하나이자 신분 과시물로 애용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등에 업고 런화이시에서는 시 이름을 아예 마오타이로 바꾸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런화이시 인민대표 82명은 시 명칭을 런화이에서 마오타이로 개명할 것을 중국 정부에 청원했다. 이 청원을 중앙정부가 받아들이면, 12세기 송나라 이래 쓰였던 런화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광풍과 같은 인기몰이에도 불구하고 마오타이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다. 무엇보다 날로 악화되는 마오타이진의 자연환경과 후발 주자들의 거센 도전이 전망을 불투명하게 한다. 전체 면적 5만㎡에 불과한 마오타이진에는 1만6천여 명의 주민이 마오타이 공장 주변에 몰려 산다. 여기에 다른 술 제조공장과 소속 노동자들까지 합치면, 지역 과밀화가 웬만한 대도시 수준을 넘어섰다. 게다가 공장과 민가에서 버려지는 오폐수로 중국 최고의 수질을 자랑했던 츠수이허는 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급속한 도시화로 술 제조의 주원료인 수수와 다른 곡식을 경작할 땅도 찾기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마오타이가 최고의 명주로 이름을 떨친 원천이던 ‘깨끗한 물, 양질의 토양, 적당한 기온’이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마오타이진 정부는 지난해 11월 1만여 명의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2009년 말부터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해, 2015년까지 단계적으로 주민을 이주토록 한 것이다.

바이주의 주류를 형성한 농향형의 대명사인 우량예와 수이징팡의 고속 성장은 마오타이도 무시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2000년 시장에 등장한 수이징팡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마오타이와 어깨를 겨루는 고급 바이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수이징팡은 13세기 원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술을 생산했던 양조장 유적지에서 곡식을 직접 발효해 술을 생산한다. 라이덩이 수이징팡 부사장은 “수이징팡은 깊은 역사적 배경과 오묘한 미생물이 빚어낸 독특한 향기, 품주사(品酒師) 30여 명의 혀끝을 거쳐 낸 맛이 마오타이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발견되는 가짜 마오타이도 큰 골칫거리다. ‘시중에 나도는 마오타이 중 90%가 가짜’라는 통념이 있을 정도로 가짜가 많다. 심지어 가짜 생산을 위한 빈 병이 300~400위안에 거래되는 실정이다.

국주는 망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논란과 위기 속에서도 마오타이진 주민들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마오타이주의 뛰어난 품질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양광융 사장은 “마오타이는 먼저 곡식을 아홉 번 쪄서 누룩으로 만들고 발효시킨다. 증류해서 만들어진 술은 최소 3년간 밀봉 보관해 숙성시킨다. 이런 정성과 노력은 타 지방 술이 결코 따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국주도 망하지 않는다’(中國不倒, 國酒不倒)는 마오타이진 사람들의 장담처럼 그 명성이 지속될지 주목된다.

구이저우(중국)=모종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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