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은 대통령궁으로 몰려들었다.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초토화한 지진이 강타한 뒤였다. 시민들은 르네 프레발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나서 불안에 떠는 국민을 안심시키고 ‘희망을 잃지 말고 함께 손을 맞잡자’고 말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날 지진 대책을 진두지휘할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 도피설이 나돌았다. 얼핏 백악관을 닮은 하얀 지붕의 대통령궁이 무너질 때 가뜩이나 취약하던 아이티의 정부 기능은 멈췄다.
지진과 함께 멈춘 정부 기능
아이티는 지진 참사 1년을 앞두고 있지만, 재건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지난 1월4일 아이티 이재민들이 임시 수도시설에 모여 물을 받고 있다.연합 AFP
1월12일로 카리브해 아이티에 규모 7.0의 대지진이 일어나 23만여 명이 숨진 지 1년째다. 1300개의 천막촌에는 아직도 100만 명의 이재민들이 살고 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팸은 상수도 등 기초시설의 15% 정도만 복구됐다고 1월5일 밝혔다. 는 1월3일 댄서가 한쪽 다리를 잃은 채 살아가고, 치안 불안 속에서 또다시 성폭행을 당할까 우려한 여성은 지방으로 달아났다고 전했다. 엎친 데 덮친 꼴로, 지난해 10월 중순 발생한 콜레라로 지난해 12월30일 기준 14만9천여 명이 감염돼 3300여 명이 숨졌다. 최근 사망자가 급격하게 늘면서, 앞으로 40만 명이 콜레라에 감염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신문은 “고난의 1년이 지났지만, 희망을 가질 이유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1년 전 그날처럼, 지금도 재앙 극복을 진두지휘하는 정부는 없다. 지난해 3월부터 아이티에서 구호활동을 펴고 있는 국제구호개발비정부기구(NGO) 굿네이버스의 권기정 지부장은 1월5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 “구호단체들이 도우려 해도 정부와 협력이 안 돼 힘들다”며 “지진 발생 당일 나타나지 않았던 현 대통령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고 말했다. 한 아이티 목사는 외신 인터뷰에서 “주위가 온통 파괴되고 콜레라가 나도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 논란을 지켜보는 국민이 믿을 곳은 신뿐”이라며 “신이 아이티의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지도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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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뒤 국제사회는 아이티 재건 국제회의에서 약 100억달러를 지원하기로 하고, 이 가운데 61억7천만달러를 2010~2011년에 집중시키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2010년 약속한 지원금 가운데 지난해 11월까지 42%만 실제 지원됐다고 유엔이 밝혔다. 미국은 10억달러의 재건비용 지원을 2011년까지 연기했다.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는 아이티의 대재앙에 다른 재난보다 많은 지원금을 약속했지만, 실제 집행은 2004년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피해 당시보다 느리다고 지적했다. 약속한 지원액과 실제 지원 규모에 일반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이번엔 특별히 더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제 지원이 약속보다 적은 최대 원인으로 아이티 정부의 국정관리 부실과 국가통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지적된다. 옥스팸은 1월5일 “아이티 정부가 우유부단한데다 지원국 간의 공조까지 안 돼 진척이 느리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제대로 기능해야 지원국 간의 공조를 끌어낼 수 있다. 재해 복구를 위해서는 지원금 못잖게 정부의 강력한 복구 의지, 정부에 대한 신뢰, 정부와 민간 부문의 협력 등이 중요 조건으로 꼽힌다. 해당 정부가 살려고 발버둥쳐야 다른 나라가 도와주기 마련이다. 정부의 재난 복구 의지는 미약하고 지원금은 제대로 쓰이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은 추가 지원을 망설이게 만든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지진이 수도에서 발생해 정부기관이 타격을 받은 탓도 있지만, “아이티 정부의 능력이 지진 발생 이전에도 크게 부족했다”며 “고난의 역사, 지도력 부재, 정당 난립, 대중의 불신이 지진 대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페인·프랑스·미국의 점령과 착취
아이티 정부는 왜 이렇게 취약할까? 질곡의 아이티 역사가 실마리다. 제국주의 열강의 아이티에 대한 착취는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서 이스파뇰라섬(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가혹한 착취에 황금과 함께 원주민들도 거의 사라져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의 관심이 멀어지자, 이번에는 프랑스가 입맛을 다셨다.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1697년 이스파뇰라섬의 서쪽 3분의 1을 넘겨받았다. ‘생도맹그’, 오늘날의 아이티다. 프랑스는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콩고·앙골라 등 서부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해마다 수만 명씩 수입했다. 18세기 말 생도맹그의 흑인노예는 약 50만 명에 이르렀다. 1780년대 생도맹그는 프랑스 식민지 전체 생산량의 3분의 2, 대외교역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 무렵 유럽 전체 설탕과 커피 소비량의 각각 40%와 60%를 공급할 수준이었다. 대농장에서 흑인노예들을 잔혹하게 착취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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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는 1789년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1791~1803년 혁명을 거쳐 1804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프랑스는 1801년 나폴레옹이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지만 아이티의 독립을 막지 못했다. 독립의 기쁨은 잠시뿐, 그것은 스페인에서 시작된 식민지배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전되는 고단한 역사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프랑스는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대농장 소유주 등 자국민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1825년 1억5천만프랑을 함대의 무력을 앞세워 강요한 것이다. 1844년 9천만프랑으로 감액됐지만, 신생국 아이티는 내전과 혁명으로 찢긴 나라를 재건하는 데 투자할 돈도 모자란 판에 막대한 부채를 떠안았다. 아이티가 이 배상액을 다 갚는 데 1947년까지 120년 넘게 걸렸다. 노예해방 확산을 우려해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한 미국은 식민지배의 산물인 인종갈등 등으로 아이티에서 대통령 축출 사태가 이어지자, 1915년 정치적 혼란과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군대를 보내 점령했다. 실제로는 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잠수함 기지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미국 자본가들은 1934년까지 지속된 미군정하에서 아이티 경제를 장악했다.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몰려들면서 아이티 농업경제는 무너졌다. 프랑스와 독일의 자본가들도 덩달아 날뛰었다. 아이티 정부와 엘리트들은 이런 착취 과정에서 눈먼 돈을 챙겼다. 프랑수아 뒤발리에(파파독)와 장클로드 뒤발리에(베이비독) 부자가 1957년부터 86년까지 30년에 걸쳐 독재의 칼을 휘둘렀지만 미국은 묵인했다. 미국은 냉전 시기 아이티가 쿠바처럼 공산화될 것을 우려해 오히려 독재 정권을 지원했고, 그사이 아이티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아이티 정부의 밑기둥은 부패한 지도자와 함께 썩어갔다.
1990년 12월 첫 민주적 선거를 통해 반독재운동가, ‘빈민의 사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미국은 다음해 9월 그를 축출하는 군사 쿠데타를 도왔다. 그는 1994년 복귀하지만 2004년 다시 쿠데타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아이티는 1804년 독립 이후 55명의 최고 지도자를 거쳤지만, 서른 번이 넘는 쿠데타 등으로 임기를 채운 사람은 9명밖에 안 된다. 스페인·프랑스·미국으로 이어지는 점령과 착취, 내정간섭 속에서 아이티의 정부 기능은 무너졌다. 국가 지도자가 외채 갚기에 허덕이고 독재를 후원받는 속에서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지도자는 나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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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민주주의와 탄탄한 경제 발전은 그림의 떡이었다.
1804년 흑인노예들의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을 세웠던 아이티는 이렇게 중남미 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진흙 케이크를 먹고 사는 부패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아이티는 식민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촘스키, 랑시에르 등 프랑스에 배상 요구
오랜 기간 지속된 아이티 정부의 마비는 현재 대선투표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혼란에 그대로 비친다. 지난해 11월28일 치러진 대선의 결선투표가 1월16일 열릴 계획이었지만, 2월 말 이후로 연기가 불가피하다고 지난 4일 선관위가 밝혔다. 2월7일이 차기 대통령 취임 예정일인데도, 19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치른 1차 대선투표 결과를 집권당의 선거부정 의혹과 폭력 논란 등으로 아직도 확정짓지 못한 것이다. 혼란을 수습해야 할 프레발 대통령은 과거에 자신도 취임이 늦어졌다며, 3개월 정도 대통령 자리에 더 머물겠다고 밝혀 분노를 사고 있다.
아이티에 지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티 독립운동가이자 흑인해방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령관으로 1790년 이래 노예해방전쟁을 지도하며 영국·프랑스군과 싸웠다. 그는 1793년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1804년 독립의 꿈을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티에 남은 것은 그의 후계 지도자가 아니라 동상뿐이다.
지진 참사 2주년이 되는 2012년 1월에는 지금의 혼란을 헤치고 아이티를 이끌 지도자와 정부가 등장할까?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등 지식인 90명은 올해 프랑스 일간지 에 게재한 공개서한에서 프랑스 정부가 170억유로의 배상금을 아이티에 지급해 식민지배의 잘못을 책임지라고 요구한 바 있다. 아이티가 프랑스에 배상했던 9천만프랑에 물가상승과 이자를 따진 액수다. 배상 가능성이 꿈같은 현실에서, 지진 복구 지원금이라도 약속대로 보내는 게 ‘제2의 루베르튀르’의 등장 가능성을 빼앗아간 과오에 책임을 지는 길이다. 프랑스는 지난해 11월 현재 약속한 금액의 35.7%만 실제 지원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굿네이버스 아이티 지부장 인터뷰. 권기정 제공
굿네이버스 아이티 지부장 인터뷰
“따뜻한 관심으로 희망이 되어달라”
아이티 최대 빈민지역인 시티솔레에서 보건·환경개선 지원사업 등을 펴고 있는 권기정 굿네이버스 아이티 지부장은 콜레라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지진 극복과 재건의 희망을 꺾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재건사업은 어느 정도 진척됐나.
많은 부분 재건이 못 이뤄져, 굳이 수치로 말하자면 잘해야 20~30% 복구됐다. 보호단체들이 복구사업을 하려고 해도 정부와 협력이 안 된다. 재건사업에는 토지 이용이 중요한데, 사유지가 대부분이고 공유지가 거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지진에 이어 콜레라라는 새로운 재난이 터져, 재건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콜레라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니까 콜레라 예방사업에 구호 노력이 집중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부정 논란에 따른 유혈 폭동 등 정치적 불안까지 겹쳐, 복구사업이 많이 늦어지고 있다.
콜레라 전염이 심각한데.
환자가 10명이면 의약품은 7명 분량만 있고, 의료진은 4명을 치료할 인력밖에 안 되는 상황이다. 공식적으로는 3천여 명이 감염돼 사망했다는데, 구조 현장에서는 최소한 그 2~3배가 숨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진 이상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의료진 등 인력 지원이 절실하다. 그래도 재건 지원 열기가 식어가다가 콜레라가 터지면서 다소 활기를 띠는 면도 있다.
열악한 오·폐수 처리시설이 콜레라 확산의 이유라는데.
보건위생이 너무 열악하다. 부유층 거주지역을 빼면 생활하수 시설이 없어 오·폐수가 땅으로 흘러 들어가고, 텐트촌에 모여사니 질병이 쉽게 전염된다. 화장실도 많지 않고 화장실 사용에도 익숙하지 않다. 2월 말께 우기가 시작되면 오·폐수가 넘쳐 콜레라가 확산될 게 우려된다.
일상적 삶은 여전히 어렵겠다.
건물 재건은 많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삶은 일상으로 많이 돌아왔다. 소·도매상과 보따리 장사가 상업의 주류인데, 이들이 난전에서 장사를 해서 상업 기능은 많이 정상화됐다. 집을 새로 짓지 못했지만 과거에도 집들이 변변찮아서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 캠프촌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음식과 물이 공급돼 오히려 지진 전보다 생활이 나아진 이도 있다. 텐트촌에 사니까 절도나 성폭행 등에 쉽게 노출돼 치안이 나빠진 게 문제다.
1년 가까이 구호활동을 한 소감은.
희망적인 나라다. 절망스럽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일하려 몰려들고 열심히 일한다. 희망과 변화의 의지가 있는데 콜레라가 발병하면서 희망을 꺾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콜레라 등 큰 문제 때문에 아이들의 영양실조 등 작은 문제들이 묻히는 게 안타깝다. 좀더 따뜻한 관심을 보낸다면 아이티인들이 희망을 갖고 고난과 역경을 넘어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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