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년 만이다. 옷통 벗은 한 시민이 타이 방콕 시내로 들어오는 탱크 위에 뛰어올라 온몸으로 총구를 막던 모습이 전파를 탄 지 1년 만에 군인들은 또다시 방콕 도심으로 탱크를 들이밀었다. 왕정파 시위대인 민주주의국민연대(PAD·이른바 ‘노란 셔츠’ 진영)와 군부의 ‘협조’로 2008년 12월 정권을 잡은 민주당 아피싯 정부는 4월7일 비상사태를 선포한 데 이어 10일 무력 진압을 감행했다. 1년 넘게 의회 해산과 총선을 요구하며 최근 한 달가량 비폭력 시위를 벌여온 반정부 시위대, 이른바 ‘붉은 셔츠’ 진영의 분노는 진압군의 탱크와 총탄에 격렬하게 부딪혔다.
4월10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시위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맨손이었지만 이들의 이동을 막는 무장군들이 곳곳에 배치됐다. 그리고 3시께, 수십 명의 시위대가 시위 중앙무대가 있는 팡파 다리로 향하던 중 정부청사 부근에서 군의 바리케이드에 막혔다. 군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시위대는 자신들의 수가 불어나자 몸으로 군을 밀어붙였고 군대열은 의외로 쉽게 뚫렸다. 일부 시위대는 부서진 바리케이드에서 집어올린 막대기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물대포와 M16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반격해오자 시위대는 다시 밀렸다. 이즈음 영자 일간지 은 “시위대, 날카로운 대나무 막대기로 무장…”이라는 브레이킹 뉴스를 띄웠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연방 최루탄을 뿌려댔다.
“우리는 지난해 (폭력) 사태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비폭력 평화 시위를 통해 우리의 요구사항인 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지난 3월20일 방콕 시민의 깜짝 환호를 받으며 행진하던 끝없는 붉은 차량 대열에서 만났던 시골 간호사 윙(25)의 굳은 믿음은 20일이 지난 뒤 발생한 폭력 사태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맨손 시위대, 막대기를 들기 시작하다
“팡파 다리로!”
4월10일 저녁 7시께, 방콕 위숫카삿 도로에서 군인과 시위대가 한판 충돌을 마치고 ‘휴전’ 중인 현장을 취재하다 “팡파 다리 부근이 심각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2시간 전 정부 대변인 빠니탄 와따나야꼰이 “오늘 저녁 군이 팡파 다리와 인근 라차담논 거리를 재탈환할 것”이라고 다짐한 터였다. 현장에 같이 있던 일본 프리랜서 사진기자 소우와 오토바이를 나눠 타고 팡파로 달렸다. 함께 있던 소속 일본 기자 무라모토 히로유키(43)는 그의 ‘전용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막힌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현장, 팡파 다리와 멀지 않은 민주탑과 여행자 거리로 유명한 카오산 부근의 콕쿠아 교차로는 그야말로 격렬한 전투 현장이었다. 총소리와 폭발음이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시위대는 흥분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은 돌을 깨고 막대기를 들었고, 어떤 이는 1년 전 탱크 위 시민처럼 웃통을 벗어던졌다. 시위대와 대치한 진압군 쪽에선 실탄을 포함한 총탄이 날아들고, 동쪽 방향 약 300m 지점 팡파 다리 중앙무대에선 쉴 새 없이 ‘붉은’ 연설이 이어졌다. 이 현장에서 일본 기자 무라모토 히로유키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실려갔다. 그는 결국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이날 군인 4명을 포함해 최소 21명이 목숨을 잃었고 800여 명을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의 인명 피해는 저녁 6시30분부터 약 2시간 동안 벌어진 이 콕쿠아 교차로 충돌에서 집중 발생했다. 미용사로 일하는 솜삭 세총(29)도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를 이곳에서 잃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한 아버지 몬차이 세총(54)은 아이러니하게도 은퇴한 군인이었다. 4월12일 경찰병원에서 만난 솜삭은 “너무 충격이라… 세상에 나 혼자 남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저녁 8시께, 콕쿠아 교차로 충돌이 막바지로 흐를 무렵 수상한 장면이 목격됐다. 붉은 셔츠 진영에 선 몇 명이 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카메라 촬영을 막기도 했다. 얼마 뒤 붉은 셔츠 사수대처럼 검은 점퍼 복장을 한 이들 서너 명이 어둠 속 현장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게 목격됐다. 이들이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붉은 셔츠’ 주류 진영)인지, 붉은 셔츠 지지자이지만 비폭력 시위 원칙을 고수하지 않는 카티야 사와스디폴 소장(일명 ‘세 댕’) 추종자인지, 혹은 또 다른 세력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 현지 언론은 세 댕이 자신의 ‘로빈투사’들이 M79 수류탄을 두 번 쏘아 군인 쪽에 치명타를 입혔음을 인정했다고 보도했고, UDD 지도부의 닥터 웽 토치라칸은 그들이 UDD가 아니라 “군 내부에 불만이 많은 또 다른 군인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군인 쪽 사령관 롬클라오 투와땀 대령이 사망했다. 4월14일 언론은 롬클라오 대령이 레이저로 포착된 뒤 사살됐다고 속보를 띄웠다.
타이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간들’로 표현된 2시간여의 대혼란과 총격전은 밤 9시를 넘기며 잦아들었다. 퇴각한 군인들이 어둠 속에 남겨놓은 탱크 앞에는 민주탑의 불빛을 받은 붉은 피가 반짝거렸다.
‘블랙 토요일’ 누가 부추겼나?
“왜 비상사태인가! 지난해 4월 (붉은 셔츠 시위 당시) 폭력 사태가 발생한 것도 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였다. 시민 기본권을 제약하고 무기 든 군인들의 권력만 비대해지는 상황에서 비판적 언론의 입까지 막았으니 왜곡된 정보나 정체불명의 상황을 확인하기도 힘들다. …폭력 사태 발발 가능성이 더욱 열린 셈이다.”
2006년 쿠데타로 탁신 전 총리가 쫓겨난 뒤 타이락타이당을 이끈 바 있는 차투론 차이상은 4월7일 비상사태 선포 직후 과의 인터뷰에서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정부를 성토했다.
비상사태는 방콕을 포함해 인근 5개 지방에까지 선포됐다. 정부는 전날(4월6일) 붉은 셔츠 시위대 일부가 의사당에 난입한 것을 이유로 댔지만, 그 의사당 난입도 의문을 낳았다. 의사당 내부에서 누군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던졌고 이에 흥분한 시위대가 의사당 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일부는 문을 타고 오르는 ‘의사당 난입’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선포된 비상사태령에 따라 4월8일에는 붉은 셔츠의 기관방송 (P Channel)이 강제로 중단됐다. ‘왜곡된 정보를 양산하고 폭력과 갈등을 부추긴다’는 게 이유였다. 4월9일 수천 명의 붉은 셔츠들이 송신사인 타이콤을 항의 방문하면서 방송은 잠시 재개됐지만 그날 밤 정부가 다시 중단시켰다. 이는 3월19일 붉은 셔츠와의 협상 결렬 뒤 이어진 일련의 조처들, 예컨대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나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붉은 셔츠의 분노를 키우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무력 진압이 이어진 것이다.
“냉정히 말해 PAD의 기관방송 <astv>는 모든 반대자를 마녀사냥하듯 몰아가며 사회를 양분화했지만, 은 그 정도는 아니다. 무대 연설자에 따라 말이 거친 경우가 있긴 해도 붉은 셔츠가 겨냥하는 정부와 군, 엘리트 집단을 비판 대상으로 명확히 삼고 있다.”
타이의 유일한 독립언론 (prachatai.com) 기자 무티타 추아창(28)은 두 셔츠 진영의 기관방송을 이렇게 평가했다. 실상, 그녀가 몸담고 있는 도 비상사태령에 따라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실제로 타이의 주류 언론을 포함한 중산층·엘리트 계층은 줄곧 북부와 동북부 시골 지역에 광범한 지지 기반을 둔 붉은 셔츠에 대해 오만과 편견이 담긴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어왔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의회 해산 문제를 놓고 ‘9개월 이내’라는 정부 입장과 ‘15일 이내’라는 붉은 셔츠 입장이 합의점을 못 찾고 있던 3월19일 오후, PAD의 대변인 수리야사이는 “붉은 셔츠와의 협상 자체를 반대한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그는 “(붉은 셔츠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방콕 시민이 나설지도 모른다”는 말로 민-민 충돌을 부추겼다.
협상이 결렬된 다음날인 3월20일 는 “잔라이 탁신 롬 제라자”라는 제목을 뽑았다. 직역하면 “빌어먹을 탁신이 협상을 망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 어디에도 탁신이 어떻게 협상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학계 등 지식인 집단은 협상 재개나 중재를 모색하기보다 정부 입장을 노골적으로 편들었다. 예를 들면, 100여 명의 학자들이 ‘3개월 내 의회 해산안’을 중재안으로 내놓았을 때 이를 보도하지 않던 언론은 303명의 학자들이 “이른 의회 해산을 반대한다”며 정부를 편들자 이를 브레이킹 뉴스로 띄웠다.
마지막으로, 각종 도구와 무기로 무장한 노란 셔츠 시위대가 2008년 정부청사 내부를 3개월이나 점거하고 수완나품·돈무앙 두 공항을 점거할 때도 별다른 비판 목소리를 내지 않던 언론은, 지난 4월3일 맨손의 붉은 셔츠 시위대가 고급 백화점이 몰린 방콕 중심가 라차프라송 구역을 점거하자 “경제·투어리즘 타격” 운운하며 우려와 비판을 쏟아냈다. 실상, 이 구역 일부 백화점 건물과 고급 호텔들은 와 민주당 쪽 인사들이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피싯 정부가 상황을 악화시킨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붉은 셔츠 지도부 검거를 위한 체포영장을 늘려가며 정부는 지도부만 검거하면 나머지 시위대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순진한 발언으로 붉은 셔츠를 자극했다.
“지금 지도부를 체포하면 이 많은 시위대의 행동이 어떻게 ‘독립적으로’ 나올지 모른다. 지금까지 질서정연하고 비폭력 원칙을 고수한 건 모두 지도부의 강력한 원칙하에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수박 군인’이 많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4월7일 밤 중심가 시위 현장인 라차프라송 거리에서 만난 호텔 노동자 암누이 둠롱벳(36)의 말이다. 그는 군 내부에 ‘우리 편’이 많다며 그들을 ‘수박 군인’이라 불렀다. 겉에는 녹색 군복을 입었지만 속내는 붉다는 의미에서다.
4월10일 발생한 충격적 인명 피해에 전 사회가 충격을 받은 듯 11일 하루 방콕은 조용했다. 그리고 12일 오후, 아피싯 총리 집으로 항의 방문을 다녀온 시위대에게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민주당의 불법 기부금 모집과 관련해 헌법재판소에 민주당 해체 명령을 권고한 것이다. 시위대는 이틀 전 격렬했던 현장에 여전히 남아 있는 탱크 위에 올라 환호했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 붉은 셔츠는 그들의 요구사항인 의회 해산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위를 이어가겠다는 태도다.
“현 난국을 뚫는 길은 의회 해산과 선거밖에 없다.” 출랄롱꼰대학 정치학과의 수리차이 완카오 교수는 “다만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애초 비상사태 선포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그는 “정부가 붉은 셔츠 운동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그들이 얼마나 소외돼왔는지 이해하게 됐다. 탁신의 부패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탁신을 지지하는 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준 최초의 총리이기 때문이다.”
빈민운동가 출신 농사꾼으로 붉은 셔츠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꾸이(42)의 말이다. 그는 선출된 권력을 뒤엎은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고 빈곤 계층을 ‘어리석다’고 무시하는 타이 사회의 중산층과 엘리트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장애물이라고 단언했다.
지도부만 검거하면 시위대가 집으로 돌아갈 거라 말했던 아피싯 정부의 오판은 붉은 셔츠라는 ‘벌집’을 쑤셔놓았다. 지난 2~3년간 계속된 타이의 정치 위기는 더 깊은 나락으로 향하고 있다. 거의 매일 의문의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수류탄이 터지는 방콕은 지금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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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a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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