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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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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제리 이후, 공존은 어디로

호메이니의 후계자에서 저항의 상징이 된 지도자의 죽음…
보수파와 개혁파가 격돌하는 가운데 장례식 치러
등록 2009-12-30 15:47 수정 2020-05-03 04:25

‘무하람.’
해 대신 달을 따르는 이슬람력의 새해를 여는 첫달이다. 어느 문명에서나 ‘시작’은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슬람에서도 금식의 의무가 부여된 9월(라마단) 다음으로 무하람을 귀히 여긴다. 아랍어로 ‘금지’를 하는 ‘하람’에서 파생된 무하람에 무슬림은 ‘다툼’을 벌여서도 아니된다.

‘몬타제리, 당신을 기억합니다.’ 2009년 12월21일 이란 성지콤에서 열린 아야톨라 몬타제리 장례식에는 이란 정부의 봉쇄에도 개혁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수많은 인파가 참석해 ‘변화’를 갈망했다. REUTERS/ STRINGER

‘몬타제리, 당신을 기억합니다.’ 2009년 12월21일 이란 성지콤에서 열린 아야톨라 몬타제리 장례식에는 이란 정부의 봉쇄에도 개혁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수많은 인파가 참석해 ‘변화’를 갈망했다. REUTERS/ STRINGER

무하람, 다툼을 금하는 달에…

그 무하람의 열 번째 날을 시아파 무슬림들은 ‘슬픔의 날’, 곧 ‘아슈라’로 기린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에 신생 이슬람 제국은 두 패로 갈렸다. 생전에 예언자가 보인 언행을 중시하는 수니파와 예언자의 핏줄을 중히 여기는 시아파가 그것이다. 알력은 피를 불렀다. 서기 680년 10월10일(이슬람력 61년 1월10일) 지금의 이라크 중부 카르발라에서 예언자의 손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와 그 일가가 수니파 대군에게 무참히 살해된 게다. 이후 신심 깊은 시아파는 ‘아슈라’를 전후로 금식을 하며 이맘 후세인의 ‘고통’에 동참한다. 일부 적극적인 이들은 카르발라로 순례길을 떠나기도 하고, 쇠 채찍으로 제 몸을 때려 피를 흘려가며 무참히 숨져간 이맘의 넋을 위로하기도 한다.

‘시아파의 나라’ 이란에 어김없이 새해가 밝아왔다. 2009년 12월18일이 올 무하람의 첫날이었다. 그리고 하루 뒤는 12월19일, 세계 유일의 ‘이슬람공화국’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한 ‘그랜드 아야톨라’(아랍어로 ‘신의 위대한 징표’라는 뜻으로 이슬람 최고 성직자를 일컫는다)가 숨을 거뒀다. 그랜드 아야톨라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다. 그는 이날 시아파 성지인 이란 중부 콤의 자택에서 잠을 자다가 평안히 세상을 등졌다. 사인은 심장마비, 격동의 이란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여든일곱 해 삶은 그렇게 돌연 멈춰섰다.

아야톨라 몬타제리는 1922년 이란 중서부 이스파한의 나자파바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이슬람식 교육을 받은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성지 콤으로 보내졌다. 이 무렵 그에게 이슬람 율법과 신학을 가르친 스승이 바로 ‘이란 혁명의 아버지’ 그랜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명석하고 성실한 몬타제리는 이내 호메이니의 눈에 들었고, 공부를 마친 그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호메이니를 지근에서 보필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샤 모하메드 팔레비가 이끄는 이란 친미 왕정의 학정은 극을 향해 치달았다. 성지 콤을 근거지로 삼아 호메이니는 왕정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을 모아내기 시작했다. 호메이니의 명을 받은 몬타제리는 이슬람 신학자들을 규합해 반정부 활동에 앞장섰다. 1964년 부패한 왕정이 호메이니를 강제로 추방한 이후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반왕정 투쟁의 구심점이 된 것도 몬타제리였다. 결국 그는 1974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그는 혁명의 기운이 들불처럼 번져가던 1978년에야 석방됐다.

1979년 초 왕정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여명의 시대’에 그의 역할은 더욱 빛을 발했다. 신생 이슬람공화국의 새 헌법 초안 마련을 주도한 그는 이 무렵부터 성지 콤에서 금요성일 예배를 집전했다. 최고 지도자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는 증좌였다. 실제 호메이니는 1980년 들어 몬타제리에게 일부 권력을 넘기기 시작했다. 후계 구도가 공식 거론되기 시작한 1983년부터는 이란의 모든 관공서에 호메이니와 함께 그의 초상도 작게나마 내걸렸다.

권력의 정점에서 가차 없는 비판을
‘압제에 반대한다.’ 이란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아야톨라 몬타제리는 혁명 이후 ‘최고 권력’에 근접했음에도 ‘재야의 목소리’로 남기를 선택했다. REUTERS/ RAHEB HOMAVANDI

‘압제에 반대한다.’ 이란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아야톨라 몬타제리는 혁명 이후 ‘최고 권력’에 근접했음에도 ‘재야의 목소리’로 남기를 선택했다. REUTERS/ RAHEB HOMAVANDI

애초 호메이니는 몬타제리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몬타제리는 “후계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전문가회의에서 결정할 문제”라며 한사코 고사했단다. ‘마즐리스 에 호브레간’으로 불리는 전문가회의는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모임이다. 이란 헌법에 따라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전문가회의는 사실상 이란 최고의 권위를 지닌 일종의 ‘원로원’ 격이다. 결국 1985년 11월 전문가회의는 몬타제리를 호메이니의 뒤를 이을 최고 지도자로 공식 추천하기에 이른다.

호메이니가 몬타제리를 후계로 지목한 결정적 이유는 그 역시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주도하는 ‘신정체제’를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하지만 몬타제리의 이후 삶을 들여다보면 ‘신정’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호메이니가 문자 그대로 ‘율법학자들이 주도하는 정치체제’를 염두에 뒀다면, 몬타제리는 이슬람 학자들이 정부의 조언자이자 감시자의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인식의 차이는 언행의 차이로 이어졌다. 이라크와의 8년 전화에 휘말린 동안 이란에선 ‘이슬람’의 색채는 나날이 짙어가는 반면 ‘공화국’의 빛깔은 갈수록 흐려졌다. 정권에 반대하면 반혁명 분자로 몰렸고,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졌다. 몬타제리는 이를 거침없이 비판했고, 늙고 병약해진 호메이니는 이를 참아내지 못했다.

1987년 11월 몬타제리는 정당 활동을 자율화할 것으로 촉구했다. ‘혁명의 실패’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도 제안했다. 또 “(호메이니가 강조한) 이슬람 혁명의 ‘수출’은 게릴라를 훈련·무장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호메이니의 인내심도 임계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1988년 8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막을 내린 뒤, 이란에선 다시 한번 살풍경이 연출됐다. 전쟁 당시 이라크 편에서 싸우다 붙잡힌 무자헤딘 출신들과 정치범들이 잇따라 처형됐다. 몬타제리는 대중 강연을 통해 “더 개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국민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혁명의 진정한 가치를 위태롭게 하는 반혁명적 행태”라며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기에 앞서 우선 정치·이념적 재건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1989년 3월26일 호메이니는 몬타제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이틀 뒤엔 “몬타제리가 후계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는 발표가 흘러나왔다. 관공서와 사원에서 몬타제리의 사진이 내려졌고, 언론 인터뷰와 대중 강연도 끊겼다. 그의 이름 앞에 붙었던 ‘그랜드 아야톨라’란 칭호도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 그로부터 석 달이 채 안 돼 호메이니는 숨을 거뒀고, 아직 ‘그랜드 아야톨라’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중견 성직자 알리 하메네이가 최고 지도자로 옹립됐다.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죽음

그해 12월 성지 콤에선 하메네이의 ‘자격 요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단이 뿌려졌고, 몬타제리는 혁명 수비대에 불려가야 했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도 이런저런 사회적 발언을 이어가던 몬타제리는 1997년 10월 개혁파를 탄압하는 하메네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에 대한 하메네이의 대답은 ‘가택연금’이었다. 연금은 2003년에야 풀렸다. 몬타제리의 권력 비판은 계속됐다.

지난 6월 선거부정 의혹 속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 몬타제리는 다시 전면에 나섰다. 그는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62%를 득표했다는 공식 발표에 대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도 아무도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선거부정 항의시위에 나섰다가 총상을 입고 숨진 대학생 네다 솔탄을 위해 사흘의 애도 기간을 준수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등 외신들은 몬타제리의 말을 따 “현 정부는 이슬람도 공화국도 저버렸다”고 전한 바 있다.

몬타제리를 지지하는 개혁파 진영에선 그를 “명석하고, 현실적이며, 자신을 내세울 줄 모르고, 쉬운 말투로 대중과 호흡하며, 평범한 삶을 살면서, 이슬람을 사회적 정의와 일치시키려 한평생 노력해왔다”고 기린다. 반면 보수파 진영에서 그를 “고집이 세고, 지나치게 순진하며, ‘위선자와 자유주의자’란 이란 내부의 적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온 인물”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죽음은 그래서 정치적이다.

“아야톨라 몬타제리는 이슬람과 이슬람 혁명의 이상을 높이기 위해 명예로운 삶을 바쳤다.” 은 12월20일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손자인 하산 호메이니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아야톨라 몬타제리는 이란 인권운동의 아버지”라며 “억압받는 이들의 침묵이야말로 압제를 돕는 일이라는 점을 그에게서 배웠다”고 헌사했다. 반면 이란 관영 은 12월19일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이름 앞에 ‘그랜드 아야톨라’ 대신 ‘시위대의 성직자’란 칭호를 안겼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도 “위대한 율법학자의 명복을 빈다”면서도 “신께서 그의 실수를 용서하시기 바란다”고 날을 세웠단다.

무하람 나흘째인 12월21일 성지 콤에서 몬타제리의 장례식이 열렸다. 이란 전역에서 몰려든 애도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개혁파 대선 후보이던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와 메디 카루비 전 의회의장도 콤에 모습을 드러냈다. 몬타제리의 영정을 든 참배객들은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하메네이의 초상을 치켜세운 이들은 “위선자에게 죽음을”이라고 맞받았다. 반정부 시위대 탄압에 앞장서는 바시즈 민병대도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배회했다. 콤은 작은 이란이었다.

무하람에 죽어 영원히 기억될 것

“억압당한 몬타제리, 당신은 이제 신의 곁에서 안식을 취하십니다.” “독재자여, 몬타제리의 유지는 이어질 것이다. 숨을 거둔 것은 몬타제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네들이다.”

이란 정부의 봉쇄에도 드물게 현장을 취재한 는 12월21일 성지 콤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서 개혁파를 상징하는 초록색을 손목과 머리에 띠로 두른 참배객들이 이렇게 목을 놓았다고 전했다. 신문이 장례식장 한켠에서 만난 한 중견 성직자의 말을 따 전한 내용은 몬타제리의 죽음이 가지는 종교·정치적 의미를 또렷하게 드러내준다.

“그는 권좌에서 밀려난 뒤가 아니라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권력을 비판했다. 침묵을 지켜 권력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권력이 아닌 정의의 편에 섰다. 무하람은 압제자에 맞선 피압제자의 승리를 기원하는 달이다. 그가 무하람에 숨지면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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