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세 번째 큰 사건이 일어났다.”
전날 치러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가 만들어낸 흥분에 일본 열도가 흥청이던 지난 8월31일, 아사히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의 오기 가즈하루(50) 편집장은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근대 일본을 만들어낸) 메이지 헌법과 (2차 대전 패전 이후 오늘의 일본을 이룬) 평화헌법 제정에 필적한 만한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물경 54년을 군림해온 권력이 무너졌다. 반세기 만의 정권 교체다. 오기 편집장은 “지금 일본 국민은 기대와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것”이라며 “이런 정치적 긴장감도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바야흐로 전환점에 섰다.
“자민당의 지난 반세기를 흔히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1955년 좌파·혁신계의 약진과 통합 움직임에 맞서기 위해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끌던 민주당과 오시다 시게루가 이끌던 자유당이 보수 통합을 통해 자민당을 결성했다. 그때부터 자민당은 ‘만년 여당’이었고, 사회당 등 혁신계 정당은 ‘만년 야당’으로 고착화했다.” 이준규 메이지가쿠인대학 국제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은 “반세기 일본 사회를 압도한 보수적 정치 구도가 바로 55년 체제다. 이번 선거에서 강고하기만 해 보였던 그 체제가 마침내 깨졌다”고 말했다. 가히 ‘역사적’이라 부를 만하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55년 체제’가 최종적으로 해체됐다는 거다. 이미 1990년대에 해체됐어야 할 조건이었는데, 그동안 자민당이 연명하며 버텨온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무슨 말인가? 일본 사회가 ‘잃어버린 10년’이란 장기 불황의 문턱에 들어선 지난 1993~94년, ‘55년 체제’가 잠시 흔들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메이지 유신·평화헌법에 버금가는 충격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자민당은 두 가지 악재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소비세(부가가치세) 도입을 둘러싼 여론의 반발이 격했고, ‘리쿠르트 스캔들’(직업정보·광고회사인 리쿠르트가 자회사의 비상장 주식을 정치권 인사들에게 나눠준 뒤 상장해 거액을 챙기게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사건)을 대표로 하는 부패 추문도 끊이지 않았다. 1993년 여름 마침내 일이 터졌다.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이 가결된 게다. 자민당 내부의 이탈표가 컸다. 그해 7월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원내 제1당을 유지했지만, ‘55년 체제’ 수립 이래 처음으로 과반 의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변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만년 야당들’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일본신당을 필두로 사회·공명·신당사키가케 등 8개 정파가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한 게다. ‘38년 만의 정권 교체.’ 언론의 호들갑 속에 1993년 8월 호소가와 모리히로 총리 정부가 등장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연정 출범 초기부터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8개월여 만에 정치자금 유용 의혹이 불거지면서 호소가와 총리가 전격 사퇴했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사회당과 신당사키가케가 발을 빼면서 ‘비자민 연정’은 막을 내렸다. 자민당은 역시 저력이 있었다. 이내 사회당을 끌어들여 ‘자-사 연정’을 구성하고 권좌에 복귀하기에 이른 게다. 잠시의 휴지기를 뚫고 ‘55년 체제’는 질긴 생명력을 이어갔다.
자민당의 최대 적수였던 사회당이 몰락의 길에 접어든 것도 이 무렵이다. ‘적과의 동침’으로 스스로 지지 기반을 무너뜨린 게 화근이었지만, 권혁태 교수는 “1990년대 중반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소선거구·비례대표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법 개정 뒤 치러진 첫 번째 선거(1996년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이 의석의 절반을 잃으며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다. 자민당은 버텨냈다. 권 교수는 “1996년 선거를 포함해 소선거구·비례대표제 도입 이후 치러진 네 차례의 선거에서 자민당은 줄곧 30~40%대의 득표율을 유지했고, 이를 통해 의회 권력을 장악하며 ‘55년 체제’를 유지했다”며 “사회당의 몰락을 부른 소선거구·비례대표제가 13년여 만에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고 지적했다.
이 8월31일 일본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따 보도한 ‘확정 득표율’ 내용을 보면 이런 권 교수의 설명은 설득력을 더한다. 의 보도를 보면,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모두 3347만여 표를 얻었다. 득표율은 47.4%, 2005년 실시된 제44회 중의원 선거 때 얻은 36.4%보다 꼭 11%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2984만여 표를 얻어 42.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앞선 선거에선 31%의 득표율을 얻었으니, 늘어난 득표율은 11.4%포인트로 지역구와 비슷하다. 반면 지난 2005년 선거에서 각각 47.7%(지역구)와 38.1%(비례대표)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자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38.6%(지역구)와 26.6%(비례대표)를 기록했다. 지역구에서 9.1%포인트, 비례대표에서 11.4%포인트씩 빠진 수치다.
의석수는 어떨까?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무려 169석이 늘어난 221석을 차지했다. 비례대표에서도 26석을 보태 87석을 거머쥐면서, 전체 480석 가운데 113석이던 의석을 308석으로 3배 가까이 불렸다. 반면 자민당은 지역구에서 무려 155석을 잃어 64석밖에 얻지 못했고, 비례대표에서도 22석을 잃으며 5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296석으로 중의원을 압도했던 거대 여당이 113석의 야당으로 전락한 게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모두 고작 10%포인트 안팎의 지지율 격차를 보였음에도,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소선거구·비례대표제 도입이 만들어 낸 ‘바람’의 위력이었던 게다. 이번 선거 결과에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 교수는 “조금 폄하해서 말하자면, 이번 선거 결과는 10% 남짓한 유권자가 자민당에 등을 돌린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며 “역설적으로 일본 유권자들이 큰 불안감 없이 민주당에 표를 던진 것도 자민당과의 정책적 차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민당 지지율 10% 빠진 것 불과” 지적도그럼에도 ‘55년 체제’의 종말이 가져온 충격은 크기만 하다. 이른바 ‘1억 총중류’(일본 국민 모두가 중산층이란 뜻)의 신화는 이미 1990년대 중반 무너진 터다. 21세기 들어선 ‘격차(양극화) 사회’의 암운이 일본 사회를 온통 휘감았다. 자민당의 지난 반세기를 주도해온 파벌정치도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위력을 잃어갔다. 이른바 ‘바라마키’(흩뿌린다는 뜻으로 공공사업을 남발하는 선심행정을 지칭)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는 이익배분 정치도 장기 불황의 긴 터널을 지나는 사이 효용이 다해갔다. 정권 교체는, 그래서 때늦은 감마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민당 파괴’를 외치며 2005년 선거를 압승으로 이끌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다. 첫째, 고이즈미 전 총리가 급격한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사회적 격차를 심화하고 민심 이반을 부추겼다. 둘째, 개혁의 칼을 당 내부에도 들이대면서 반세기 자민당을 지탱해온 버팀목을 하나둘 제거하면서 자민당 몰락을 가속화했다는 게다. 실제 고이즈미 전 총리는 개혁을 얘기할 때면 “내 손으로 자민당을 때려부수겠다”는 표현을 버릇처럼 입에 올렸다. 이준규 연구원은 이렇게 진단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당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내 개혁의 일환으로 대의원들이 대거 총재 선출권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이즈미 전 총리는 파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개혁을 외칠 수 있었다. 구조적 한계에 봉착했던 자민당은 고이즈미 전 총리라는 ‘극장형 정치인’의 등장으로 잠시나마 회복세로 돌아서는 듯 보였다. 그 ‘환상’의 정점이 2005년 선거였다. 2006년 9월 그는 무대에서 내려왔고,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등으로 이어진 후임자들은 ‘파괴’된 당을 재건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임계점을 한참이나 지난 자민당의 한계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게 이번 선거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개혁이 부메랑으로
선거 전략에서도 자민당은 민주당에 압도당했다. 자민당은 외교안보 정책을 쟁점 삼아 ‘불안 심리’를 퍼뜨렸지만, 성난 민심을 등에 업은 민주당은 자민당의 틈새를 공략해가며 표심을 다졌다. 실제 자민당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책임’을 강조하며, ‘우리가 잘못한 것은 많지만 민주당이 집권해 불안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식으로 유권자에게 다가갔다. 말하자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에 맞서 ‘구관이 명관이다’를 외친 셈인데, ‘구관’(자민당)을 ’명관’으로 보지 않는 국민이 많았음은 선거 결과 분명해졌다. 전문가들이 “이번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민당 추방 선거”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55년 체제는 무너졌지만, (일부에서 말하듯) 2009년 체제가 세워졌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미쿠리야 다카시 도쿄대 교수는 9월2일치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자민당 정권 붕괴는 단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자민당적인 것과 겹치는 모든 일본 시스템이 붕괴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업의 정치헌금을 끊어낸다면 지금처럼 재계가 일본 사회에서 차지하는 존재 의미도 엷어질 것이고, 자민당과 특수 관계를 구축해온 관료 시스템도 지금의 형태로 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다. 그는 이어 “자민당적인 것들의 붕괴는 자민당 스스로에게 극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며 “만약 4년 뒤 선거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잃더라도, 정권을 넘겨받을 정당이 자민당이라는 보증은 없다”고 강조했다.
“내년 참의원 선거가 장기 집권 시금석”얼마나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오카모토 아쓰시 월간 편집장은 “이번 선거는 이제까지 변화를 두려워했던 일본 국민이 마침내 정권을 바꿔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바꿔 말하면 ‘이 정권 별로다’ 싶으면 언제든 다시 바꿔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유권자들이 갖게 됐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카모토 편집장은 이어 “민주당은 스스로 내놓은 사회보장 공약을 실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며 “(권력 교체기에) 조속히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복지정책 등에서 단기간에 가시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면 되레 정권 교체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기타무라 하지메 편집장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유권자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며 “내년 6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가 민주당 정권의 장기 집권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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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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