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1979년 사상 최초의 이슬람 공화국이 이란 땅에 들어설 무렵에도 그랬다. 왕조의 폐망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레자 팔레비 이란 국왕은 ‘좌파·공산주의자들’만 염려했지, 이슬람 성직자들은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팔레비 국왕이 국외 탈출을 감행하기 불과 다섯 달여 전인 1978년 8월 미 중앙정보국은 “이란은 혁명적 상황에 직면해 있지 않으며, 혁명 전야 상황은 더욱 아니다”라고 분석했단다. ‘순간’이 역사를 바꿔놓는 법이다.
타프트 투표율 141%, 차데간 투표율 120%
지난 6월12일 치러진 제10대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 안팎의 예측을 여지없이 배반했다. 6월13일 이란 내무부가 발표한 개표 결과는 선선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가 접전 속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함께 2차 결선 투표에 진출할 것이란 게 모두의 전망이었다. 선거는 1차에서 끝났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62.6%의 득표율로 무사비 후보(33.8%)를 손쉽게 따돌리고 승리했다는 게다. 표차는 무려 1100만여 표였다. 부정선거 의혹이 이내 불거졌다.
의혹의 근거는 숱하다. 이스트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선 전통적으로 소수파인 아제르족 출신 후보에게 몰표를 줘왔다. 무사비 후보는 이곳 출신의 아제르족이다. 그럼에도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무사비 후보를 20만여 표 이상 앞섰다. 2005년 대선 1차 투표에서 500만 표가량을 득표했던 개혁파 메디 카루비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고작 33만 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는 고향인 로레스탄에서도 4만여 표를 얻는 데 그쳤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67만여 표를 얻었다. 여기까지는 ‘이변’이라 치부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의 투표율은 무려 85%, 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는 모두 3916만5191명으로 집계됐다. 이란 내무부는 수작업만으로 선거 결과를 불과 12시간 만에 발표했다. 투표율이 62.7%에 그쳤던 지난 대선 때보다 반나절가량 빠른 손놀림이다. 개표 초반의 ‘속도감’은 놀라웠다. 첫 500만 표 개표 결과는 투표를 마친 지 불과 1시간30분 만에 발표됐다. 이후 4시간 동안 이란 내무부는 거의 1시간마다 500만 표씩 개표를 해 그 결과를 속속 발표했다. 개혁파 성향 유권자가 절대다수인 테헤란의 투표함이 먼저 열렸지만, 개표 초반부터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멀찌감치 앞서나갔다.
투표율이 ‘정상 범위’를 넘어선 곳도 다수 발견됐다. 영국 일간 은 6월17일치에서 이란 인터넷 매체 의 보도 내용을 따 “이란 전역 200여 투표소에서 투표율이 95%를 넘어서는 기현상이 빚어졌다”며 “중부 아즈드주 타프트에선 투표율이 141%를 기록했고, 이스파한주의 차데간에서도 120%를 기록하는 등 30여 도시에서 아예 투표율이 100%를 넘어섰다”고 전했다.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최고지도자의 석연찮은 축하선거 결과를 공식화하는 과정도 ‘탈법’ 논란을 불렀다. 이란의 헌법수호위원회는 의회(마즐리스)가 통과시킨 법률에 대한 최종 심의·의결기구로 일종의 상원 구실을 한다. 위원회는 또 모든 선거를 관리·감독하고 그 결과를 확정짓는 헌법적 권한을 가진다. 개표가 끝나고 내무부가 그 결과를 발표하면, 헌법수호위원회는 패배한 후보자들의 불만이 없는 한 열흘 안에 이를 확정짓는다. 위원회가 선거 결과를 확정하면 최고지도자가 이를 추인해 당선이 최종 확정된다.
이번엔 사뭇 달랐다. 미르 호세인 무사비 후보는 물론 메디 카루비, 모센 레자이 후보 등 모든 후보가 개표 결과 발표 직후 선거부정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공개적으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압도적 재선’을 축하하며, “모든 이란인들은 그의 승리를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최고지도자 스스로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게다. 부정선거 의혹이 급속도록 번진 결정적 계기였다.
6월14일 테헤란 중심가는 무사비 후보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대로 출렁였다. 당국은 단호하게 대응했다. 정권 친위대인 바시즈 민병대는 그예 테헤란대학 구내까지 시위대를 쫓아 들어갔다. 그날 밤 젊은이 7명이 바시즈 민병대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개표 결과가 발표된 6월13일부터 6월18일까지 엿새 동안에만 모두 170여 명이 당국에 체포됐다. 특히 1979년 이슬람 혁명 직후 외교장관을 지낸 에브라힘 야즈디를 필두로 모하마드 알리 압타히 전 부통령, 무스타파 타즈자데 전 내무차관, 모센 아민자데 전 외교차관 등 개혁파 정치인도 다수 붙들려갔다. 시위에 가속이 붙어갔다. 무사비 후보는 6월18일 시위에 참석해 “끝까지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긴장감이 최고조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해법이 나와야 할 시점이 됐다.
6월19일 금요성일, 대규모 인파가 일찌감치 테헤란대학으로 몰려들었다. 시위 사태 발생 이후 침묵을 지켜온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금요예배를 집전하며, 대국민 연설에 나섰다. 이란 가 생중계한 예배 장면을 보면, 특유의 점퍼 차림을 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도 강단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테헤란대학 금요예배에서 국민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이 관례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예배를 이끌던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서서히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이란 국민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제10대 대선은 이란의 미래에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혁명 직후 치러진 선거를 빼곤 이번 대선 투표율이 가장 높다. 무려 4천만 명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 ‘신의 축복’이다. 혁명 2세대인 젊은이들도 혁명 1세대와 마찬가지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투표에 참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세계에 ‘종교적 민주주의’란 제3의 길이 있음을 입증시켜준 쾌거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높은 투표율을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지지 표시’라고 해석했다. 그는 “선거에 출마한 후보 4명 모두 이슬람 공화국에서 요직을 거친 인물들”이라며 “서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슬람 공화국 찬성파와 반대파가 맞선 게 아니었다”고도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선거 결과는 국민들의 선택이자 승리”라며 “현실을 바꿀 순 없다”고 강조했다. 부드러운 음성에서 조금씩 단호함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하메네이, 무사비 후보 겨냥한 ‘경고’도
“우리의 적들은 이번 선거 결과에 의심을 품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투표율, 여러분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이 결과를 조작할 순 없다. 경쟁의 시간은 끝났다.” 온화하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4천만 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게 표를 준 2400만 명뿐 아니라 투표에 참여한 4천만 명 모두가 이슬람 혁명을 위해 표를 던진 것이다. 이슬람 공화국은 절대 국민의 표를 조작하지 않는다. 모든 선거 절차는 법에 따라 진행됐다. 무려 1100만 표 차다. 10만 표나 20만 표, 최대 100만 표까지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정도 규모의 부정선거가 있을 수 있는가.”
거리의 시위대를 겨냥한 직접적인 ‘위협’이 마침내 시작됐다. “불법적인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오늘 법적 절차가 무너진다면 향후 누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것인가. 법에 따라 조사하고, 문제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헌법수호위원회를 통해 법적으로 처리하면 된다. 일부 재개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모든 이들에게 자제와 인내를 호소한다. 선거는 왜 하는가? 투표함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거리에서 하는 게 아니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거리시위를 명백한 ‘불법’으로 규정했다. 사실상 무사비 후보를 겨냥한 ‘경고’도 뒤를 이었다.
“정치인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오늘 이슬람 공화국은 중요한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깊게 처신하고 실수를 해선 안 된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은 자신들의 할 일을 올바로 했다. 우리의 어깨에는 더 무거운 책임이 주어져 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극단적인으로 나아간다면, 국민들도 위험스런 상황으로 치달아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다. 정치인들이 법을 어기고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뒤따르는 폭동과 유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제 끝내야 한다. 멈추지 않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거리의 폭동에 정부가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격정적인 연설은 이내 잦아들었다. 시아파 제12대 이맘인 ‘마흐디’의 삶을 언급하는 것으로 설교가 마감될 무렵, 일부 참석자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반대하는 것은 아야톨라 하메네이에게 반대하는 것과 같다. 그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곧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도전이다. 극한 대결의 선이 그어진 게다.
“개혁파 역시 ‘체제 내 개혁’이 목표”“일부 외신들은 현 사태를 이슬람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민중봉기쯤으로 묘사한다. 온당치 못한 주장이다.” 영국 의 중동전문 기자인 로버트 피스크는 6월19일 과 한 인터뷰에서 “지금 이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들이 뽑은) 합법적인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뿐”이라고 지적한다.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이란어과)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그는 “팔레비 왕조는 이란 국민으로부터 어떤 지지도 받지 못했지만,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서민층과 농촌을 중심으로 확고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게 1979년 이슬람 혁명 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며 “무사비 후보 등 개혁파도 이슬람 공화국이란 ‘체제 내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의혹은 여전하다. 7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이대로 시위를 멈춰야 하는가? 파국은 피할 수 없는 건가? 다른 선택은 없는 건가? 혁명 30주년, 이슬람 공화국이 다시 기로에 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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