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합의해 내놓은 ‘한-미 동맹의 공동비전’은 모두 10개 문단으로 이뤄져 있다. 핵심을 추린다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한-미 두 정상은 “공동의 가치와 상호 신뢰에 기반한 양자·지역·범세계적 범주의 포괄적인 전략동맹을 구축해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둘째,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 억지’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약”도 강조했다. 셋째, “동맹을 통해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를 구축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에 이르도록” 지향한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따져보자.
동아시아에서 세계로 확대된 ‘동맹’의 범위
‘전략동맹’이란 뭔가?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앞마당(로즈가든)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지구촌 차원의 모든 도전에 함께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을 풀었다. 어떤 문제가 포함되는가?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발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에서 테러 근절과 평화 유지 노력까지”를 입에 올렸다. 풀어 말하자면, 군사동맹이던 한-미 관계가 한반도나 동아시아 차원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미국이 한반도 바깥에서 추진하는 군사활동에도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를테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재파병을 요청하면 쉽게 거부하기 어렵게 됐다. 공동비전에서 “한-미 동맹은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이뤄지는 것과 같이 평화 유지와 전후 안정화, 그리고 개발 원조에서 공조를 제고하겠다”고 강조한 것도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게다.
‘핵우산’과 ‘확장 억지’는 한반도에서 냉전이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 확인시키는 씁쓸한 문구다. ‘억지’란 뭔가? 한쪽이 다른 쪽을 겨냥해 핵공격을 하면 공격을 당한 쪽이 무자비한 보복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이른바 ‘상호확증파괴’(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의 논리다. 핵무기를 선제 사용했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이 충분히 크다면, 아예 처음부터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란 무모한 셈법이다. 이를 동맹국까지 확대한 것이 ‘핵우산’이요, ‘확장된 억지’다. 냉전이 막을 내린 지 벌써 20년, 한반도의 시계는 여전히 거꾸로 돌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하기로 처음 명문화한 것은 1978년 제11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때다. 핵무장을 추진하려던 박정희 정권을 주저앉히기 위한 조처였다. ‘핵주권’을 입에 올리던 이들이 ‘핵우산’을 ‘안보 보증수표’쯤으로 여기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정부는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 억지를 정상 간 채택한 문서에서 최초로 명문화함으로써 미국의 강력한 대한 방위 공약을 재확인했다”고 강조했지만, 명문화 이전과 이후에 바뀌는 건 전혀 없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란 얘기다. 문제는 북의 핵공격을 상정한 확장 억지를 들먹임으로써, 사실상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는 꼴이 됐다는 점이다. 틈만 나면 강조해온 ‘북핵 불용’의 원칙만 우세스럽게 됐다.
북핵 인정해주고 흡수통일 공론화한 셈게다가 한-미 두 정상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공식화했다.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뜻인가? 북이 극렬 반발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대북 강경몰이에 대한 미국의 지지 발언을 이끌어낸 게 수확인가? 외교와 안보가 국내 정치의 볼모로 휘둘리고 있다. 구태가, 그야말로 의연하다.
서보혁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정치학 박사)은 “확장 억지와 전략동맹을 묶어 동맹의 미래에 대한 공동비전으로 제시한 것을 보면, 한-미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른바 ‘비대칭적 동맹관계’의 부활이란 게다. 서 위원은 “비대칭적 동맹관계는 강대국이 약소국의 안보를 일정하게 책임을 져주는 대신, 약소국은 강대국의 세계전략에 동참하는 일종의 안보교환 모델”이라며 “이런 현상은 주로 약소국 정권의 국내 정치적 기반이 약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약소국은 스스로 주권을 훼손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5월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친강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 군사동맹은 지나간 역사의 산물”이라고 일침을 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미 동맹의 비대칭성을 누그러뜨리고 호혜적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려 애쓴 지난 세월이 무색해졌다.
“사태 해결은 지극히 어렵다. 그렇다고 현상을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다. 쉽지 않은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지명자가 공동 창설한 외교·안보전문 싱크탱크인 ‘뉴아메리카안보센터’(CNAS)는 지난 6월11일 펴낸 대북정책 보고서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고민’을 이렇게 표현했다. 북한의 잇따른 도발과 이에 따른 제재가 악순환의 고리를 짓고 있다. 이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후보 시절 조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했다. 6년여를 ‘악의적 무시’로 허송하더니 북한의 1차 핵실험이란 ‘나쁜 행동’에 북-미 대화란 ‘보상’을 했고, 이 과정에서 동맹국을 철저히 무시했다는 게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호전적으로 행동을 하고 오래 기다리면 그 행동에 대한, 도발 행위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며 “그렇지만 우리(미국과 한국)가 국제사회로 보내는 메시지는 그런 패턴을 깨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런 비판의 논리가 북-미 대화를 재개해야 할 시점에서 고스란히 오바마 행정부의 발목을 붙드는 족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그에 대한 ‘처벌’은 반드시 뒤따라야 하니, 대화로 가는 길은 자꾸만 멀어진다.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의 대북강경론을 귀담아 들어줘야 하니, 대화의 불씨를 힘있게 살려내기도 쉽지 않은 처지가 됐다. 스스로 쳐놓은 덫에 걸려든 형국인 게다.
“북은 협상과 핵보유 놓고 선택 요구하는 중”“6자회담은 기본적으로 안보와 경제를 맞바꾸는 모델이다. 북한 입장에선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불능화까지 나아갔는데, 정작 손에 쥔 것은 중유 100만t이 고작이었다. 대화판이 깨지면서 그나마도 다 받지 못했다. 북이 생각하는 불능화는 핵폐기의 출발점이었다. 자기들은 이미 핵폐기의 문턱으로 들어가면서 안보에 상당한 부담을 안았는데, 북-미 관계 정상화를 포함해 가시적인 성과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북한은 협상력을 높이는 동시에 최소한의 억지력도 확보할 수 있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핵보유고를 늘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국책연구소 외교·안보 전문가는 현 상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두고 협상용이라거나 핵보유로 가는 것이라거나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다”며 “지금 북한은 협상과 핵보유라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양손에 쥐고 미국의 선택을 요구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북핵 문제 해법의 판도 그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기존의 접근법은 ‘비핵화를 통한 관계 정상화’였다. 비핵화라는 주변국의 목표가 앞에 있고, 관계 정상화라는 북한의 목적이 뒤에 놓인 구도다. 하지만 ‘관계 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도 얼마든지 대안이 될 수 있다. 양쪽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입구’와 ‘출구’가 어디인지가 무에 그리 중요할까?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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