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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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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지 말라, 빈곤에 반대한다

‘양극화’에 무감한 정치권력에 맞서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연대해 만든 일본 반빈곤네트워크
등록 2009-03-20 00:10 수정 2020-05-03 04:25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인 일본에서 지난 2007년 발생한 아사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앞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정부가 2006년 사회보조금 220억엔을 삭감한 게 화근이었다. 정부 지원에 의지해 살아오다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제외된 한 남성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집 근처에 자란 풀을 뜯어먹으며 연명했다는 그가 죽은 뒤 발견된 일기에는 “오니기리(주먹밥)가 먹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일본의 사회 안전망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새삼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확대되는 빈곤.” 반빈곤네트워크 활동가들이 도쿄의 경단련 앞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를 비판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확대되는 빈곤.” 반빈곤네트워크 활동가들이 도쿄의 경단련 앞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를 비판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주먹밥 먹고 싶다”, 아사자에 충격

경제위기의 한파가 본격적으로 밀려들면서,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푸어’ 문제가 일본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해고와 함께 회사 기숙사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6시간에 1천엔’짜리 PC방을 전전하는 ‘넷카페 난민’이나, 커피 한 잔으로 밤을 지새우는 ‘맥도널드 난민’으로 전락한 모습이 도심의 낯익은 풍경이 돼가고 있다. ‘경쟁력 강화’란 명분으로 ‘노동 유연화’가 급격히 이뤄지면서, 파견직·비정규직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탓이다. 한계선상에서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이들이 오늘도 PC방과 맥도널드 체인점을 배회하고 있다.

“불법 해고 등 부당노동 행위 관련 상담은 일본 전역에서 한 해 평균 5천여 건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부터 파견직, 파트타임, 계약직 등 비정규직에 대한 해고가 급속히 늘면서 상담 건수도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정규직 역시 곳곳에서 퇴직 강요가 이뤄지는 등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스다 미쓰테루 전국일반노동조합 전국협의회 서기차장은 “특히 애초부터 먹고살기 충분치 않은 임금을 받고 일해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갑자기 ‘구비키리’(해고)를 당하게 되면, 저축도 없는데다 고용보험 등을 통한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일순간에 직장과 집을 잃고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도쿄도의 다마강 둔치에선 이렇게 하나둘 모여든 노숙인 800여 명이 천막살이를 하고 있다.

현실은 일본 정부의 공식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노동자 3명 가운데 1명은 언제든 해고를 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 처지다. 후생노동성은 지난해 말 내놓은 자료에서, 올 1분기에만 비정규직 노동자 8만5천 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내다봤다. 청년세대 문제도 심각하다. 15~25살 청년 실업률은 지난해 6월 7%를 넘어섰고, 그나마 일자리가 있는 젊은이라도 5명 중 1명은 연간 수입이 150만엔 이하인 ‘저임금 노동자’다. 특히 이 비정규직·저임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는 곧 잠자리를 의미한다. 해고를 당해 회사 기숙사에서 쫓겨나면 하루아침에 거리를 떠돌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동현장에서 각종 불·탈법이 횡행하고 있다. 잔업수당을 따로 주지 않는 ‘서비스 잔업’은 기본이다. 노동조건을 정할 때 아예 유급휴가를 받을 수 없도록 하거나, 의료보험이나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도 아예 가입하지 않는 사례가 늘고 있다. “평범한 일을 하면서 평범하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일본 청년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버블경제’가 한창일 때 유행했던 ‘1억 총중류’(일본 국민 모두가 중산층이란 뜻)란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전 국민이 중산층이라고 외치던 그때에도 빈곤층은 존재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우쓰노미야 겐지(64·변호사) 반빈곤네트워크 대표는 “빈곤은 인간다운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며 “절대로 용인해선 안 되며, 뿌리를 뽑아야 할 사회적 현안”이라고 강조했다. 반빈곤네트워크는 저소득층·한부모 가정·다중 채무자·노숙인을 지원하는 단체는 물론 노동조합·언론인·연구자·법률가 단체 등 30여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지난 2007년 결성됐다. “격차(양극화)가 뭐가 문제냐. 국민생활의 최저 수준을 끌어올려도 부유층이 더 부유해지면 격차는 생길 수밖에 없다”던 고이즈미 당시 총리의 발언이 결정적 계기였다. ‘양극화’ 해법을 두고 정치권이 벌이는 허망한 논란에 분노한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힘을 모아 ‘반빈곤’의 깃발을 내건 게다. 우쓰노미야 대표는 “노동 분야의 규제완화와 파견근로가 가능하도록 한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이야말로 ‘격차’의 주범이자, 비정규직과 파견직 대량해고 사태를 몰고 온 원흉”이라고 강조했다.

실직자 캠프, 해고자 핫라인 운영
‘빈곤을 보이게 하자!’ 사회 안전망 확대를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한 우쓰노미야 겐지 반빈곤네트워크 대표가 ‘자르지 마라’는 글귀가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빈곤을 보이게 하자!’ 사회 안전망 확대를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한 우쓰노미야 겐지 반빈곤네트워크 대표가 ‘자르지 마라’는 글귀가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반빈곤네트워크가 주목한 것은 ‘빈곤의 가시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빈곤 문제를 실제 목격할 수 있게 만들어 변화를 가져온다는 게다. 대표적인 사례가 ‘실직자 난민캠프 파견마을’이다. 지난해 12월31일부터 올해 1월5일까지 엿새간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실직 노동자를 위한 천막촌 ‘해넘이 파견마을’ 행사는 자원봉사자만도 1700여 명이나 참여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특히 정치·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던 젊은이들이 대거 참가해, 일자리 문제가 청년층에게 얼마나 절박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민주당 등 야당이 노동자 파견법 개정안 마련에 나선 것도 ‘가시화’ 전략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반빈곤네트워크는 일본 전역에서 파견직 해직 노동자 500여 명을 끌어모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항의시위를 벌였다. 1999년 노동자 파견법 제정 당시 노동계의 반발을 제대로 다뤄주지 않던 주류 언론들도 앞다퉈 보도에 열을 올렸다. 경제위기 속에 개인 재산을 털어가며 고용안정을 위해 몸부림치다 부도 사태에 직면한 일부 중소기업과는 달리 상당수 대기업이 마구잡이식으로 파견직 노동자를 해고하고 있다는 고발 기사도 잇따라 대서특필됐다. 결국 후생노동성 장관까지 나서 이례적으로 현행 법령의 문제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자르지 마!’ 가늘게 빗발이 날리던 지난 2월25일 오전 11시께, 반빈곤네트워크 활동가들이 붉은색 펼침막을 들고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앞에 모여들었다. 막대한 흑자를 내고도 경제위기를 내세워 파견직 노동자들을 대거 잘라내는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질타가 빗줄기를 뚫고 퍼졌다. “우리는 대여 상품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3분의 2를 차지하는 파견직 해고 노동자들은 쇳소리를 토해냈다. 이들의 절규는 메아리가 돼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 변호사연합회는 그동안 일부 지역에서 운영하던 파견직 해고 노동자 지원을 위한 ‘핫라인’을 3월9일부터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생계가 어려운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사업으로 활동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반빈곤네트워크가 지핀 연대의 불씨가 경제위기의 한파로 얼어붙은 일본 사회를 조금씩 녹이고 있다.

도쿄(일본)=글·사진 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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