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선거법에 피노체트의 그림자가…

등록 2007-01-20 00:00 수정 2020-05-03 04:24

역사 속에서 민중들과 영욕을 함께해온 공산당의 대표 기예르모 티예이르…“현 정권이 반민주 헌법에서 집권한 건 흠결… 선거제 바뀌면 의회 진출 가능”

▣ 산티아고(칠레)=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하영식의 남미기행 ⑦

은퇴한 독재자의 죽음이 과거사 청산의 끝은 아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숨진 뒤에도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은 오늘의 칠레를 옥죄고 있다. 파블로 네루다가 사랑한 칠레 공산당은 7%대의 지지율을 확보하고도 피노체트 정권이 만든 반민주적 선거법 탓에 여전히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피노체트 정권의 손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실종자 가족들은 독재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역사적 단죄 기회마저 사라져버린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영식 전문위원이 산티아고에서 기예르모 티예이르 칠레공산당 당수와 비비안느 디아즈 실종자가족협회 사무국장을 만나 칠레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칠레 공산당은 남미에서 가장 대중적 기반이 넓고 오래된 공산당이다. 1912년에 공산당의 전신인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창당됐고, 10년 뒤인 1922년에는 공산당으로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당시 칠레 공산당은 의회에 대표를 파견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소비에트연방이나 제3인터내셔널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38년엔 칠레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칠레 공산당은 노동자·농민계급을 기반으로 조직된 반면, 사회당은 주로 지식인이나 사무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다는 차이가 있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 공산당은 강력한 선거기반을 구축하면서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냉전 초기 탄압으로 불법화되기도 했다. 10여 년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합법화된 당은 유명한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참여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비롯해 작곡가이자 대중가수인 비올레타 파라가 당시 칠레 공산당의 대중적 기반을 넓혔다.

1970년에 접어들면서 공산당은 사회당을 비롯한 다른 좌파 정당들과 연합해 인민연합을 결성하고 선거를 통해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한 사회주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의 육군참모총장이던 피노체트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 아래 1973년 9월11일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과 사회당·공산당 간부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다. 피노체트 정권이 학살한 공산당원은 1천 명이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진다.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 공산당은 게릴라 그룹인 ‘애국전선’을 조직해 피노체트 정권에 대항한 무장투쟁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0년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공산당은 다시 합법화됐다. 공산당은 현재 전 국민의 약 7%에 이르는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만들어진 반민주적 선거법 때문에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기예르모 티예이르(63) 공산당 대표를 만났다.

쿠데타 당시, 아옌데 정권 지지율 45%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아옌데 정부의 정책 실패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다.

=아옌데 정권은 모든 진보 정당들이 연합해 수립한 좌파 연립정부였다. 아옌데 정부가 들어서면서 천연자원, 특히 구리광산을 국유화시켰다. 당시 구리광산들은 미국 자본이 소유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을 자극했다고 본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칠레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경제적 혼란이 야기되면서 점차 경제적 불안정이 구조화됐다. 그럼에도 당시 노동자들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향상됐다.

굳이 아옌데 정권의 실책을 꼽으라면 중간층에 너무 많은 역량을 소진했다는 점일 게다. 중간층과 군부는 아옌데 정권에 반대했다. 하지만 칠레 국민의 45%가 절대적으로 아옌데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부의 쿠데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미국의 배후 지원이 없었다면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투옥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안다.

=1974년부터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공산당 청년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체포되자마자 공군부대 지하감옥에 던져졌고, 거기서 6개월 동안 온갖 고문을 견뎌냈다. 가장 치가 떨리는 기억이라면 여러 가지 약물을 주사한 뒤 이에 대한 반응을 검사하는 생체실험이었다. 반년이 지난 뒤에야 집단수용소로 이송됐고, 그곳에서는 500명의 동료들과 함께 지냈다. 2년 만기를 채우고 석방된 뒤에도 반독재 투쟁을 이어갔다.

군부의 탄압으로 공산당은 해체되지 않았던가?

=잔인한 탄압에도 지하활동을 이어갔고, 당원 수는 오히려 늘었다. 1980년에 들어 칠레 공산당은 피노체트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무기를 들었고, 1986년에는 피노체트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사건 뒤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반피노체트 시위를 벌였다.

공산당의 무장투쟁이 군부정권의 탄압을 가중시켰다는 지적도 있던데.

=절대 그렇지 않다. 피노체트에 의해 우리 당원들만 1천 명 이상이 학살됐다. 관련자까지 포함하면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상황에 비춰 무장투쟁을 비판하는 것은 앉아서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방어적 차원에서 시작됐을 뿐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우리의 투쟁을 마음속으로 지지했다고 본다.

천연자원의 국유화가 필수

사회당이 중심이 된 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현 칠레 정부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른다.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이 사회당 출신이고 또 많은 사회당 출신 인사들이 정부 요직에 있지만 사회주의적 정책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또 피노체트 정권이 제정한 반민주적 독재헌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도 큰 흠결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개헌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 탓인지, 공산당이 집권하면 미국의 봉쇄로 어려움에 처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민중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다. 칠레에서 경제를 회복시키려면 무엇보다 천연자원의 국유화가 필수적이다. 구리광산에서 뽑아내는 200억 달러 정도가 모두 외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이런 자금이 민중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지금보다 삶의 질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미국의 방해를 타개하기 위해 남미의 다른 국가들과 경제적으로 연대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여전히 옛 방식의 사회주의 모델을 고수하고 있는 건가?

=과거의 경험에서 최선의 것을 살려내 새로운 사회주의를 만들어가고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단지 하나의 모델일 수 없다. 각 국가마다 다르게 창조돼야 한다. 칠레는 아옌데 정권 시절 연립정부라는 경험이 축적돼 있다. 칠레 공산당은 단 한 번도 단독 집권 계획을 가진 적이 없다. 모든 좌파 정당과 연합한 연립정권을 수립하는 게 공산당이 가진 미래의 정치적 청사진이다.

남미 전역에서 좌파 바람이 부는 이유가 뭘까?

=여전히 민중 수탈구조가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남미의 천연자원을 수탈하려는 외세의 개입과 지배권력에 대해 이제는 대다수의 민중들이 깨우쳤다는 것을 뜻한다. 남미에서 좌파 강세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칠레 국민들의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 역시 꾸준히 상승하고 있고, 앞으로 선거법이 개정돼 의회 진출이 가능해지면 지지도는 더욱 급상승할 것이다.

남미 전역 좌파 바람의 이유

칠레 민주화의 진전을 위해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는 뭘까?

=선거제도다. 현 정치환경으론 민중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 과거엔 선거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때문에 공산당은 의회에서 단 1석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소수민족 보호와 절대 빈곤층 지원 문제도 중요한 사안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질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