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패 혐의로 피소된 가운데 갑작스럽게 죽음 맞은 칠레의 독재자…꾀병이다-아니다 설왕설래가 오가던 사망 이틀 전부터의 현지 리포트
하영식의 남미기행 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입원한 육군병원으로 갔다. 병원 정문 앞에는 경찰이 수십 명 깔려 있었고, 정문 앞 인도에는 시민 수십 명이 피노체트 사진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피노체트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다. 피노체트 사진 위에 쓰인 ‘IMMOTAL’(불사)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피노체트를 영원히 죽지 않는 신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육군병원을 지키고 있는 지지자들
병원 정문 앞 잔디밭에는 취재진들이 아예 짐을 풀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병원 쪽에선 취재진의 병원 내 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취재진들은 피노체트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출입하면 모두 이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몰려갔다.
칠레의 방송과 신문 대부분은 그가 부정부패 혐의로 피소되자 병을 구실로 잔꾀를 부리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그렇지만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취재진들 사이에선 “그가 과연 병원문 밖으로 걸어서 나올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정확히 이틀이 지난 일요일(12월10일) 오후가 되면서 산티아고 거리에서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TV에는 피노체트가 입원한 육군병원의 건물과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피노체트가 정오께 사망했다는 보도였다. 육군병원으로 다시 달려갔다. 이틀 전과는 달리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고, 병원 앞길은 아예 교통이 차단된 상태였다. 기마경찰까지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들이 계속 불어나는 인파를 통제하고 있었다.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대부분 칠레 국기와 피노체트의 사진을 들고 병원 앞에 모여 있었다. ‘고마워요, 피노체트’라고 쓴 피켓을 든 여성들과 ‘고마워요, 나의 장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현장에서 고등학교 미술교사라는 베로니카(48)에게 피노체트를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피노체트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를 제일로 꼽았고, “피노체트는 칠레를 발전시킨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변에 우뚝 선 건물들을 가리키며 “이 모두가 피노체트의 공적”이라고 강조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저항하다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가난과 배고픔”이라는 말로 아옌데 정권 시절을 무질렀다. 피노체트가 학살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물었다. “지금도 이라크에서 미국에 의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당시 칠레는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중이었다”는 대답이 쉽게 돌아왔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젊은이의 춤판
육군병원 주변의 인파를 헤치고 나와 대통령궁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로 갔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피노체트의 죽음을 환영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는 곧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로 발전했다. 거리 곳곳에서 타이어나 나무를 태우는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다.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깨 경찰에게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지켜보던 시민들은 “피노체트가 죽었으면 축제를 벌일 일이지 왜 폭력시위를 벌이느냐”고 시위대를 비난했다. 어둠이 깔리자 거리의 시민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대신에 술 취한 무리들이 시위대에 가담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상점과 공중전화대의 유리를 깨뜨리고 닥치는 대로 공공기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무법천지였다. 피노체트가 숨진 일요일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열리던 12월12일 산티아고 거리는 예상보다 평온했다. 오전부터 대통령궁인 ‘모네다’ 앞에서 공산당에서 주최한 피노체트 사망 축하집회가 열렸다. 5천여 명의 인파가 모네다 광장을 가득 메웠다. 공산당은 피노체트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은 뒤 죽인 공산당원 수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피노체트 정권에서 용케 살아남은 늙은 공산주의자들의 얼굴에선 죽어간 동료들로 인한 슬픔이 묻어났다. 집회가 끝나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 피노체트의 사망을 축하하는 춤판을 벌였다.
비슷한 시각 육군군사학교에선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군인장’으로 치러졌다. 많은 군인들이 여전히 피노체트를 군의 최고지휘자로 예우하는 모습이었고,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기 위해 5만여 인파가 운집했다. 국방장관이 식장에 도착하자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그들은 정부가 ‘국장’을 거부한 것에 몹시 분노했다. 피노체트의 가족들이 나와 그를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웠다.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주검은 헬기로 가족묘지로 이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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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늦은 오후 가톨릭 교회의 문서보관실로 발길을 옮겼다. 30년이 지난 지금, 가톨릭 교회가 피노체트와 투쟁하기 위해 조직했던 정의평화위원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당시 사무실은 문서보관실로 바뀌어 있었다. 사서에게서 책 한 권을 건네받았다. 피노체트 정권 때 목숨을 잃은 7명의 사제에 대한 자료집이었다. 당시 칠레 가톨릭 교회는 추기경과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앞장서 피노체트 정권에 저항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라울 실바 추기경은 ‘레드 카디날’(붉은 추기경)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피노체트 진영에서 혐오했던 인물이다.
사망자를 극적으로 줄인 가톨릭 교회
수소문 끝에 당시 위원회에서 활동하다 군부 정권에 의해 투옥됐던 페르난도 살라스(69) 신부를 만났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만났던 정치학과 미겔 교수는 “칠레의 희생자 수가 줄었던 것은 가톨릭 교회가 민중들 편에 섰기 때문”이며, “아르헨티나에서 3만 명이라는 큰 규모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유 중 하나는 아르헨티나 교회가 칠레와는 달리 군부독재의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겔 교수의 말은 페르난도 신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평신도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사제라고 죽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없다. 정권의 수배를 받고 숨어 지내던 사람들을 바티칸의 도움을 받아 국외로 탈출시키는 일을 했는데, 군부는 이를 빌미로 사제들까지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나를 포함해 5명의 신부가 투옥됐는데, 그 전에는 살해당한 사제까지 있었다.” 살라스 신부는 “당시 교회가 칠레 국민들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것”이라며 “칠레 가톨릭 교회의 일원임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1973년 9월11일,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는 자신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아옌데 대통령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 대통령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였다. 미 중앙정보국이 작성한 쿠데타 계획에 따라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을 비행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둘러싼 뒤, 사격을 가해 대통령궁에 남아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의 측근들을 모두 살해했다.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곧이어 저항하는 모든 민중세력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살아남아 워싱턴에 망명해 있던 아옌데 정부의 외무장관까지 죽였다. 피노체트 정권은 좌파라는 의심이 가면 끝까지 추적해 모두 체포해 구속하거나 살해했다. 재판이나 합법적인 절차는 무시됐고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시 칠레에서 연행된 사람은 10만 명을 헤아린다. 이 가운데 수천 명은 행적도 없이 사라졌다.
피노체트의 야만적인 인권유린을 숨죽여 지켜보기만 하던 가톨릭 교회는 마침내 저항하기 시작했다. 칠레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국교인 가톨릭 교회의 저항은 피노체트 정권의 가장 큰 도전이었다. 쿠데타가 발생한 해의 10월로 접어들면서 피노체트 군부의 인권유린과 살해를 지켜보던 실바 추기경은 사제들에게 국민들을 보호할 것을 호소했다.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정교와 개신교, 유대교까지도 포괄한 정의평화위는 이렇게 시작됐다. 나중엔 각 지역에까지 지부를 조직했고, 국외에서도 반피노체트 활동을 벌였다. 피노체트 군부가 가장 증오한 조직으로 정의평화위를 꼽는 것은 당연했다.
저녁이 되면서 시내 한복판에서는 300명 정도의 좌파 인사들이 참석한 실종된 여성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렸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이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추모제에 참석한 피노체트 시절 한 정치범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우고 살리나스(54)는 1975년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체포돼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풀려났다. 당시 24살로 공산당의 청년당원이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집으로 밀어닥친 경찰에 의해 눈을 가린 채 미지의 장소로 끌려갔다. 악명 높은 ‘빌라 그리말디’였다. 이곳에서 그는 5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다. 고문이 끝나자 다시 다른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2년을 채우고서야 풀려났다.
“운 좋게도” 살아남은 그가 1977년 석방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삼촌이 끌려갔다. “그때 경찰에 끌려간 삼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석방된 뒤에도 경찰의 계속되는 사찰로 칠레에선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다시 체포될 것을 감지한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 10년을 그곳에서 보낸 뒤 1986년에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칠레는 피노체트가 통치하고 있었고 상황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그는 1991년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과거 청산은 현재 진행형
안드레스벨로대 법대 학장인 파트리코 자파타(47) 교수는 “피노체트는 이미 10년 전부터 정치적으로 사망한 상태였다”며 “그의 죽음이 칠레에 끼칠 영향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지적대로 “칠레 전체 인구의 10% 남짓이 여전히 피노체트를 지지”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은퇴한 독재자는 역사의 단죄 없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았고, 칠레 사회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상처를 핥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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