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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기둥’을 약탈한 자들

등록 2004-09-24 00:00 수정 2020-05-03 04:23

무솔리니 침략군이 빼앗은 악숨 오벨리스크, 마침내 에티오피아로 돌아오다

▣ 헨트(벨기에)= 양철준 전문위원 yang.chuljoon@wanadoo.fr

9월14일 런던과 워싱턴의 이탈리아대사관 앞에서 특별한 항의집회가 열렸다.

런던과 워싱턴의 현지 시각으로 오전 11시30분에서 오후 2시까지 진행된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악숨 오벨리스크의 반환을, 더는 지연시키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이탈리아 정부의 성의 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이번 집회는 약탈한 오벨리스크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한 이탈리아 정부가 명백히 납득되지 않는 사유를 거론하며 반환을 계속 지연시켜온 데 대한 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오벨리스크는 귀화한 시민이라고?

1935년 10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침략군은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18개월 동안 점령했다. 이 점령 기간에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했다. 약탈된 문화재 가운데 특히 상징적 의미를 지닌 악숨의 오벨리스크도 점령기인 1937년 무솔리니의 명령에 따라 약탈당했다. 로마의 콜로세움 근처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본부 앞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약 3천년 전에 에티오피아 북부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악숨왕국에 세워진 6개의 오벨리스크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오벨리스크다. 에티오피아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인 4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으로 만든 악숨 오벨리스크는 높이 24m, 전체 무게 180t에 이르는 거대한 석조물이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침략군이 약탈할 당시에도 세 토막으로 나눠 오늘날의 에리트리아에 있는 마사와 항구를 통해 해상으로 운송했다.

악숨왕국은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 북부에 창건한 고대왕국으로, 에티오피아 정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메넬리크 1세는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남아라비아의 시바 여왕이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 솔로몬 왕을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왕의 궁전으로 찾아가 수수께기를 냈다고 한다.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었는데 그가 바로 메넬리크 1세다. 이토록 유서 깊은 왕국인 까닭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았고, 이탈리아 점령군은 악숨의 오벨리스크, 유대의 사자상 등 진귀한 문화유산을 마구 약탈해갔다.

1947년 국제연합의 평화조약이 조인됨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한 18개월 동안 약탈한 모든 문화재를 반환해야 할 의무를 졌다. 그러나 문화재 반환 작업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 1997년 4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정부는 악숨 오벨리스크 반환에 관한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오벨리스크의 반환 노력이 급진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1998년 에티오피아 정부는 오벨리스크 반환 기념우표를 발행할 정도로 에티오피아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 반환 약속 이행을 관철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양국간 상호 합의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환이 이뤄지기는커녕 반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들이 종종 돌출했다. 진정으로 반환할 의사가 있는지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벨리스크의 반환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이탈리아의 정치인은 오벨리스크가 수십년 동안 이탈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오벨리스크는 ‘귀화한 시민’이나 다름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와 함께 수송 과정의 난점과 위험성을 반환작업 지연의 사유로 제시하기도 했다. 즉, 대형 수송기로 항공 수송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해상 수송이 불가피한데 해상 수송을 하려면 홍해에 면한 에리트리아의 마사와 항구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양국의 분쟁으로 해상 수송이 여의치 않다는 논지였다. 항공 수송의 경우 이토록 거대한 석조물을 수송하려면 러시아의 안토노프 수송기나 미군의 C-5 갤럭시 수송기가 적합하다. 거대한 석조물을 실은 대형 수송기가 착륙하기에 악숨공항은 활주로도 짧고 수송기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활주로 노면이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 반환에 난색을 표명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반환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당사자들은 이런 이유들이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탈리아 정부의 성의 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악숨 오벨리스크는 로마의 대기오염으로 검게 그을려 있고 상당한 훼손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에 로마에 계속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2년 5월에는 오벨리스크 상단에 벼락이 떨어져 손상을 입기도 했다. 집요한 압력에 밀려 결국 2003년 말에 오벨리스크는 해체·분리되어 현재 최종적인 반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약탈한 문화재의 반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악숨의 오벨리스크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02년에 스코틀랜드 성공회가 솔선수범해 약탈한 문화재를 반환한 적이 있다. 영국군이 1868년 에티오피아의 막달라 요새를 공격해서 약탈해간 성궤의 복제품이 2001년 에든버러의 교회에서 발견되자 이듬해인 2002년 반환함으로써 문화재 반환의 바람직한 선례를 남겼다. 영국군이 막달라 요새 공격 당시 약탈해간 양피지 필사본, 금관, 금제 십자가와 성배(聖杯)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특히 에티오피아정교회에서는 종교적 상징성을 강하게 띤 유물들이었다. 출애굽기(25:10)에도 언급되는 성궤의 복제품 반환으로 약탈당한 문화재 반환이 중대한 관심사로 부상하게 됐다.

학자 · 종교계 인사 등의 부단한 노력

약탈당한 문화재 반환 노력에 있어 에티오피아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에티오피아 정부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역사학자, 종교계 인사, 지역 주민 등 많은 분야를 아우르는 사람들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오벨리스크를 반환하기 위한 청원에 에티오피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서명했고 에티오피아정교회의 총대주교인 아부나 파울로스 5세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게 오벨리스크의 반환에 적극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다. 에티오피아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교류가 거의 전무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아부나 파울로스 5세의 노력은 이례적이다.

폭력이 역사를 썼던 시대에 약탈당한 문화재들을 반환하는 작업은 평화의 시대가 요청하는 소명이다. 유배당한 문화재는 이미 그 생명을 소실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역사의 상징일 따름이다. 유괴한 문화재를 부여안고 있는 국가들은 문화의 선진국을 자칭할 자격도 없을 뿐 아니라, 문화 선진국임을 사칭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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