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터키에 숨어사는 체첸 난민들의 잔혹한 삶… 지뢰와 화학탄으로 오염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font>
▣ 이스탄불(터키)= 글 · 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이스탄불의 변두리 지역인 움라니예의 한 이슬람 사원 마당에서 두 아이가 열심히 땅바닥에 돌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을 보자 금방 사원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아이들을 따라 들어간 곳은 사원 지하를 개조해서 만든 난민들의 거주지였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난민들이 하나둘 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곧이어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만난 양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두 체체니아에서 온 피난민들로 일부 사람들은 사원 지하실에서 길게는 4년 동안 지내기도 했다.
그때 돌연 휠체어를 탄 사람이 사람들을 헤집고 나타났다. “푸틴이 내 다리를 이렇게 만들었다오.” 하반신을 잃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알리 구니셰프(35)의 첫마디였다. 그가 몸을 의지한 휠체어는 낡고 썩은 것이어서 곧 부서질 것 같았다. 자녀 셋과 부인이 그의 옆을 지키고 서서 그의 얘기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두 다리를 잃은 이유는 지뢰 때문이다. 1999년 9월, 러시아군이 체체니아의 수도인 그로즈니 주위에 심어놓은 50만개의 지뢰 중 하나를 밟으면서 하반신을 완전히 절단해야 했다. 휠체어에 기댄 채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면서 몇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고 울먹였다.
터키에 건너왔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다. 난민촌 사람들은 “터키 정부에서 전혀 난민들을 돌보지 않는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구니셰프씨뿐 아니라 많은 난민들은 정신·육체적으로 지친 상태지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체첸 반군이 북오세티야 공격할 이유 없다
롬 알리 난민 대표는 외부 인사들에게 난민들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지원을 얻어내는 일을 한다. 사원 사무실에는 난민 대표와 함께 여러 남자들이 비탄에 젖어 있었다. 북오세티야의 베슬란학교에서 벌어진 참사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린이 340명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800명 이상이 다친 희대의 학살극을 주도한 인물들이 체첸 출신의 테러리스트라는 발표에 속이 상해 있었다. 이로 인해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여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이들은 러시아 특수부대가 참사를 유도했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정부가 체체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저지른 자작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박해를 받는 이웃나라인 북오세티야에서 체첸 반군들이 어린이들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벌일 이유가 없다고 강변했다. 지금까지 체첸 반군은 한번도 북코카서스인들을 인질로 잡은 예가 없었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그리고 러시아와 세계 언론이 진실을 조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오세티야를 러시아인 양 보도하고, 오세티야 민족이 마치 러시아 민족인 양 떠드는데 오세티야는 러시아가 아닌 완전히 다른 민족으로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오세티야 민족의 참사에 눈물을 흘렸다는 언론 보도는 거짓말이라며 조목조목 언론 보도 내용을 비판했다. 또 언론 보도의 철저한 통제와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 거짓말을 문제 삼았다. 러시아 정부는 인질 수를 300명으로 줄여 발표했는데, 사실은 1200명 이상이 인질로 잡혀 있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사전에 사건을 기획했다는 의혹을 던져주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난민 신세
그리고 설령 체첸인들이 인질극을 주도했다손 치더라도 이는 체첸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체첸 반군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체첸인으로 구성된 무장세력들 중 소수는 러시아의 옛 비밀경찰(KGB)에 의해 조직되고 움직이면서 체첸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러왔다. 베슬란학교의 참사를 주도한 그룹이 바로 이들이라는 의혹도 제기했다. 이들은 또 푸틴 대통령은 2년 전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태 때처럼 인명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베슬란학교의 인질 참사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베슬란학교의 인질 참사는 터키에 살고 있는 모든 코카서스 민족사회를 휘저어놓은 뜨거운 이슈로 연일 코카서스 민족 대표들이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체첸 난민들은 대부분 4년 전에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터키로 넘어왔다. 일단 1개월 방문비자를 끊어서는 난민 신세로 4년째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999년 9월에 시작된 2차 체첸전쟁은 러시아 정부가 체체니아를 초토화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공세를 벌였다고 난민들은 회고했다. 지속적인 융단폭격, 화학탄 투여, 무차별 로켓포 발사로 수도인 그로즈니는 완전히 폐허가 돼버렸다. 이 때문에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체첸 국민들은 난민 신세로 전락해 체체니아를 떠났다. 대부분 러시아 연방 내의 이웃 국가에서 지내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러시아군의 위협을 피해 터키를 비롯한 유럽으로 넘어가고 있다.
전쟁 뒤 난민들의 삶은 모두 엇비슷하다. 두 딸과 함께 터키로 피난 온 오스마 카자카리(37)는 그로즈니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금속공장의 기술자로 일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체체니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그의 삶도 돌변했다. 1994~96년의 1차 체첸전쟁 기간에는 가족과 함께 체체니아의 산악지대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 뒤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다시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전쟁 뒤의 무법천지 상황을 겪었지만 러시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라에서 산다는 희망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뎠다. 그러나 1999년 여름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이웃은 모두 피난할 준비를 했지만 그는 책임을 맡은 공장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드디어 러시아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폭격한 곳이 그의 공장이었다. 금속물질 생산 공장이라 러시아군의 폭격 대상 1순위였다. 더는 그로즈니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가족과 가방 두개만 달랑 든 채 피난을 떠났다. 국경 근처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며칠을 걸어 겨우 그루지야로 넘어갔다. 산악지대의 난민촌에서 생활하면서 체체니아로 다시 돌아갈 날만 기대했지만 체체니아의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이때부터 체체니아의 상황을 듣기 위해 매일 라디오에 귀기울였는데 이제는 라디오를 듣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1년 가까이 산악지역 난민촌에서 생활한 뒤, 4년 전에 터키로 와 가족과 함께 줄곧 모스크의 지하실에서 생활해왔다. 그는 금속 관련 기술을 갖고 있지만 체류증이 없어 취업은 불가능하고 공사판만 떠돌고 있다.
체체니아 인구 절반이 난민
난민들은 사원 지하실의 좁은 공간을 나눠 만든 작은 교실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는 여교사와 10명 남짓한 어린이들이 열심히 수업 중이었다. 바로 러시아 정부가 말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아이들”이었다. 비록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나 아이들은 열심히 여교사의 가르침을 따라하고 있었다. 교실을 나와서 뒤따라간 곳은 작은 체육관이었다. 이곳에는 역기도 놓여 있었고 샌드백도 걸려 있었다. 어린이 두명이 자신이 배운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체첸 난민 어린이들이 정식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임시로 만든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터키 정부에서 체첸 난민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도 터키 정부에서 아무런 협조를 얻어낼 수 없다. 러시아의 눈치를 보는 터키 정부 때문에 난민들은 신분증 없이 수년을 지내왔고 난민 혜택도 전혀 받지 못했다. 특히 난민의 자녀는 신분증이나 서류가 없기 때문에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문제로 불평도 할 수 없는 처지다. 한달 전에는 체첸 난민 3명이 불법 체류자로 강제 추방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참고 지낸다.
현재 이스탄불 체첸 난민들은 분산돼 살고 있다. 약 500명의 난민이 있으나 다른 도시나 이스탄불 빈민가에도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네르바체에 있는 난민촌은 터키 철도청이 직원 사용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 180명 정도가 생활하는 이곳에는 2년 동안 수도와 전기, 가스 시설이 없는 상태로 살아오다가 지난해부터 전기가 들어왔다. 베이코즈 난민촌에는 허름한 3층 건물 전체를 난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비교적 다른 난민촌에 비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가스와 수도,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고 중앙난방 시설이 갖춰져 있다. 반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많은 난민들이 투병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난민들은 개인이나 구호단체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형편이나 이것도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다.
체체니아는 자유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미 인구의 30%가 전쟁으로 희생됐고 2차 체첸전이 벌어진 1999년 이후 체체니아 인구의 절반인 50만 체첸인들이 다른 나라의 피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러시아의 공습과 폭격으로 그로즈니를 비롯한 체체니아 도시들은 모두 폐허로 변했고, 화학탄 사용으로 땅이 오염되면서 더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변했다. 더구나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산에서 숨어사는 경우를 빼고는 모두 체체니아를 떠났기 때문에 도시는 텅 비어 있다. 1999년 러시아의 전면 공격이 가열되면서 체첸 난민들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주위의 국가들로 넘어갔다. 체체니아와 가장 가까운 잉구셰티아로 수십만명이 넘어갔고, 그 밖에도 조지아, 다게스탄과 북오세티야, 우크라이나, 터키 등지로 흩어졌다. 러시아연방 거주 난민들은 모두 러시아군의 통제를 받으면서 지내는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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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유인하는 지뢰까지 만들어
현재 체첸 난민들은 한목소리로 모국인 체체니아 귀환을 염원하고 있으나 돌아가도 정상 생활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러시아군이 장악한 체체니아는 무법천지로 변해 안전 문제가 심각한 수위에 도달해 있다. 그동안 체체니아에서는 수천명의 체첸인이 행방불명 상태로 목숨을 잃었고, 러시아 정규군이 아닌 용병들에게 연행되는 경우에는 몸값을 지불해야만 석방되는 일이 다반사다. 러시아 정부는 용병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는 대신 이런 식의 수입을 허용해왔다. 따라서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난민들이 돌아가기란 힘든 형편이다. 또 난민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었고, 집과 재산을 송두리째 파괴당했기 때문에 귀향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다. 그들이 경작하던 농지는 모두 화학탄에 오염돼서 가축을 키우거나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식수도 오염된 상태다. 또 다른 위험은 지뢰다. 전쟁 중 러시아군은 체체니아 땅에 50만개의 지뢰를 매설했다고 공공연히 밝힌 바 있다. 이미 지뢰로 인해 수천명이 목숨을 잃거나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 심지어 러시아군에서 체첸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 제작한 장난감 모양의 지뢰를 심어놓고 어린이들을 유인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기도 했다고 인권단체들이 격분하고 있다. 이런 일이 공공연히 일상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체첸인들은 러시아가 체첸 민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한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다. 당시 모스크의 지하실에서 만났던 한 40대의 체첸인은 러시아가 체체니아에 핵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까지 드러냈다.
이미 체체니아를 향한 러시아의 대응은 이성을 상실한 상태다. 공산주의 세계의 선두주자로 20세기의 반쪽 세계를 이끌었던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러시아의 발목을 놓지 않고 함께 나온 체체니아였다. 이라크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준 거울이라면 체체니아는 러시아의 부끄러운 제국주의적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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