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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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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르완다는 왜 미쳐버렸는가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10주년 추모식을 계기로 돌아본 100만명 학살의 참상… 제국주의가 교묘히 증오를 조장하다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언 땅에서 라일락을 싹트게 하고 봄비가 죽은 뿌리를 흔들어놓아 ‘잔인한’ 엘리엇식 4월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죽음을 상기해야 하기에 더 잔인한 또 다른 4월이 있다.

4월7일,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한 공설운동장에는 15개국의 대표단과 르완다 국민들이 모인 가운데 엄숙한 추모식이 열렸다. 1994년 르완다 전국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던 ‘인종학살’ 10주년을 맞았다. 학살로 숨진 이들의 넋을 기리는 동시에 지금도 기억 속에 각인돼 있는 참상을 상기해 지구상에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의도로 매년 4월마다 치러지는 행사다.

벨기에가 도입한 ‘카스트 제도’

이번 4월이 예년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학살이 일어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끔찍한 일을 한 단락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을 더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아내도 죽이고, 형제도 죽이고, 늙은 어머니도 죽이고, 친척도 죽이고, …모두 죽였어요”라고 외치는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은 암울한 역사의 한 장으로 접어두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잊혀지기는커녕 나날이 되살아나는 고통이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 100만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르완다쪽은 90만~100만명을, 국제연합(UN)은 8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총인구가 800만명을 겨우 헤아리는 나라에서 다수족 ‘후투’(Hutus)가 소수족 ‘투치’(Tutsis)를 학살하면서 인구의 10%가 넘는 사람들이 살해된 셈이다. 르완다의 비극이며, 인류사에 남겨놓은 또 하나의 인간 만행이다.

르완다의 인종학살은 터키의 아르메이아인 학살, 나치의 유대인·집시 학살 그리고 크메르군의 캄보디아인 학살과 함께 20세기에 행해진 가장 끔찍하고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학살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르완다에서 일어났을까. 게다가 학살이 강행돼 100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국제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1899년 르완다는 부룬디와 함께 공식적으로 독일의 식민지가 된다. 이로써 서유럽 제국들이 앞다퉈 과자 조각 나눠먹듯 아프리카를 탈취하던 시절, 마지막으로 식민지 대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식민통치에 어려움을 겪던 독일이 물러나고, 1919년부터는 벨기에령으로 바뀐다. 중앙아프리카 지역에 이미 식민지들을 갖고 있던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루안다-우룬디’라는 지명으로 부르며 옆 나라인 벨기에령 콩고의 지방쯤으로 간주하며 통치했다. 당시 이 지역을 구성하고 있던 대표적인 두 종족이 ‘투치’와 ‘후투’다.

학살을 고무한 프랑스는 말이 없다

식민통치 이전까지 투치족이 왕족을 형성하고 있긴 했어도 역사상 공존하며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를 사용해온 종족들이라, 이들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견해다. 그런데 이들 종족 간에 인종차별적 인식을 부추긴 것은 벨기에였다. 식민통치기간 벨기에는 통치정책의 하나로 부와 직업에 따라 차등을 매기는 일종의 카스트제도를 도입했다. 신분증에 종족명을 명기하면서까지 부유하고 엘리트층인 투치족과 그렇지 않은 후투족을 차별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아프리카 식민지 나라들의 독립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이미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던 투치족 사이에는 벨기에에 맞서 독립 주권을 획득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한편 후투족은 독립과 더불어 벨기에의 간접통치가 사라질 자리에 절대적인 지배층으로 들어서게 될 투치족에 대한 우려가 생겨나면서, ‘반투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불안정 속에서 벨기에는 독립을 외치는 투치족을 억누르기 위해 기존 정책을 바꿔 이번에는 후투족을 지원했다. 급기야 1959년 후투족이 일으킨 반란과 학살로 수많은 투치족들이 살해되거나 이웃나라로 떠나게 되고, 결국 후투족이 권좌에 앉는다. 그런 직후 1962년 7월 르완다와 부룬디는 각각 독립국가로 거듭 태어난다.

무릇 탈식민지 나라들 대부분이 그렇듯, 독립 뒤 르완다의 상황은 한마디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1973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후투족인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식민시대의 잔재인 인종차별 정책을 다시 도입했다. 식민시절과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투치족보다 우월한 후투족’이라는 모토를 내건 점과 그 내용이 더욱 강경화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90년 발표된 ‘후투 10계명’ 내용을 살펴보자. “후투족은 투치족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모든 지배계층은 후투족이 장악해야 하고, 후투족은 투치족과 결혼을 해서도, 또 투치족을 고용해서도 안 되며, 투치족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극심한 인종차별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투치족은 국내에서 차별받는 소수의 투치족과 이웃나라로 달아난 투치족들이 있었다. 후자 가운데는 군사세력의 기반을 닦으면서 르완다 재탈취의 꿈을 키워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런 중에 투치 게릴라 운동단체이자 군사·정치단체인 르완다애국전선(FPR)이 1987년 이웃나라 우간다에서 정식으로 창립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탈식민으로 획득한 해방과 자유의 자리에 이젠 종족 간의 내전 기운이 무르익게 되었다. 마침내 1990년 르완다 북쪽 우간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에서 FPR의 공격이 개시된다. 전쟁 동안 르완다의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고 자이르(지금의 콩고)군이 후투족쪽에 가담해 군사 개입을 했다. 이 전쟁의 여파로 르완다 내의 인종차별 기운은 더욱더 짙어져 ‘후투 10계명’까지 나오게 된다. 1993년 UN의 개입으로 FPR의 국내 복귀 조건인 평화협약이 체결되지만 그것은 현실을 외면한 국제기구의 환상일 뿐이었다.

1994년 4월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을 실은 비행기가 폭격당하자 다음날 바로 인종학살이 펼쳐졌다. 인종청소를 겨냥해 치밀하게 계획된 만행이었다. 투치족뿐 아니라 친투치 성향의 후투족까지 대학살의 제물이 되었다. 학살 직전 르완다의 인구는 800만여명을 헤아렸고, 그 가운데 후투족 85%, 투치족 14% 그리고 극소수의 트와족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살해당한 자들의 75%가 투치족, 나머지가 후투족인 것으로 알려진다.

하루에 1만명씩, 석달 동안…

1994년 7월4일 투치족의 FPR가 수도를 점령하면서 학살은 끝이 났고, 그와 함께 투치족이 다시 권좌에 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제사회의 외면이 그렇듯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르완다 현 정부와 인권단체들의 호소가 이어졌고, 1998년 클린턴 행정부는 인종학살을 방치한 무책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2000년 벨기에 총리는 6돌 추모식에서 식민통치와 인종학살 외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같은해 UN도 학살을 막지 못한 잘못을 반성했다. 하지만 1990년 전쟁 전후, 르완다의 후투족 군사와 정치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투치족 대학살을 격려한 혐의를 받고 있는 프랑스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4월7일 추모식에서 이런 뻔뻔한 프랑스의 태도를 비난했다.

석달 동안 하루에 1만여명씩을 살해한 학살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로 겨눈 전쟁이 아니라 이웃·선생·학생·신부 등이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돌변해 칼, 도끼, 몽둥이, 괭이 등을 들고 저지른 살상의 장면을 상상하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르완다의 학살은 그런 식으로 행해졌다. 사망자 수뿐 아니라 인구 10명 가운데 1명이 학살범으로 수감된 사실은 참상의 끔찍함을 짐작하게 한다. 수많은 무리를 이룬 살인자들이 다른 무리를 쫓아가며 머리를 내리쳤고, 나무를 자르듯 사람들의 사지를 잘랐으며, 살인을 하기 위해 마치 출근이라도 하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3개월 동안 학살작업을 이어갔다. 그런 지옥 속에서 모든 가족이 주검으로 변한 장소에서 살아남은 자는 오히려 죽기를 갈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 어떤 이는 그때 당한 성폭행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자식을 바라보면서, 또 어떤 이는 밤마다 허덕이는 악몽으로 그날을 되새기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도 스스로 묻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까.” 10년 동안 되묻고 있지만, 아무도 속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이는 없다.

■ 참고 웹사이트 http://www.avega.org.rw(AVEGA·생존여성들을 돕기 위한 르완다의 인권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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