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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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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구단이 몰고 온 고교야구 창단 붐

등록 2013-01-22 17:43 수정 2020-05-03 04:27

“허이!”
운동장 반대편에서 굵고 짧은 기합이 터졌다. “딱!” 기합에 맞춰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야구공은 외야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1월17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실내빙상장 옆. 지난해 여름 새로 문을 연 의정부 생활체육 야구장에서 고교야구 선수 한 무리가 칼바람을 견디며 연습에 한창이었다.
“허리 집어넣어! 앞에 쳐다보고!” 홈플레이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선수들의 타격을 지켜보던 유영원(44) 감독이 소리쳤다. 찬바람 탓일까, 아니면 땀 때문일까. 벌건 얼굴을 한 선수들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생활체육 야구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상우고 야구부 선수들. 상우고 야구부는 2월에 공식 창단식을 열고 대한야구협회(KBA) 등록 절차를 밟는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생활체육 야구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상우고 야구부 선수들. 상우고 야구부는 2월에 공식 창단식을 열고 대한야구협회(KBA) 등록 절차를 밟는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주전 노리고 모인 ‘외인구단’

이들은 의정부시에 유일한 고교야구팀인 상우고 야구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선수들 옷차림이 제각각이다. 마운드에서는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붉은 운동용 스타킹을 신은 선수가 공을 뿌렸다. 타석에는 흰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섰다. 아예 다른 학교 이름이 쓰인 점퍼 차림의 선수도 있다. 같은 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함께 맞춘 모자의 앞과 왼쪽에 각각 새긴, 상우고를 뜻하는 ‘S’와 ‘의정부’라는 글씨뿐이었다.

상우고 야구부가 ‘프로야구 올스타팀’처럼 화려한 유니폼을 갖추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지난해 12월 처음 연습을 시작해 한 달을 넘긴 이 팀은 공식 창단식도 열지 않은 신생팀이다. 이 때문에 공식 유니폼은 아직 못 맞췄다. 공식 경기를 치른 적도 없다. 2월에 경기도교육청과 대한야구협회(KBA) 등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고 창단식을 치르려 한다. 상우고 야구부가 탄생한 배경에는 그동안 사회인 야구 등을 꾸준히 지원한 ‘의정부야구협회’의 공이 컸다. 지난해 의정부야구협회가 의정부시와 함께 재정 지원을 제안하고, 상우고가 선수들의 등록금 면제 등을 지원하겠다고 나서 야구단 창단이 급물살을 탔다.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 출신인 유 감독이 임명되고 선수도 14명이 모였다.

신생팀의 ‘라인업’은 말 그대로 ‘외인구단’이라 부를 법하다. 전체 선수 14명 가운데 11명은 올해 고교 2학년에 진학한다. 이들은 모두 다른 학교 야구부의 선수였지만 주전으로 활약하지 못했던 이들이다. 나머지는 올해 고교에 진학하는 신입생이다. 유 감독은 “다른 학교와 달리 3학년 선수가 없어 취약한 점이 있어 올해에는 우선 ‘막 지지 않는 팀’이 되고 싶다. 경기에 뛸 기회가 적었던 선수들이 경험을 빨리 쌓으며 실력을 연마해 자신감부터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선수를 더 충원해 25명 안팎의 팀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각지에서 모인 선수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꿈을 좇고 있다. 한겨울이지만 요즘도 매일 오전 3시간, 오후 4시간씩 바깥에서 훈련하고 있다. 모두 사는 곳이 달라 의정부 시내에 있는 학교 옆 빌라를 얻어 감독과 선수가 합숙을 한다. 외야수를 맡고 있는 주장 최가람(18)씨는 지난해까지 서울 배명고 야구부 선수였다. 그는 “예전 팀에서 했던 것과 다르게 새로운 다짐으로 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구리 인창고에서 뛰다가 온 1루수 김성현(18)씨는 “열심히 실력을 쌓아서 졸업하고 바로 프로구단에 가고 싶다”며 “두산을 가장 가고 싶지만, 새로 생긴 KT도 좋고 나를 원하는 팀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946호 초점 고고야구단 현황

946호 초점 고고야구단 현황

KT와 부영의 경쟁이 낳은 효과

상우고 야구부처럼 올해 본격적으로 마운드에 데뷔하는 고교야구팀은 전국적으로 모두 5팀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야구부 창단을 공식적으로 확정한 곳으로, 현재 비공식적으로 창단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경기도 여주·안산 등의 고교까지 포함하면 최대 7팀이다. 지난해 KBA가 집계한 고교야구팀은 모두 53개다. 7팀이 모두 창단할 경우 1980년 이후 고교야구팀이 가장 많았던 1986년(59개)의 기록을 넘어설 수도 있다.

고교야구팀 창단 바람의 표면적인 원인으로는 프로야구의 꾸준한 인기 상승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재정 지원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프로야구 10구단 창단 과정에서 구체적인 고교야구 재정 지원을 약속하면서부터다. KBO는 지난해 7월 신생 학교 야구부에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앞으로 10년 동안 고등학교팀 20개, 중학교팀 30개 등을 새로 만들 계획이다. 게다가 그동안 프로야구 10구단 창단을 앞두고 전북 연고 구단을 내세웠던 ‘전북-부영’과 경기도를 대표한 ‘수원-KT’의 경쟁도 열기를 보태는 데 한몫했다. 프로야구 10구단은 지난 1월12일 ‘수원-KT’로 낙점됐지만, 경쟁 와중에 구단 유치를 위해 경기도와 전북도 지자체가 고교야구단 창단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새 프로구단이 생기면 자연스레 해당 지역 선수의 수요도 늘어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신생 고교야구팀이 경기도와 전북에 집중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생 고교야구팀 가운데 가장 이른 지난해 10월 창단한 곳은 경기도 시흥의 소래고다. 현재 중학교 졸업 예정자인 신입생 1명과 고교 재학생 9명으로 팀을 꾸린 소래고 야구부는 필리핀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소래고는 지난해 6월 KBO가 중·고교 팀 창단과 기존 팀 지원을 하려고 만든 ‘베이스볼 투모로우(Baseball Tomorrow) 펀드’의 지원을 받았다. 앞으로 3년 동안 모두 4억원의 지원금을 받기로 했다. 베이스볼 투모로우 펀드는 앞으로 5년 동안 적어도 100억원이 넘는 기금을 쌓아 학교 야구팀을 지원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전북에서는 정읍 인상고가 유일하게 지난해 12월21일 야구부를 창단했다. 이로써 전북에는 야구 명문으로 알려진 군산상고·전주고에 이어 세 번째 고교야구팀이 생겼다. 전북도는 학교에 잔디와 조명 시설 설치를 약속했다. 선수는 재학생 12명과 신입생 5명을 합해 모두 17명이며, 초대 감독은 주니어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전주상고 출신 진재영(56)씨가 맡았다.

투수 후보군에 있는 상우고 야구부 선수들이 줄지어 마운드에 올라 연습을 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다른 학교 야구부에서 뛴 탓에 유니폼이 제각각이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투수 후보군에 있는 상우고 야구부 선수들이 줄지어 마운드에 올라 연습을 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다른 학교 야구부에서 뛴 탓에 유니폼이 제각각이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경북 경주고, 재창단하는 이유

현재까지 KBA에 정식 등록을 마친 학교는 소래고와 인상고 2곳뿐이다. 그러나 경기도 수원 장안고가 지난해 10월 수원시에서 행정·재정적 지원을 받기로 약속받고 현재 창단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경기도 의정부 상우고는 창단 전이지만 이미 선수들을 뽑고 훈련에 돌입한 상태다. 경기도야구협회 관계자는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기도 여주시의 한 고교에서도 야구부 창단을 문의하는 연락이 온 적 있다”고 말했다. 고교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경기도 안산 지역의 고교에서 창단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문을 닫았던 야구부를 재창단하는 고교도 있다. 경북 경주고는 올해 10월 말까지 선수를 선발한 뒤, 경북도교육청에 창단을 신청하고 2014년부터 대회에 참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경주고 관계자는 “과거 선수 수급 등의 문제로 2008년 야구부를 해체했는데 올해 새 학기부터 선수를 모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주고는 KBO에서 올해 10월 창단 때 2억원을 지원받는 등 재창단기금으로 모두 4억원을 받기로 했다.

이처럼 고교야구팀이 늘어나자 당장은 아니지만 졸업생을 배출하는 시기부터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의 ‘도시연고제’에도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프로야구 신인 ‘1차 우선 지명’ 때 ‘도시연고제’를 적용하도록 KBO의 ‘야구규약’에 규정돼 있다. 도시연고제는 프로야구 구단이 고교야구 선수를 선발할 때 해당 구단의 연고 지역에 있는 고교야구팀 선수를 우선 지명하도록 하는 제도다. 이 때문에 서울을 연고지로 한 LG·두산·넥센은 서울에 있는 14곳의 학교를, 인천 SK는 인천에 있는 3곳의 학교를, 광주 기아는 전북의 학교 3곳을 연고로 하며, 대구 삼성(3곳), 대전 한화(1곳), 부산 롯데(5곳)도 연고 학교가 있다. 2008년부터는 한화가 모기업이 지원하는 충남 천안북일고·공주고와 충북의 고교 3곳을, 롯데는 울산·경남의 고교 4곳을, SK는 경기도 6곳, 강원 3곳을 1차 우선 지명에 보탰다. 지역마다 고교의 수가 달라 지역을 벗어난 지명권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수도권에 집중해 있는 신생 고교야구팀의 1차 우선 지명권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도 논란으로 남아 있다.

KBO·지자체 지원에 기대는 구조적 한계

고교야구 현장에서는 최근 불고 있는 ‘릴레이 창단’이 10구단 창단을 앞두고 반짝 스쳐가는 바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동안 고교야구에서는 몇 년 동안 한시적으로 이뤄지는 재정 지원으로 버틴 고교야구팀이 다시 해체되는 악순환이 반복돼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교야구단은 한 해 운영비만 2억원 가까이 드는데, 학교 쪽의 안정적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KBO나 지자체 예산에 절대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고교야구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지원이 절실한 이유다. 고교야구 선수층이 프로야구 수준의 가늠자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10구단 시대, ‘고교야구의 성장’이 숙제로 넘어왔다.

의정부=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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