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서울에 사는 선배가 물었다. “혹시, 고흥에서 깨끗한 매생이 좀 구할 수 있으려나?” “어? 고흥엔 매생이 안 나는 것 같은데?” 고흥에 이사 오고 한 번도 매생이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했는데, 고흥 선배들에게 여쭈니 “네가 자주 가는 영남면 앞바다에만 안 나는 거지” 하신다. 전라남도 고흥에 이사 온 지 2년 반, 이제 철부지는 좀 벗어났나 했는데 딱 우리가 사는 주변 말고는 너무 모르는 거다. 그러고 보니 장 보러 가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우리가 공짜로 먹고 사는 것들그 뒤론 깨를 들고 기름 짜러 갈 때, 쌀을 지고 뻥튀기 아저씨한테 갈 때, 부러 일삼아 장 구경을 다닌다. 그 철에 장에 뭐가 나오는지도 좀 알고, 물가도 좀 알자는 심산이다. “어머, 단호박 한 개에 3천원이야.” “헉? 말린 고사리 한 근에 5만원이라는데?” 새삼스레 물가에 놀라며 우리가 공짜로 먹고 사는 것들을 환산해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어쩌다 사람들과 식당에 갈 일이 있을 때, 우리가 흔히 먹고 사는 해산물이 나오면 우리는 농담을 던지곤 한다. “어머, 아직까지 이런 걸 돈 주고 사먹는 사람들도 있나봐.”
서울에 살 때 ‘먹고 사는 문제’라고 말하면 그건 당연히 ‘돈 버는 문제’라고 알아들었다. 그런데 이제 누가 내게 그리 말하면 나는 ‘내 입으로 무엇이 어떻게 들어가느냐’의 문제로 알아듣고 있더라. 이제 내게 ‘돈 버는 문제’는 ‘기름 덜 쓰고 사는 문제’다.
철 따라 배낭 메고 소풍만 다녀도 고흥엔 먹을 것이 천지다. 산이고 들이고 바다고 조금만 부지런 떨면 먹을 것을 죄다 공짜로 준다. 온갖 나물들, 온갖 해산물들, 시골 밥상이라지만 도무지 소박해지기 어려울 정도다. 냉동실 공간은 언제나 모자라고, 우리 집에 늘 더 필요한 건 항아리다. 기분에 따라 골라 먹는 꽃차, 잎차, 효소, 술…, 기호식품도 가지가지. 서툰 솜씨나마 농번기에 농사 좀 거들었다고 생기는 1년 먹을 마늘, 고추, 참깨, 들깨 같은 양념들. 지난해부터 세 마지기(600평) 빌려 농사짓는 논에선 가마니로 쌓아놓고 먹을 쌀을 주고, 요즘 유행하는 도시텃밭만큼도 안 되는 마당에선 철 따라 다 따먹지 못할 만큼 온갖 채소를 준다. 마당에만 나가도 흔한 쑥, 냉이, 달래, 머위 같은 건 가끔씩 생각날 때나 뜯어먹는 것들이다. 이제 우린 우리 집에 없는 건 그냥 안 먹는다. 그래도 내가 여기서 생전 처음 보는 먹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 서울 살 때에 비하면 백배는 다채롭게 먹고 산다.
의상학과 학생들이 쓰는 실습용 광목을 사다 먹물을 들이거나 감물을 들여 옷을 짓고,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옷은 인터넷에서 ‘묻지마 원단’을 사서 짓는다. 계절에 따라 원단값 차이는 좀 있지만 대개 1만원에서 3만원 정도면 네 식구 옷을 지을 수 있다. 우리 집 욕실엔 달랑 내가 만든 천연비누 한 장, 가을에 감 따다 담가놓은 감식초 한 병이 전부다.
내가 이러고 산다니 “손재주가 대단하시네요” 감탄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은데, 그럴 때면 나는 살짝 빈정이 상한다. 손재주는 젬병인데다 손이 느린 주제에 성격은 꼼꼼하기까지 해서 이런 수공업은 뭘 해도 좀 오래 걸리는 편이다. 요즘은 뭐가 됐든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서 맘만 먹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데, 나는 하고 당신은 안 할 뿐이다. 가령 바느질할 때 수도 없이 실수하는 나의 신조는 이렇다. “솜씨가 없으면 뜯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사는 건 우리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들은 철 따라 생기는 재료로 지들이 부침개를 부쳐 먹고, 말린 새우 갈아 새우깡을 만들어 먹는다. 식구 생일이 돌아오면 그 철에 고구마가 있느냐 단호박이 있느냐에 따라 전기밥솥 케이크를 만들고 서랍에 굴러다니던 양초를 재활용해 촛불까지 켜는 건 언제나 아이들 몫이다. 삐걱대서 여닫기 힘든 현관의 미닫이문은 시키지 않아도 작은아이가 고쳐놓았고, 이불 빨래 잘하고 새로운 요리에 창의력을 발휘하는 건 주로 큰아이다.
흙살림·밥살림·옷살림·집살림…사내아이들이 어찌 그리 살림을 잘하냐고 누군가 부러운 듯이 칭찬하면 나는 볼멘소리를 하곤 한다. “당신들 비싼 돈 주고 영어·수학 가르칠 때, 나는 비싼 돈 주고 그런 거 가르쳤거든?” 서울에 살 때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대안초등학교는 흙살림, 밥살림, 옷살림, 집살림 등 사람이 사는 데 기본적인 능력이 가장 우선이라고 가르쳤다. 정직하게 말하면 먹고 사는 일이 바쁠수록 웬만한 살림은 돈으로 때우며 살았고, 머리로만 자급자족을 꿈꾸던 우리 부부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고 있던 우리 아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우리 집엔 TV가 없다. 무엇보다 필요조차 생산하며 끊임없이 강요하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니 참 좋다. 스물, 열일곱인 우리 아이들에겐 휴대전화가 없다.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집전화면 충분하단다. 우리 부부는 인터넷에서 공짜로 구한 2G폰을 쓴다. 시어머니·시아버지도 같은 통신사를 이용하신다기에 가족끼리 묶는 설정을 했더니 인터넷도 무료라서 우리 네 식구가 쓰는 통신요금을 모두 합쳐도 3만원을 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노예로 만드는 매체에 매여 있지 않고,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 보충수업도 없고 야자도 없고 꼭 해야 하는 공부도 없고, 심지어 꼭 가져야 하는 꿈도 없다. 그런 채로 한동안 충분히 심심해하던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까지 필요한 만큼 방황도 하면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금은 두 아이 모두 몰두할 일을 찾고는 꽤 열심이다. 이 사회와 부모가 똘똘 뭉쳐 강요하는 정해진 길이 없었던 아이들은 스스로 정직한 자기 욕망을 발견해냈고 그것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배워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없이 살 수 없는 현금은 주로 내가 번다. 시골에 오기 전 먼저 귀농한 선배들이 이구동성, 꼭 필요한 만큼만 벌 생각이라면 젊은 사람이 거의 없어 시골에도 일은 많다더니 정말 그랬다. 전부 불안정 노동이라 불안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임노동을 많이 하려면 시골에 왜 왔나 싶을 만큼 생기는 일을 거절 못해 걱정이지 아직 일이 없어 걱정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친구랑 수다를 떨다가 새삼 신기한 발견을 했다. 서울에 살 때 ‘먹고 사는 문제’라고 말하면 그건 당연히 ‘돈 버는 문제’라고 알아들었다. 그런데 이제 누가 내게 그리 말하면 나는 ‘내 입으로 무엇이 어떻게 들어가느냐’의 문제로 알아듣고 있더라. 이제 내게 ‘돈 버는 문제’는 ‘기름 덜 쓰고 사는 문제’다. 우리 집 생활비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게 교통비와 난방비, 전기료 같은 기름값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지기는 3년째 죽어라고 ‘적정기술’과 손수 ‘집짓기’ 공부를 한다.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고 사는 집을 짓는 게 목표다. 이제 집터가 생겼으니 조만간 네 식구가 함께 집을 짓기 시작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이 모든 일이 결코 쉬운 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 아직도 초보 딱지를 떼지 못했고, 안 하던 일을 하다보니 끙끙 앓으면서 자는 날도 적지 않다. 그마저 여전히 체험학습을 하는 수준으로 따라다니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배들이 없었다면 턱도 없는 일이다. 시골 정서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우리가 이웃들과 관계 맺는 일도 몹시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 중의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먹고 먹히는’ 게 아니라 ‘먹고 먹이는’ 자연과 자연,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생애 처음 몸으로 배우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노동에 환멸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것을 얻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함께 놀 수 있는 시간. 한동안 유행하던 말로 ‘저녁이 있는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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