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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는 수사관과 대등하지 않다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재판의 중요한 증거…

‘기울어진 운동장’ 사회적 약자들 자신 방어할 방편 필요
등록 2017-09-05 01:55 수정 2020-05-02 04:28
일반 형사사건에서 수사 과정부터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경찰 수사에서 잘못 진술하면 ‘유죄’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탈 수도 있다. 죗값 이상의 처벌을 받는 것이다. 저지르지 않은 일의 책임을 질 수도 있다. ‘자기변호노트’는 이런 일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일반 형사사건에서 수사 과정부터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경찰 수사에서 잘못 진술하면 ‘유죄’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탈 수도 있다. 죗값 이상의 처벌을 받는 것이다. 저지르지 않은 일의 책임을 질 수도 있다. ‘자기변호노트’는 이런 일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집회에 나갔다가 연행된 시민, 인터넷에 정부 비판 글을 쓴 시민들이 경찰 소환을 받았다며 조사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종 상담해온다.

나는 보통 다섯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한다. ① 얘기를 최대한 적게 한다. 과묵한 피의자가 최선의 피의자다. ② 질문을 끝까지 듣고 이해한 다음 답한다. 만약 이해되지 않으면 다시 물어 이해한 뒤 답한다. ③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지 절대 추측해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질문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면 진술할 필요가 없다. ④ 똑똑한 척 하지 마라. 수사관이 사실이나 전문적 영역 지식을 잘 모른다고 보일 경우 이를 설명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수사관이 원하는 일이다. ⑤ 토론하려 하지 마라. 수사관은 혐의를 입증하려는 명백한 목표를 가지고 임하는 사람일 뿐이다. 설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토론 과정에서 수사관의 의도에 말려든다.

비판받는 한국의 형사절차 시스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막상 조사받을 때는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말을 듣곤 한다. 헌법에서 보장한 묵비권(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해도 수사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리 작성한 질문지에 따라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이유를 캐묻는 일이 많다. 결국 묵비권을 포기하고 진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피의자 신문을 마치면 조서를 출력해 검토·수정하는 절차가 있는데, 수사관 앞에 혼자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조서 내용이 제대로 정리됐는지 검토하고 수정을 요청하는 것도 어렵다. 사실과 다르게 조서가 작성됐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며 뒤늦게 하소연하는 사람도 많다.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걸까. 수사관과 그 앞에 앉은 사람이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 정보, 법적 전문성 모든 것이. 게다가 장소는 수사관에겐 편한 직장이지만 피의자에겐 사방에 자기 편은 없는 닫힌 공간이다. 여기에 수사관이 강압적 태도로 추궁이나 회유를 하는 상황이면 피의자는 속된 말로 ‘멘붕’에 빠진다. 자신이 무슨 질문에 무슨 답을 했는지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좀더 본질적인 원인은 우리나라 형사절차에 있다. 우리 형사절차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해 법정에 증거로 제출토록 하고 법원은 일정 조건 아래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증거로 채택한다. 수사기관이 작성하는 피의자신문조서가 재판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이 피의자신문에 공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과 일본법을 도입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제도다. 영미법계와 독일 등 대륙법계 국가에선 이런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 때문에 자백 위주의 수사 관행과 강압 수사가 조장된다. 그로 인해 한국의 형사절차에 대해선 공판중심주의와 직접주의, 전문증거 배제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계속돼왔다.

돈과 지위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꾸기도 한다. 변호사가 충실한 조력자가 되어 수사관과 대등한 수준에서 수사받을 수 있다. 심지어 전관 변호사를 통해 수사기관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얼마 전 국정 농단으로 수사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변호사 입회하에 휴식을 취하며 무려 6시간에 걸쳐 조서를 열람·수정한 사례가 언론에 보도됐다. 일반인은 꿈꾸기 어려운 풍경이다.

단지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피의자는 평등하지 않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수사관 앞에서 일부 권력층이 당연히 누리는 헌법상 기본권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도 행사하지도 못한다. 특히 장애인, 청소년, 외국인, 노숙인과 같이 방어능력이 취약한 이른바 ‘형사방어능력취약자’는 더욱 위험한 상황에 놓인다.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해 사건’이나 ‘수원역 노숙 소녀 살해 사건’ 등 일련의 재심 사건을 통해 수사기관이 강요한 허위 자백과 증거 조작을 둘러싼 추악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사기관이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일반 국민이 수사기관을, 수사절차 전반을 얼마나 불신하는지 수사기관은 아마 피부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인권단체를 문턱이 닳도록 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수사절차가 공정하지 않고 일방적이며, 돈과 권력이 없으면 더더욱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법조 개혁을 고민하면서 우리는 양극화된 피의자 집단 중 아래층을 차지하는 시민들이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방편이 필요하다는 것, 고립돼 있지 않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가 ‘피의자의 메모할 권리’ 보장에 주목한 이유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이렇다. 피의자가 작성하는 ‘자기변호노트’가 있다. 자기변호노트는 변호사가 건넬 수도 있고 경찰과 검찰, 구치소에도 비치돼 원하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노트에는 조사 때마다 기본적인 수사절차가 지켜졌는지, 어떤 내용으로 수사를 받았는지, 인권침해적 내용은 없었는지를 적도록 돼 있다. 피의자는 신문 도중 쉬는 시간에 노트를 작성할 수 있다. 기억이 흩어지기 전에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구치소에 돌아간 직후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방식으로 조사받을 때마다 계속 노트를 작성한다. 변호사를 만날 때 자신이 작성한 노트를 전달하면 변호사는 수사 과정을 확인해 조력할 수 있다. 설령 변호사가 없어도 노트는 자기 변호를 위한 기록이 된다. 시간이 흘러도 수사과정의 기억을 정확히 환기할 수 있고 재판받을 때도 변호할 수 있다.

별게 아닌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수사기관의 생생한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제일 먼저 수사기관이 피의자가 쪽지 메모를 하는 것조차 제대로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 피의자도 당당히 수사 내용을 기록한다는 인식 전환이 있어야 한다. 조사가 길어지면 피의자가 메모할 수 있도록 휴식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 유능한 전관 변호사를 선임한 사람뿐 아니라, 가장 가난하고 방어능력이 취약한 이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자기변호노트’를 쓴다면

자기변호노트의 의미는 단지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변호노트에는 수사절차에 대한 쉬운 설명과 노트 사용 매뉴얼이 적혀 있다. 누구나 이를 읽고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앞으로의 수사절차를 이해할 수 있다. 자기변호노트가 온라인이나 애플리케이션에 게시돼 있다면 이는 시민의 형사절차 이해에 훌륭한 교육자료가 될 수 있다.

물론 노트를 작성했다고 많은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진 않는다. 그러나 노트가 현장에서 널리 사용되면 검경이 주도하는 일방적 수사 관행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수사절차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상상력도 제공한다. ‘수사의 밀행성’과 ‘시민 인권’을 어떻게 바라볼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 다양한 개혁 방안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정부가 발표한 형사공공변호인 제도가 도입돼 그와 결합된다면 자기변호노트의 효과는 커질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피의자신문 과정의 ‘영상녹화’를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피의자 등이 영상녹화를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피의자 등이 요구하면 녹화물을 재생하거나 복사본을 제공해야 한다. 영상녹화가 수사기관의 증거능력을 인정받는 수단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한발 더 나아가, 피의자신문조서가 직접 재판의 증거로 쓰이는 현행 제도를 뒤바꾸는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송상교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장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받는 불이익


외국인에게 더 필요한 ‘자기변호노트’


외국인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가장 곤란을 겪는 집단이다. 한국 형사절차에 익숙지 않은데다 통역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변호사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외국인들에게 ‘자기변호노트’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실제 자기변호노트의 원형인 일본 ‘피의자노트’는 10여 개 외국어로 번역돼 있다.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법률 지원 등을 하는 이주민지원센터 ‘친구’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와 함께 자기변호노트를 중국어·몽골어 등 8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할 계획이다. 이 작업은 최근 ‘장하성 재단’의 공익사업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친구’의 조영관 변호사는 “외국인들은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일로 조사받는지, 언제까지 잡혀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적절히 통역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가령 아랍어의 경우 여러 방언이 있는데 소통이 힘들 정도로 차이가 크다. 통역인이 해당 방언을 모르면 제대로 통역되기 힘들다”고 말했다.
‘친구’는 외국인을 위한 자기변호노트를 내국인을 위한 자기변호노트에 기초해 형사절차에서 사용되는 각종 용어 설명과 수사 중에 요구할 수 있는 피의자의 권리 등을 설명하는 내용을 넣은 뒤 통역의 문제점은 없었는지 등 외국인에게 필요한 점검 항목을 추가로 포함시킬 계획이다.
조 변호사는 “자기변호노트 한국어판이 완성되는 10월부터 작업을 시작해 올해 안에 번역 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수사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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